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7일 밤낮
“화모는 천청의 선장(仙將)이었소. 천정이 치우에게 멸망당한 뒤 남은 천선(天仙)들은 현재 거의 다 내 쪽에 있소이다.”
화 도인의 소개에 우마왕은 고소하다는 듯 차게 웃었다. 천정이 멸망했다는 말 때문인 듯했다.
화 도인는 노여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우마왕은 그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순간 긴장되었다.
“크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 도와 함께 마족을 막아내야 하니, 묵은 원한은 다시 꺼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족을 상대도 하기 전에 우리끼리 싸우다 끝나지 않겠습니까?”
심협이 마른기침을 하며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심 도우 말이 맞소. 두 도우는 각자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게 좋겠구려.”
원 도인이 타이르며 말하자 우마왕은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옮겼고, 화 도인도 눈길을 거두었다.
“화 도우께서는 천정의 선장이셨군요. 지금 천정에는 병력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심협이 분위기도 바꿀 겸 화 도인에게 물었다.
“천책에 이름이 올라 있던 십만 천병과 천장들은 태반이 목숨을 잃어 지금은 일할도 남지 않았소. 천책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다른 선관과 신장(神將)들은 마족 손에 죽었거나 각지를 떠돌고 있지. 그들과 연락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지금은 마족들이 세상을 장악한 터라 순탄치 않소.”
화 도인이 깊게 탄식했다.
“그렇군요. 그럼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이 도우와 함께 있습니까?”
심협이 물었다.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 그날 천정이 함락된 뒤 그와 연락이 끊어졌소. 그가 아직 살아 있소? 심 도우는 그의 행방을 아시오?”
화 도인이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제가 가진 천책 잔편으로 그에게 연락할 수 있지요.”
심협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사실대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은 우리 천정의 중요한 신장이오. 심 도우가 그의 힘을 적절하게 잘 써주시기 바라오.”
화 도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당부했다.
심협은 내심 쓰게 웃었다. 그야 물론 잘 쓰고 싶지만,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은 아직 자신을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반드시 천장을 이겨야만 상대가 자신을 섬기게 되는 규칙을 이정이 왜 정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뇌모는 서천 영산의 불도(佛徒)요. 영산은 치우와 한바탕 대전을 치른 뒤라 상황이 천정과 별반 다르지 않소. 비구(*比丘: 남자 승려), 나한(*羅漢: 소승불교에서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아라한이라고도 함), 보살이 얼마 남지 않았소. 지금은 거의 다 이쪽에 있고 말이오.”
옆에 있던 뇌 도인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우형, 그 불광사리는 뇌 도우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심협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실로 감사하오.”
우마왕은 상대방을 잠시 보고 있다가 공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평천대성.”
뇌 도인도 예를 갖추어 답했다.
“심모의 신분은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네 분과는 달리 저는 혈혈단신입니다. 하지만 덕분에 심모는 구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요. 앞으로 꼭 해야 하지만 직접 나서기 힘든 일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심협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좋군! 마족의 세력이 크다고는 하나 우리 다섯이 합심하여 손을 잡는다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야! 허허허!”
원 도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우마왕과 화 도인, 뇌 도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소집은 우마왕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자리였기에, 다섯 사람은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금세 대화를 끝냈다.
마독이 다 풀린 우마왕은 천책 잔경에서 돌아오자마자 밖으로 나가 마족의 침입에 철저히 대비했고, 별다른 일이 없던 심협은 자신의 동부로 되돌아왔다.
우마왕이 완쾌돼 일단 한숨 돌린 틈에 그는 상처를 치료하면서 몸속의 회백색 회오리를 살펴보았다.
한데 그 순간, 심협은 돌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다음 순간, 모든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 * *
흩어졌던 의식이 천천히 응집되면서, 심협은 차츰 깨어났다. 누군가 몸을 일고여덟 바퀴쯤 잡아 뒤틀었다가 식초 항아리에 내던져 3년은 처박아둔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심협은 신음하며 가까스로 남은 힘을 끌어모아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은 어느 전각의 천장으로, 커다란 불(佛)자가 한가운데에 높이 걸려 있었다. 둥글둥글한 금빛 문양들과 수많은 나한, 보살들이 이 불자 주위를 둘러싼 것으로 보아 어느 불당임이 분명했다.
“심형, 깨어났군!”
그의 시야에 불쑥 나타난 얼굴에 심협은 화들짝 놀랐다.
‘백형? 아아…… 현실 세계로 돌아온 모양이군.’
그가 속으로 탄식했다.
“심형? 자네 괜찮은가?”
백소천은 심협이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급히 손을 뻗어 눈앞에서 흔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소. 어지러우니 그만 좀 흔드시오. 어지러워 죽게 만들 참인가. 참내…….”
심협은 내심 반가워 짐짓 퉁명스레 투덜거렸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자 심협은 일어나 앉으려 했다.
“안 돼! 자네는 몸이 너무 허약하니 조용히 쉬어야 하네. 그러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되네.”
백소천이 곧바로 심협의 어깨를 누르며 말렸다.
그 말에 심협은 체내를 살펴보고는 낯빛이 살짝 변했다. 몸속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경맥은 뒤죽박죽이었고, 기혈은 손실되었으며, 부상은 예전에 꿈속의 법력을 소환했던 그 어떤 때보다 더 안 좋았다.
부상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수명이 엄청나게 손실되었다는 것이었다. 출규기에 들어서면서 늘어났던 수명이 이번에 거의 완전히 손실되어 5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심협은 거의 절망에 빠져버렸다.
“심형, 자네가 전에 쓴 것은 어떤 비술인가? 위력이 크긴 하나 반서가 너무 심해서 자네 거의 죽을 뻔했네.”
백소천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첨과를 이길 수 있었겠소?”
심협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깨어났으니 되었네. 푹 쉬시게나. 나는 바로 건너편 방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부르게나.”
백소천은 심협의 부상이 얼마나 심한지 알기에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백형, 내가 얼마나 혼절해 있었소?”
심협이 백소천을 불러세웠다.
“벌써 7일이나 지났다네.”
백소천이 말했다.
“7일? 내가 그리 오랫동안 의식이 없었단 말이오? 그간 상황은 어찌 되었소? 첨과는 이미 죽었소?”
심협은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이내 물었다.
“그렇다네. 첨과는…… 자진하였지.”
백소천은 이어서 심협이 의식을 잃은 뒤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부서졌던 봉인은 첨과가 죽고 오래지 않아 갑자기 저절로 복구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봉인이 스스로 복구되었다고?”
심협은 미간을 팩 찌푸렸다.
그 봉인 법진은 마계의 통로를 봉인하고자 천정의 선인이 설치한 것으로 매우 복잡한데 어찌 스스로 복구되었단 말인가?
‘설마 천정의 사람이 법진이 파괴된 것을 느끼고 그를 다시 봉인한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럼 첨과의 시신은요?”
심협은 퍼뜩 떠올라 물었다.
첨과 역시 불쌍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첨과에게 그리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그날 첨과는 마기를 직접 흡수하여 경지를 그런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으니 결코 일반적인 마기에 물든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시신이 아직 남아 있다면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이정이 서역에 있다던 마혼의 환생은 십중팔구 첨과일 터였다.
“시신은 성련법단사의 대전에 있네. 선아와 서역의 여러 승려들이 첨과와 입적한 승려들의 천도법회를 주관하는 중이지.”
심협은 시신이 아직 있다는 말에 안도했지만, 곧바로 또 다른 일을 깨달았다.
“선아가 성련법단사에 있다니! 혼자 거기 있으면 위험하지 않겠소?”
“안심하게나. 오계국은 이미 전국 각지의 성련법단사들을 조사하여 폐쇄하고, 사악한 법술을 수련한 적이 있는 승려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니 말이야. 여기도 적곡성의 성련법단사라네. 이제 이곳은 위험하지도 않아. 그리고 금선대사 곁에는 염주가 있으니 문제없을 걸세.”
“그렇다고는 해도 백형이 함께 있는 것이 좋겠소. 나는 혼자 있어도 괜찮소.”
백소천의 말에 심협은 한시름 놓았지만,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 그럼 내가 가볼 테니 자네는 안심하고 쉬게나.”
백소천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심협은 시선을 거두고는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체내에 남아 있는 법력으로 부상을 치료했다. 그러나 상태가 너무나 엉망진창이라 동원할 수 있는 법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법력을 운행할 수 없다는 것은 요상 단약을 복용해도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허공에 파동이 일더니 새빨간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그가 굴복시킨 흡혈귀 영수였다. 심협은 일전에 첨과와의 싸움 직후 정신을 잃는 바람에 통령 통로를 열어줄 겨를이 없었고, 그 탓에 흡혈귀는 그동안 줄곧 이쪽 세계에서 머무른 것이다.
심협이 백소천을 서둘러 떠나게 한 것도 흡혈귀가 옆에 잠복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불편할 테지. 돌아가고 싶으냐?”
심협은 흡혈귀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엷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흡혈귀가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알았다. 허나 지금 내 부상이 너무 심해서 이틀 정도 몸조리를 해야 너를 돌려보낼 여력이 생길 게다.”
심협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양해를 구했다.
한데 흡혈귀가 돌연 몸을 굽히더니 심협의 팔뚝을 꽉 깨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하는 짓……?”
심협은 미간을 팩 찌푸렸다.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서늘한 기혈의 힘이 주입되더니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그에게 잘 맞는 기혈의 힘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숨통이 트였다. 게다가 이 기혈의 힘에는 의외로 쓸 만한 치료 효과가 있어서 손상된 경맥 일부가 적잖이 치유되었다.
“이건……?”
심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게는…… 제 정혈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인님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지요…….”
흡혈귀가 띄엄띄엄 말했다.
“그렇구나. 고맙다.”
심협은 말을 마치고는 속으로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흡혈귀의 치료 덕에 동원할 수 있는 법력이 크게 증가하여 거의 1할에 다다랐고, 통령술을 시전하기에도 충분했다.
그가 통령역요술을 운공하여 통로를 열자 흡혈귀는 한 줄기 혈광으로 변해 자취를 감추었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하며 상처를 치료했다.
우선 요상유영단을 하나 복용하고는 법력으로 정제하는 동시에 대개박술을 운공해 상처를 치료했다.
그의 몸에서는 곧 푸르고 하얀 빛이 피어올랐고, 흐트러진 경맥이 차츰 정리되면서 부상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틀 뒤, 비록 완쾌되지는 않았어도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