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91화 (491/1,214)
  • 491화. 목적을 밝히다.

    심협은 곧장 일어나 밀실 밖으로 나가서 곧 우마왕의 거처로 갔다.

    “심 선배님!”

    대승기의 하얀 소 요괴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가 심협을 보고는 급히 예를 갖추었다.

    “평천대성의 상태는 어떠하오?”

    심협이 굳게 닫힌 대문을 보며 물었다.

    “대왕과 호왕께서 여러 방법을 시도하셨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얀 소 요괴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심모가 방금 좋은 단약을 하나 얻었는데 대성의 상처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오. 번거롭더라도 귀하께서 좀 기별을 넣어주시겠소?”

    “정말입니까? 당장 들어가 아뢸 터이니 선배님께서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하얀 소 요괴는 크게 기뻐하며 냉큼 방으로 들어갔고, 머지않아 다시 나왔다.

    “대왕께서 안으로 모시랍니다.”

    소 요괴는 예를 갖추고는 문을 열었고, 심협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약 내음이 훅 끼쳐왔다.

    우마왕은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뺨에는 동전만 한  알록달록한 반점들이 나타나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무서워 보였다.

    만세호왕은 하얀 옷의 소녀 하나와 우마왕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옥면공주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녀는 이미 완전히 기억을 찾은 듯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심형, 왔는가?”

    우마왕은 고개를 들고 심협을 바라보면서 힘겹게 웃었다.

    “우형, 상황이 어찌 이 지경까지 악화되었습니까?”

    심협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휴우, 마혈의 독이 이토록 지독할 줄이야. 내 갖은 수를 다 썼는데도 독을 제거하기는커녕 이제 내 몸속 원기마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네. 이 맹독은 고치기 어려울 듯해.”

    우마왕이 맥없이 말했다.

    “우형,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제가 방금 좋은 단약을 한 알 얻었으니 아마 쓸모가 있을 겁니다.”

    심협은 노란 호리병을 꺼내 안에서 황금빛 단약을 한 알 쏟아냈는데, 그 위에는 일곱 줄기의 문양이 금빛 연꽃 한 송이를 이루었다. 금빛 연꽃은 엷은 불광을 뿜어내며 천천히 회전했다. 마치 생명을 지닌 것만 같았다.

    “불문(佛門)의 단약!”

    우마왕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불광사리(佛光舍利)로군!”

    만세호왕은 뜻밖에도 단약을 알아보고 기뻐했다.

    “부왕, 이 단약이 대성의 독에 정녕 유용하옵니까?”

    옥면공주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이 단약은 서천 영산에서 천 년 전에 이미 자취를 감춘 해독 영약이니라. 오로지 마독만을 해독하는 것이니 분명 효험이 있을 게야!”

    만세호왕의 말에 옥면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단약을 가져다 우마왕에게 먹이려했다.

    그러나 우마왕은 침울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는가? 홍해아와 옥면 모두 이미 돌아왔는데, 자네는 아직까지 당시의 일들을 담아두고 있는가? 더군다나 심 도우가 애써 이런 영약을 구해다주었는데, 이 무슨 추태인가!”

    만세호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형, 저도 우형이 불문에 원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허나 저쪽 마족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태을경의 고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공주님의 혼백을 찾으러 갔다가 한번 붙어보았는데,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해 머리를 써서 가까스로 도망쳐왔지요. 만약 그자가 공격해온다면 우형 외에는 그를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대국을 중히 여기십시오.”

    심협은 청령현녀를 떠올리며 우마왕을 설득했다.

    이에 우마왕은 조금 풀린 얼굴로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집을 꺾고 불광사리를 삼켰다.

    그 순간, 방 안에 갑자기 용이 울부짖는 듯 또는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괴성이 끊이지 않고 울렸고, 잠시 후에는 문틈으로 눈부신 금빛이 새어나왔다. 상서로운 기운이 만발하여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하얀 소 요괴가 크게 놀라 문밖에서 물었다.

    이 금빛과 상서로운 기운은 족히 1각이나 지속된 후에야 천천히 흩어졌다.

    금빛만이 아니라 우마왕의 몸에 생겨났던 반점들도 전부 사라졌다. 심지어 그의 피부 아래에도 고운 금빛이 어렴풋하게 뿜어져 나와 중독되기 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보일 정도였다.

    “역시 영산의 묘약이로다! 체내의 마독은 거의 다 없어졌군.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천천히 운공하여 제거할 수 있으니 염려할 것이 못 되네. 대단히 고맙네, 심형.”

    우마왕은 불문에 대한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시원스레 말했다.

    “별말씀을요.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내심 긴장했던 심협도 이내 안도했다.

    “장인어른, 죄송하지만 잠시 심형과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옥면, 그대도 나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테니 잠시 쉬시오.”

    우마왕이 아내와 장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질문 없이 방을 나갔다.

    “심형, 앉으시게.”

    우마왕이 일어나 앉으며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심협은 사양 않고 자리에 앉았다.

    “심형, 이 불광사리는 더없이 진귀한 것인데, 자네는 어디서 구해왔는가?”

    우마왕이 심협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단약은 진귀해서 감히 제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내력은 우형께서도 이미 짐작하셨을 듯합니다만.”

    심협이 엷게 웃으며 답하자 우마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형, 선가와 불가의 사람들은 당시 우형과 원한이 좀 있긴 했지만, 지금은 천정은 멸망했고, 영산도 파괴되었습니다. 이전의 원한은 세월과 함께 묻어두시지요. 지금 삼계에는 마족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고, 우리 남은 자들은 동족을 보호해야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지울 수는 없는 법. 손을 잡고 마족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살 길입니다.”

    심협은 우마왕의 마음이 한결 돌아선 것을 느끼고는 설득에 나섰다.

    “심형이 수고를 마다않고 홍해아와 옥면을 구해온 데다 오늘 나의 목숨까지 구해주었지 않나. 이 노우도 그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좋아, 내 자네의 요청에 응하도록 하지. 함께 마족에 맞서세!”

    우마왕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우형은 대의명분을 아십니다. 심모 삼계의 중생들을 대신하여 감사드리겠습니다.”

    심협이 크게 기뻐하며 포권을 했다.

    “이리 된 이상, 심형도 자네 뒤에 있는 그 사람들을 소개해주게나.”

    우마왕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한데 다른 사람들은 삼계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저는 그들과 늘 천책으로 연락합니다. 우형의 수중에도 천책이 있으니, 제가 천책 잔경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심협도 사양하지 않고 자신의 천책을 꺼내 방법을 전수했다.

    우마왕은 자신의 천책을 꺼내 심협이 말한 방법을 따라 했고, 이내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우마왕은 어느 금빛 공간에 들어섰다. 곳곳에 금빛 안개가 넘실거렸고, 끝없이 거대한 금빛 안개 장벽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바로 천책 잔경이었다.

    그때, 우마왕에게서 몇 장 떨어진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하더니 심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천책의 잔경이라 합니다. 저와 다른 천책 잔권의 소유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소통하지요. 그들은 삼계 각지에 있지만 어디에 있든 이곳에 들어와 교류할 수 있고, 심지어 물건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심협이 설명했다.

    “물건까지 교환할 수 있다고?”

    우마왕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그 짧은 시간에 어디 가서 불광사리를 찾았겠습니까?”

    심협이 웃으며 답했다.

    “천책은 역시 천정의 귀중한 보물답군그래. 잔편임에도 그런 신통력을 지녔으니 말이야.”

    우마왕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감탄했다.

    “우형께서는 천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으신 듯한데, 처음 이 천책 잔편을 준 이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습니까?”

    심협은 슬쩍 떠보듯 물었으나, 우마왕은 그를 슬쩍 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 이 아우가 말이 많았군요. 다른 사람들을 불러보겠습니다.”

    심협은 웃으며 말을 돌렸고, 다른 사람들을 소환했다.

    잠시 후, 천책 잔경 속에 금빛 그림자가 반짝거리더니 원 도인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여러분께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분이 바로 천책 잔권의 다섯 번째 소유자, 평천대성 귀하이십니다.”

    심협이 입을 열었다.

    “허허, 평천대성, 말씀 많이 들었소.”

    원 도인이 제일 처음 입을 열었다.

    화 도인과 뇌 도인도 포권하며 예를 갖추고는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소. 이 노우, 만나 뵙게 되어 반갑다는 말 따윈 하지 않겠소. 나는 여러분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어디를 의지하며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르오. 노우가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은 온전히 심 도우의 체면을 보아 그런 것이오. 이 자리에 계신 세 분과 나는 생면부지인 관계이니, 협력을 하려거든 세 분은 적어도 먼저 자기 신분을 밝히지요.”

    우마왕은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원 도인 등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심협은 우마왕의 영민함에 내심 감탄했다. 자신은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쩌다 보니 그대로 합류했지만, 당시 저 세 사람도 자신의 신분과 내력을 몰랐으니 피장파장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리 된 것, 자신도 이 기회에 세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보기로 했다.

    “평천대성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힘을 합쳐 마족에게 대항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오. 우리가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것은 서로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도 커진다오. 만에 하나 우리 중 누군가 마족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신분도 노출될 거요. 원모는 그게 결코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평천대성은 어찌 생각하시오?”

    원 도인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허, 그럼 여러분은 내 신분을 이미 아는데, 이 일은 어찌 처리해야 하오?”

    우마왕은 차갑게 웃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그 일에 있어 평천대성이 손해를 좀 보긴 했지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세 사람은 신원을 밝히기 어렵지만,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평천대성에게 설명하고, 대성에게 사과할 겸 첫 대면 선물을 주는 거요. 어찌 생각하시오?”

    원 도인은 화 도인, 뇌 도인과 소리 없이 소통한 뒤 말했다.

    우마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심 도우의 얼굴을 봐서 그리 합시다.”

    “양해해주어 감사하오. 그럼 이 원모부터 시작하지. 원모는 지선(地仙)으로, 인간계 곳곳에 남아 있는 수선문파들과 교류가 많소. 인간 세상 수련계의 자원도 적잖이 확보하고 있지요. 평천대성이 이 원모를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말씀 하시오.”

    원 도인은 우마왕 역시 한 발 양보하자 기뻐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한편, 심협은 그 말에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서들에서 지선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지선이란 선도(仙道)를 다 이룬 뒤 인간 세상에 동천복지(洞天福地)를 가진 선인이다. 이런 선인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막강했고, 휘하에는 제자들이 많으며, 천정의 관할을 받지 않아 아무런 구속 없이 유유자적했다. 방촌산의 보리조사도 득도한 지선인 것이다.

    “원 도우께서는 득도한 지선이셨구려. 인사드리오.”

    인간계의 지선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세상일에 무관심하여 고요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성정들이어서, 우마왕 같은 요왕(妖王)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생각이 좀 깨어 있는 지선들은 서로 제법 친분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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