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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90화 (490/1,214)
  • 490화. 정체

    청망은 옥병을 건네받은 뒤 두말 않고 즉시 법결을 맺어 옥병에 한 가닥 혼력(魂力)을 불어넣고 나서야 물었다.

    “공주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이때 군중이 빠른 속도로 갈라서더니, 소옥이 여전히 겁에 질린 여인을 이끌고 다가왔다.

    청망은 손을 들어 이상한 모양의 검은 부적 한 장을 꺼내 특수한 결인을 맺고는 여인의 미간에 갖다 붙였다. 이어서 그는 여인의 이마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붙잡더니, 뽑지 않은 상태로 유리 옥병 주둥이에 끌어다 넣었다.

    그 머리카락이 들어가자 병 속에 있던 어린 여우는 익숙한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놀랍게도 곧장 머리카락을 타고 기어올라 금세 병 주둥이로 뛰어오르더니, 단숨에 여인의 이마로 향했다.

    이어 여인의 미간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이마에 붙은 검은색 부적이 저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부적이 다 타고 나자, 여인은 굳게 감긴 두 눈을 파르르 떨더니 번쩍 떴다.

    만세호왕은 당장 다가가려 했지만, 청망이 가로막았다.

    “혼백이 이제 막 돌아가 현재는 백지 상태에 가깝습니다. 일단은 말을 걸지 마시고 그녀 스스로 천천히 회복하게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여인은 시선을 살짝 돌려 만세호왕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꼼꼼히 뜯어보더니 갑자기 외쳤다.

    “부왕!”

    이 짧은 외침에 만세호왕의 눈시울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이어 여인의 시선은 우마왕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에는 순간 변화가 일었으나, 그녀는 막 입을 떼자마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지면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우마왕은 황급히 그녀 뒤로 달려가 그녀를 덥석 품에 안았다. 서두르느라 명치께의 상처를 부딪치고 말았으나, 그런 고통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공주께는 별 지장이 없사오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혼백이 채워지고 두 분을 뵙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회복되면서, 일순 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혼절하신 것뿐이옵니다. 며칠 푹 쉬시면 회복되실 것이옵니다.”

    그녀의 상태를 살펴본 청망의 설명에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세호왕은 정신을 차리고는 곧장 심협을 향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 절을 했다.

    “심 도우, 이번 은혜는 갚을 길이 없으니,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옥호 일족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돕겠네.”

    “선배님,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심협은 재빨리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심 도우, 전에 자네에게 약조했던 일은 내 반드시 지킬 것이네. 앞으로는 마족을 토벌하는 대군에 합류하여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마족에게 대항할 것이야!”

    우마왕이 옥면공주를 안아 든 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현재 부상은……?’

    심협은 그의 미간 부분에 감도는 실오라기 같은 검은 기운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전음으로 물었다.

    ‘마혈의 독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네. 홍해아의 삼매진화도 독이 퍼지는 걸 막을 수 없어. 지금 이미 법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네.’

    우마왕은 숨김없이 알려주었다.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심협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대한 빨리 폐관하여 나 자신의 공법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네. 증상에 맞는 영약이 없다면 독이 온몸에 침투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겠지.’

    우마왕은 말끝에 조금 미련이 남는 듯 품속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심협은 이런 상황에서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호왕 선배님, 심모는 밀실을 빌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합니다.”

    그는 돌아서서 만세호왕에게 말했고, 호왕은 두말없이 당장 그를 직접 자신의 폐관 밀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호족이 비밀리에 간직했던 고급 요상 단약들까지 남겨둔 뒤에야 떠나갔다.

    사실 부상은 이미 거의 다 회복되었지만, 그가 밀실을 빌린 이유는 그 마족 여인의 정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원 도인 쪽에 연락해서 그간의 일들을 알리고 보자. 그들이라면 그 여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신념(神念)을 천책 속으로 집어넣었다. 전에 거둬들인 검은 마염이 커다란 검은 불덩이를 이루어 금빛 공간 속에 떠 있었다. 당장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으나, 천책에 얌전히 속박되어 있으니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다시 신념을 다시 움직이자 그는 천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금빛 대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심협이 소환술을 펼치자, 잠시 뒤 세 도인이 잇달아 나타났다.

    “심 도우,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상황은 어떠한가?”

    원 도인은 사람이 모두 모이자 즉시 물었다.

    화 도인과 뇌 도인도 궁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우선 홍해아를 구출하여 적뢰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적뢰산에 많은 일이 일어났던 데다가 상황이 위급하여 여러분과 제때 소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협이 해명했다.

    “홍해아를 구해냈다니, 심 도우는 역시 대단하구먼. 한데 적뢰산 쪽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원 도인은 짧은 찬사에 이어 의아한 듯 물었다.

    심협은 적뢰산 쪽의 사정에 이어 그 마족 여인에 대해 설명했다.

    “이거 부끄럽소이다. 마족이 한 발 앞서 옥면공주를 찾아낼 줄이야. 심 도우가 그녀를 구출하였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화 도인이 조금 송구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삼계에서는 마족의 세력이 가장 거대하니 화 도우는 자책할 것 없네. 우마왕은 어떠한가?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 하던가?”

    원 도인은 항상 그랬듯 사람 좋은 모습으로 화 도인을 위로한 뒤 심협에게 물었다.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마왕이 마혈의 독에 중독된 탓에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찾은 이유도 이곳의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우마왕이 중독된 마독(魔毒)을 풀 방법이 있는지 가르침을 청하기 위함입니다.”

    심협이 잠깐 공수하며 말했다.

    “마혈의 독?”

    원 도인은 일단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화 도인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심협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내심 실망했다.

    한데 그때, 뇌 도인이 노란 호리병 하나를 꺼내 전송해왔다.

    “내게 불심천보단(佛心天寶丹)이 하나 있는데, 가져가서 시험해보아도 좋네.”

    “불심천보단! 서천 대뢰음사(大雷音寺)에서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는 단약 아닌가! 온갖 음(陰)과 마(魔) 속성 맹독을 해독하는 데 이보다 뛰어난 단약도 없지! 허나 그 단약의 주재료인 천보금련(天寶金蓮)이 대겁 이전에 이미 멸종했는데, 그전에 만든 불심보천단 중 하나가 뇌 도우 수중에 있었단 말인가?”

    원 도인이 놀라운 듯 물었다.

    “저 역시 우연히 얻었습니다.”

    뇌 도인은 단약의 내력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감사합니다, 뇌 도우.”

    심협은 그토록 귀한 단약이라는 말에 얼굴이 환해져 얼른 챙기고는 감사를 표했다.

    “그 마족 여인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자신을 청령현녀라고 칭했는데, 다른 이들은 그녀를 존자님이라고 하더군요. 여러분께서는 그녀의 내력을 아시는지요?”

    그는 곧 계속해서 물었다.

    “청령현녀라……. 치우 휘하의 십이존자는 십이지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네. 심 도우의 말을 들어보니 그 여인은 분명 진룡존자(辰龍尊者)겠구먼.”

    원 도인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진룡존자요? 그렇다면 그녀는 용족에서 변화된 마족인 겁니까?”

    그 여인의 신통력을 돌이켜보니 확실히 용과 관련 있을 듯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원 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의 내력은 내가 알고 있소. 일찍이 화모는 그 진룡존자와 접촉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인간과 용의 혼혈로, 본명은 마씨요. 듣기로는 대당 출신이라더군. 어떤 연유로 마족에 의탁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소.”

    화 도인의 설명에 순간 심협의 낯빛이 변했다.

    “인간과 용의 혼혈, 마씨 성, 대당 출신!”

    심협처럼 명민한 자가 이런 정보들을 앞에 놓고도 그 여인의 내력을 추론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마수수! 어쩐지 마 주인장이 그녀와 함께 있다 했지. 나와 싸울 때에도 검은 기운으로 몸을 숨겼고, 가면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어.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장안성에 있다는 환생한 마혼인가?’

    심협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낯빛이 어두워졌다.

    다행히도 금빛 안개 덕에 다른 사람들은 지금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진룡존자는 실력이 매우 고강한데, 그대가 그녀 손에서 옥면공주의 일혼일백을 빼앗아 갔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오. 최대한 빨리 불심천보단으로 우마왕을 치료하시오. 적뢰산에서는 오직 우마왕만이 그녀를 막을 수 있소.”

    화 도인이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심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마왕이 천책 잔편 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다른 세 사람을 한번 쳐다보더니 느릿느릿 힘주어 말했다.

    이 말에 화 도인과 뇌 도인은 움찔 떨었다. 비록 두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몹시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허허, 과연 그랬구먼.”

    그러나 원 도인은 도리어 평온하게 웃었다.

    “원 도우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은 했지. 앞서 심 도우를 적뢰산으로 보내 우마왕과 접촉하게 한 것도 그를 연맹에 끌어들이는 한편 그 일을 조사하고 싶어서였다네. 과연 내 예상대로였어.”

    원 도인의 느긋한 말에 심협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기도 하고, 나도 그다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심 도우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던 것뿐이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주게나.”

    원 도인은 심협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심협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이렇게 다섯 권의 천책 잔편이 모두 모이게 되었군. 심 도우는 우마왕이 연맹에 들어오도록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천책 조각의 행방까지 밝혀냈으니 큰 공을 세웠다 할 수 있지. 나는 심 도우에게 포상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화 도우와 뇌 도우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원 도인의 물음에 두 도인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의 호의는 우선은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심모는 아직 우마왕을 진정으로 설득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완전히 일단락된 뒤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심협은 두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현재 수련이 순조로운 편이었기에 급히 필요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니 다시 얻기 어려운 이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려면 좀 더 기다려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좋고. 우리 셋은 심 도우에게 신세를 졌으니, 심 도우는 언제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네.”

    원 도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이미 끝이 났으니, 전에 빌려갔던 보물들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심협은 원 도인의 말에 내심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고 손을 뒤집어 노란색 비단 손수건과 치염단주, 현빙면구를 꺼내 각각 주인들게 돌려주었다.

    두 사람도 사양하지 않고 그것들을 거둬들였다.

    사람들은 뒤이어 우마왕을 끌어들이기 위한 세부사항을 논의한 후 회의를 마쳤고, 심협은 다시 천책 밖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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