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청령현녀(靑靈玄女)
반 시진 정도 비행하여 흑랑산 경계를 벗어난 지 오래지 않아, 저 앞에 가로놓인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산세가 마치 지네가 둥지를 틀고 앉은 듯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심협은 그 산맥을 알고 있었다. 유연(*蚰蜒: 지네라는 뜻) 산맥으로, 최고봉은 목정산(目釘山)이라는, 천 장에 이르는 외딴 봉우리였다.
산봉우리를 넘어갈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흑굴은 도리어 뱃머리를 숙이더니 최고봉을 향해 내려갔다.
‘설마 이곳이 흑몽산인가? 마족들이 산의 이름을 바꾼 것인가?’
심협은 의아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숲에 착륙하자마자 한 무리의 요괴병사들이 달려들었다가 두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즉시 예를 갖췄다.
심협이 목에 힘을 뻣뻣하게 주고 산 입구를 향해 걷자 흑굴이 재빨리 뒤따랐다.
이제 막 두어 걸음을 뗐을까. 심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흑굴을 돌아보며 물었다.
“존자님을 뵈러 갈 것인데, 너도 따라가려느냐?”
흑굴은 떨떠름한 마음에 ‘네가 따라오라며?’ 하고 속으로 툴툴거렸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대왕께서는 속하가……?”
“산 아래에서 기다리거라. 존자님을 뵌 뒤에 네게 따로 시킬 일이 있다.”
심협이 무심하게 말했다.
“예!”
흑굴은 즉시 답했으나,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흑골대왕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다시 산을 올랐고, 흑굴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산길을 백 보 정도 걷자, 길가에 초소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요괴 병사 일고여덟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심협을 보자 벌떡 일어나 예를 갖췄다.
심협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아가다가 사람 없는 외진 곳에 이르러서야 다시 노란색 비단 손수건을 꺼내 몸을 덮었다. 그런 뒤 땅속으로 숨어들어 곧장 산속으로 향했다.
산중턱에 이르자 심협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는데, 온몸은 노란 빛에 뒤덮여 있었다. 그가 손목을 빙글 돌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하얀 유등(油燈)이 나타났다. 그 속에는 무엇인지 모를 하얀 기름이 담겨 있어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심협은 손끝으로 심지를 비벼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유등에 불꽃이 반짝이더니 그윽한 녹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등불을 유심히 보니, 산중턱에는 바람이 없었음에도 이 불꽃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미세하게 치우쳤다. 이를 본 심협은 그 방향을 향해 토둔술로 이동했다.
산허리를 백여 장쯤 가로지르자 갑자기 앞이 텅 비더니 심협의 머리가 암벽을 뚫고 나왔다. 눈앞에는 꽤나 넓은 공간이 펼쳐졌는데, 그 안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또한 그 한가운데에는 놀랍게도 10여 개의 크고 작은 피 웅덩이들이 있었다. 그 규모와 모양새는 이전에 흑랑산에서 본 것과 거의 같았다. 사방에 검붉은 기둥들이 서 있었고, 그 위로 갖가지 부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기둥들은 아직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빛을 발하지 않았다.
심협이 다시 피 웅덩이 가운데를 보니, 그곳에 거대한 자흑색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돌덩이는 온몸에서 반짝이는 자줏빛을 내뿜었지만, 그 위에는 전에 보았던 자줏빛 공도, 그 속에 있던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법진이 아직 작동되지 않은 것을 보니 이제 막 옮겨온 게로군.’
심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주위에 지키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심협은 돌 벽을 뚫고 나와 곧바로 기운을 가리고 땅 위에 내려섰다.
한데 막 착지한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등잔이 살짝 흔들리면서 안에 있던 콩알 같은 등불이 몇 번 흔들리더니, 갑자기 어느 방향으로 홱 꺾였다.
심협은 안력(眼力)을 돋우어 그쪽을 돌아보았다. 피 웅덩이 맞은편 산벽에 칠흑 같은 문동(門洞) 입구가 보였다. 그는 곧바로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문 안에 들어선 뒤 산 속의 통로를 따라 백여 보를 걸으니 그리 크지 않은, 네모반듯한 석실이 나타났다. 안쪽 네 벽에는 형석이 박혀 있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가 막 입구에 도착하자 손에 들고 있던 등잔에서 불꽃이 갑자기 번득이며 곧장 실내를 향해 꺾였다.
심협이 이를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석실 안쪽 벽과 가까운 곳에 기다란 돌 탁자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유리 옥병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서는 안개가 피어올라 어린 여우 그림자가 병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였다.
‘역시 이곳이었어.’
심협은 내심 기뻐하며 곧 신식을 풀어 석실 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심협은 석실 안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서 탁자 옆에 이르렀다.
병 속의 어린 여우는 비실비실한 표정으로, 몹시 피곤해 보였다.
‘혼백은 본래 허무이니, 오랜 시간 본체를 떠나면 점차 쇠약해져 천지간에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옥면공주의 일혼일백은 몸을 떠난 뒤 또 누군가에게 법술로 조종당했으니, 분명 원기를 더 많이 소모했을 터였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본체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정말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심협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칠보영롱등을 끄고는 손을 들어 유리 옥병을 소매에 챙겨 넣었다.
“도우, 설마 묻지도 않고 함부로 가져가는 것은 도둑질임을 모르는 거요?”
그때, 석실 입구 쪽에서 문득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지?’
심협은 그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했다. 그의 신식으로는 상대가 언제 다가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것이다.
“오, 강제로 남의 혼백을 가둬두는 것이 도둑질보다 더 나쁜 일임을 모르는 게요?”
심협은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고는 차게 웃으며 상대의 말을 인용해 대꾸했다.
그는 몸을 돌린 후에야 입구에 서 있는 이가 가녀리고 아리따운 몸매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금실로 된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거의 온몸을 감싸 사람을 홀릴 듯한 곡선을 그려냈다. 그 밖으로는 눈처럼 새하얗고 긴 목덜미와 두 섬섬옥수만이 드러나 있었다.
또한, 얼굴에 쓴 금소고 가면은 악귀처럼 날카로운 이가 뾰족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녀의 완벽한 자태와 어우러져 정말 나찰녀(羅刹女)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가면 바깥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몹시 파리했다.
심협은 저 가면이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신식을 완전히 차단해 그녀의 진짜 얼굴을 꿰뚫어볼 수 없게 했다. 앞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도 저 물건 때문일 터였다.
“나 청령현녀는 원래부터 사악한 마귀이니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소? 도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이상, 떠날 필요도 없소. 때마침 이곳 혈지에 당신처럼 혈기왕성한 원료가 부족했거든.”
여인은 조소하듯 말했다.
“미안하오만, 나는 당신과 싸우러 여기 온 것이 아니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우리 그때 겨뤄봅시다. 하하하!”
심협은 밝게 웃고는 포권하며 답했다. 그리고는 곧장 손을 들어 노란색 비단 손수건을 덮은 뒤 몸을 휙 움츠려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자신을 청령현녀라 칭한 가면 여인이 발을 쾅하고 구르며 호통을 쳤다.
“내 너에게 가라고 한 적 없다!”
그러자 거센 폭풍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심협이 시전하던 법술을 끊어버렸다.
심협은 이 힘에 몸이 뒤집히며 그대로 뒤쪽 벽에 가서 세게 부딪쳤다.
‘그녀다!’
심협은 상대의 기운을 느낀 순간 확신했다. 눈앞의 이 여인은 바로 예전 그 피 웅덩이 법진 한가운데에서 자줏빛 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벽을 짚고 발로 벽을 세게 디디며 몸을 거꾸로 돌린 뒤, 청령현녀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의 몸속에서 황정경 공법이 엄청난 속도로 운행되면서 뒤에 금빛 코끼리와 금빛 용의 허상이 나타나더니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도 여유롭게 한손을 뒷짐 진 채 그저 한걸음 슬쩍 물러난 뒤, 손을 짐승의 발처럼 구부려 휘둘렀다.
파팡!
허공에서 마치 용의 울부짖음 같은 파공음이 울리며 커다란 검은 용의 발이 떠올라 심협의 주먹과 맞부딪쳤다.
쾅!
쟁쟁한 굉음이 울렸다.
두 사람의 주먹과 발이 맞부딪치는 곳에서 강력하기 그지없는 충격파가 뻗어 나가 사방으로 휘몰아쳤고, 주위의 산벽이 쩍쩍 갈라지면서 무수히 많은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나타났다.
심협은 더없이 강렬한 힘이 돌진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 기운은 심협의 뒤에 있던 금빛 용과 코끼리까지 한꺼번에 찢어발겼고, 그의 몸뚱이까지 단번에 날려버렸다.
‘같은 태을의 경지인데, 이 여인의 실력은 흑골대왕보다도 훨씬 강하구나!’
심협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그 힘을 이용해 갈라져 있던 돌 벽을 향해 창처럼 내리꽂혔다. 비단 손수건의 능력을 발휘하여 토둔술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허나 청령현녀는 그의 의중을 간파한 듯, 그가 돌 벽에 닿기도 전에 거대한 용의 발로 머리 위를 덮고는 그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으드득!
청령현녀가 힘껏 손을 움켜쥐자 검은 용의 발이 동시에 조여들면서 그대로 심협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윽고 청령현녀는 다소 놀란 듯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손을 더 꽉 움켜쥐려 해도 보이지 않는 힘이 손바닥 한가운데를 받치고 있어서 아예 오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보니, 검은 용의 발 한복판에 크고 노란색의 둥근 공이 박혀 있어 아무리 힘을 줘도 깨부술 수가 없었다.
심협은 팔짱을 낀 채 공 한가운데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법보는 설마……?”
청령현녀는 눈빛이 살짝 굳어졌고, 심지어 주저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손을 들어 용의 발을 거둬들이고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마주대고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이걸 한번 막아보시지!”
청령현녀는 가볍게 외치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한 떨기 화염이 그녀의 손가락에서 날아가면서 화르륵 하고 맹렬한 검은 불꽃이 되어 세차게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노란 광구(光球)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검은 화염이 아무리 이글거리며 불타올라도 노란 광구는 미동조차 없었다.
노란 광구는 원 도인이 전수해준 비법에 따라 심협이 노란색 비단 손수건의 능력을 응집해낸 것으로, 일종의 방어 신통력인 것만 알뿐 위력이 도대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심협은 이 물건이 육진편에 뒤지지 않는 보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을,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육진편보다 뛰어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도우, 당신이 그 법보를 가졌을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기연이 있었나 보오.”
검은 화염으로 심협을 묶어 놓은 뒤, 청령현녀는 공격을 멈추고는 조롱하듯 말했다.
심협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그녀를 다시 보니 낯익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청령현녀 같은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녀와 대응되는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길에서 주운 것이라 어떤 보물인지 아직 모르겠는데, 도우가 좀 설명해주겠소?”
심협이 웃으며 대꾸했다.
청령현녀는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기에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데 그때, 심협은 갑자기 표정이 급변하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단전이 있는 곳을 움켜쥐었다.
“이제야 알아차렸군. 아까 당신을 보았을 때 몸속에 마기가 남아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 홍해아의 몸에서 옮겨온 것이겠지. 이 마염은 당신을 불사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 몸속의 마기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소.”
청령현녀가 차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