495화. 선행(仙杏)
백소천은 심협을 힐끗 쳐다본 뒤, 그의 수명이 줄어든 일이며 팔각연엽을 먹은 뒤에도 수명을 늘릴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했다.
정교금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다가와 심협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온기가 주입되어 그의 체내를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무모한 짓을 했구나! 네 경맥은 겉으로는 괜찮으나 속은 이미 위축된 기미가 보이고, 본명원기는 혼잡하여 순수하지 않아! 여러 차례 수명을 소모하는 비술들을 시전했다가 다시 수명을 늘려주는 보물로 수명을 보충한 적이 있는 게야. 그렇지 않으냐?”
정교금은 깜짝 놀라 심협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호통 쳤고, 심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명원기는 생명의 근본이다. 어찌 함부로 끌어다 썼단 말이냐!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것들은 네 수명을 늘려줄 수는 있어도 소모된 생명의 잠재력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명을 늘려주는 영약도 먹을수록 효과가 떨어진단 말이다. 어찌 이리 무모한 짓을 저지른 게야!”
정교금은 노여워하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책망했다.
“혹시 심형의 이런 상태를 고칠 수 있습니까?”
백소천이 다급히 물었고, 심협도 기대에 찬 눈으로 정교금을 바라보았다.
정교금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 소우는 이번에 본명원기가 너무 크게 손상되어 회복시킬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군.”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꿈속에서도 꿈 밖에서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거의 남들의 두 배에 가까운 대가를 치렀고, 평범한 수사들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위험들을 겪었다. 그리 힘들게 지금과 같은 성과를 거뒀는데, 이렇게 되다니. 제아무리 강해봐야 수명이 5년도 남지 않았다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네들, 급할 게 무언가? 나야 방법이 없지만, 여기 원 국사도 계시지 않은가? 국사, 방법이 있으신지요?”
정교금은 심협과 백소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위로하며 원천강에게 물었다.
원천강이 다가가 불진을 한 번 휘두르자 하얀 빛줄기가 심협의 몸을 덮고 천천히 흐르더니 잠시 뒤 번쩍하고 사라졌다.
“심 소우의 상태가 회복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네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아.”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사실입니까? 가르쳐주십시오, 원 국사님!”
원천강의 말에 심협은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심 소우, 이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자네가 이번에 중상을 입은 것은 천하 창생들을 위함이었으니 우리가 응당 도와야지.”
원천강은 한 손을 세우며 예를 갖췄다.
“자네의 내상을 치료하려면 두 가지 일을 해야 하네. 첫 번째는 바로 신목은택(神木恩澤)을 익히는 것인지. 우리 사문의 비전(秘傳)으로, 초목의 정수가 지닌 힘을 흡수하여 육신을 보양하며, 부상을 치료할 수 있지. 또한 심오한 경지까지 수련하면 본명원기를 다듬어 상한 것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길 수 있으니, 자네의 현재 상태를 돌보는 데 안성맞춤일 게야.”
원천강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심협은 신목은택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지만, 원천강이 그토록 격찬하는 공법이라면 분명 예사롭지 않을 터였다.
“그럼 두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신목은택은 자네의 본명원기를 돌볼 수는 있으나 정상 상태로 회복시킬 수는 없네. 자네 몸을 낫게 하려면 아무래도 외력의 도움이 필요할 게야. 다만 자네는 이미 너무 많은 수명 연장 영약을 복용했으니 평범한 영물로는 충분치 않네. 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네의 부상에 효과가 있는 것은 보타산의 선행(仙杏)뿐이야. 그 물건은 신목은택과 속성이 서로 잘 맞으니 정제하기 더 쉬울 걸세.”
“선행이요?”
원천강의 설명에 심협은 꿈속의 옥간에서 본 보타산 선행에 대한 기록이 떠올랐다.
옥간의 설명에 따르면 보타산에는 하늘에서 내린 세 그루의 영근(靈根)이 있다. 알려지기로는 천계에서 온 만년 된 선행나무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효능이 있다고 한다.
선행의 효능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옥간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그 외에는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은 풍문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어떤 이는 선행 한 알을 먹으면 천 년치 수행을 늘릴 수 있다고 했고, 천 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이도 있었으며, 심지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설도 있었다.
“보타산의 선행이라……. 물론 그런 선계의 물건만이 그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국사께서는 그를 이번 선행대회에 참가시키실 생각이십니까?
옆에 있던 정교금이 끼어들어 물었다.
“선행대회요?”
심협은 들어본 적이 없어 어리둥절해 했다.
“보타산의 선행은 수선계의 유명한 선과라네.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단약을 만드는 데 쓸 수도 있지. 효력이 뛰어나서 수선계의 각 큰 문파들이 꿈에서도 바란다네. 허나 이 선행은 수백 년에 몇 개밖에 열매를 맺지 않으니, 이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매번 선행이 익으면 보타산에서는 대회를 열지. 이 선행대회에서는 천하 각 문파의 젊은 인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예로써 우정을 쌓고, 선행의 소유권을 결정한다네.”
원천강이 설명했다.
“그렇다면 수백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것 아닙니까?”
백소천이 당황한 듯 물었다.
“허허, 다행스럽게도 다음번 선행대회가 1년 뒤에 열린다네. 내 심 소자가 이번 대회에 참가하도록 대당관부의 이름으로 추천해줄 수 있지. 허나 선행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자네 스스로의 재주에 달렸네.”
원천강이 손을 흔들며 설명을 이어가자 백소천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협 역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지금 그의 수련 경지에 몇 가지 귀중한 보물들을 더하면 대승기 수사도 막아낼 수 있으니, 각 종문의 젊은 또래들이 상대라면 해볼만했던 것이다.
“저를 위해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심협은 원천강에게 깊이 공수했다.
“심 소우, 매번 선행대회에는 각 대종문에서도 가장 강한 제자를 보낸다. 그러니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방심해서는 안 돼!”
정교금이 짧게 주의를 주었다.
“정 국공 대인의 깨우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심협도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행대회까지 아직 1년이 남았으니 그 동안 우선 신목은택을 깨우치시게나.”
원천강이 손가락을 구부려 튕기자 녹색 빛이 한 줄기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이는 녹색 옥간이었다.
심협은 손을 뻗어 옥간을 받아들고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자, 이제 자네들은 물러가보게.”
원천강이 손을 흔들자 심협과 백소천은 예를 갖추고 물러갔다.
“심 소자의 말에 진실이 얼마나 될까요?”
두 사람이 떠난 뒤 정교금이 물었다.
“대부분은 진실인 듯합니다만, 정보의 출처를 이야기할 때 신혼의 파동이 비교적 컸으니 짜낸 이야기이겠지요.”
원천강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놈이 보기보다 약았다니까요.”
정교금은 장난스레 험담을 해댔다.
“아마도 뭔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허나 그건 그리 나무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나쁜 길로 들어서지만 않으면 되지요.”
원천강도 미소를 내비치며 답했다.
“환생한 다섯 마혼의 일은 천정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우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니까요. 우리의 실력은 너무도 약합니다.”
정교금이 제안했다.
“그것도 좋지요.”
원천강은 그다지 달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심형, 자네는 일단 폐관하면서 공법을 깨우치는 데 힘쓰게. 나는 사문에 가서 상황을 보고해야 하니 먼저 물러가겠네.”
백소천은 대전을 나와 심협에게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백형, 잠깐 기다리시오.”
심협이 그를 붙잡았다.
“왜? 내게 볼 일이 남았는가?”
백소천이 돌아섰다.
“별일은 아니오. 내가 성련법단사의 보장실 안에서 최상품 태양석 두 덩이를 찾아내 옥패를 만들었소. 번거롭겠지만, 백형이 백가에 부탁하여 이것들을 춘화현성의 우리 아버지께 전해줄 수 있겠소?”
심협이 새빨간 옥패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이 두 덩이 태양석은 그의 제련을 거쳐 적잖이 줄어들었지만, 뿜어내는 기운은 더욱 순수하고 중후해졌다.
“심형의 효심은 역시 갸륵하구먼. 안심하게, 내 반드시 보낼 터이니.”
백소천이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심협은 멀어지는 백소천을 눈으로 배웅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마족과의 싸움에 휘말려 더욱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낼 수 없었고, 만약 마족에서 그의 고향을 알아낸다면 심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심협은 돌아서서 예전의 처소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는 신식을 녹색 옥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옥간 위에는 온통 깨알 같은 글씨로 신목은택 비술이 빼곡하고 가지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한 글자, 한 구절씩 소리 내어 읽어보니, 신목은택의 구결은 매우 난해하고 예스러운 느낌이 났다. 또한 낱말과 문장의 쓰임도 현재의 공법과는 크게 달라서 마치 상고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공법 같았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이 공법을 깨우치기 어려웠을 것이나, 심협은 현실과 꿈속에서 수많은 공법을 보고 경험했기에 금세 완벽히 깨닫게 됐다.
그는 신목은택의 구결에 따라 이 공법을 속으로 가만히 운공했다.
심협은 나무 속성 공법을 수련한 적이 없었지만, 목둔술(木遁術)인 을목선둔을 심오한 경지까지 수련한 경험이 있었기에 신목은택에도 금방 입문하였다.
곧 그의 몸 곳곳에서 실오라기 같은 녹색 빛이 떠오르더니 공법의 운행을 따라 단전으로 모여들어 녹색 회오리를 이루었다.
녹색 회오리의 가닥가닥 녹색 빛들은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있었다. 빛깔과 광택이 서로 달라 퍽 난잡해 보였다.
이것들 모두 심협이 예전에 복용했던 온갖 단약들 속에 담겨 있던 을목의 기운으로, 그의 몸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신목은택이 운행되자 이 혼잡했던 을목의 기운들은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면서 순수한 을목의 영력으로 변해 그의 간장으로 스며들었다.
심협은 마치 어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몸 곳곳에 숨겨져 있던 이 을목의 기운들은 모두 드러나지 않은 병이었고, 날이 갈수록 쌓여 조만간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목은택이 이 을목의 혼잡한 기운을 모조리 정제했으니 몸이 자연히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속으로 신목은택의 현묘함에 감탄하며 계속 이 공법을 운공했다. 그러자 그의 몸 가장 깊은 곳에서 차츰 온기가 솟아오르면서 본명원기가 따라서 솟구쳤는데, 이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심협이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곧 자신의 본명원기가 을목의 기운과 마찬가지로 무려 대여섯 가지나 섞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그의 몸과 완벽하게 어울렸고,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명원기였다. 다른 네다섯 가지의 전혀 다른 원기 중에는 신룡(神龍)의 기운도, 봉황의 힘과 기린의 힘도, 천년영유도 있었다.
이 기운들은 그의 본명원기와 한데 뒤섞여 있어, 비록 해를 끼치진 않더라도 순수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수명을 연장해주는 다른 영약들을 더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해서 신목은택을 운공했다.
한참 뒤, 놀랍게도 혼잡한 본명원기가 차츰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원 국사의 말씀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신목은택이 정말 본명원기를 순화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어!”
그는 크게 기뻐하며 계속해서 신목은택을 운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