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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87화 (487/1,214)

487화. 훈계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심협의 그림자가 어느 밀림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흑랑산에서 겨우 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땅에 내려선 그가 손목을 돌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빛이 번쩍이더니 어슴푸레한 빛이 감도는 노란 손수건이 떠올랐다.

심협은 원 도인이 전수해준 법문에 따라 비단 손수건의 힘을 불러일으켰다. 손수건이 빛을 번쩍이며 백배로 불어나더니 그의 몸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노란 빛에 덮여 있어 흙과 돌 따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나아갔다. 그가 속으로 ‘질(疾: 빠르다)’ 자를 떠올리자 갑자기 속도가 치솟았다. 날아가는 것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속도로, 그는 빠르게 땅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백 번을 호흡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은 땅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지면에 갈라진 거대한 균열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십여 장을 떨어져 내려간 그는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진 어느 돌계단 위에 내려섰다.

심협은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에 문득 위쪽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는 즉시 비단 손수건을 발동시키며 다시 돌계단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와 동시에 정해주의 힘을 발휘해 기운의 파동을 전부 덮어 숨기고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하고 어지러운 발소리가 땅 위에서 들려오더니 이내 두 요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 내려왔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이번에 흑골대왕(黑骨大王)이 밖에 나갔는데, 듣자 하니 국물도 못 건지고 우마왕한테 얻어맞아 몸이 반 토막 났다더군. 쯧쯧, 이게 뛰는 토끼 잡으려다가 잡아둔 토끼까지 놓친 꼴이 아니고 뭐겠는가?”

요물 하나가 조금 고소하다는 투로 말했다.

“감히 뒤에서 흑골대왕을 씹다니, 자네는 정말 죽는 게 두렵지도 않나? 그가 자네 뼈를 부러뜨릴까 무섭지도 않아?”

다른 요물이 신중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무섭긴 무슨……. 자네가 나를 고발할 것도 아니잖나. 어차피 흑골대왕은 흑랑산에 있지도 않고 말이야. 어쩌면 지금쯤 존자님께 혼쭐이 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흐흐흐.”

앞의 요물은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지. 그네들은 전부 옮겨갔는데 하필 우리 둘을 남겨 놓다니. 몸이 고생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저 흑굴(黑窟) 놈에게 구박을 받아야 하니 우리 신세가…… 어휴!”

다른 요물이 탄식하며 맞장구쳤다.

‘옮겨갔다고?’

심협은 그 말을 듣고는 의심이 들었다.

“흑골대왕은 줄곧 우리 요족에게 모질게 대했지만, 그 수하인 흑굴만큼 지독하지는 않았지. 우리 중에 경지가 조금 높은 몇몇이야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다지만, 자네나 나 같은 졸병들은 그네들 발치에 있는 버러지 아니겠나?”

“그래, 자네 말도 맞아. 우리가 마족에게 의탁한 것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데 지금도 오늘내일하면서 언제 끌려가 칼받이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칫 저 마족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걱정해야 하니……. 차라리 다른 큰 요괴에게 돌아가 의탁하는 것이 낫겠어.”

다른 요물이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는 어렵지. 그 큰 요괴들도 하나같이 항복하거나 숨어서 나올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데, 누구에게 간단 말인가? 조만간 모두 마족이 차지할 걸세. 우마왕 같은 요왕(妖王)조차 나서려 하지 않는데, 또 누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겠어?”

앞의 요괴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요마는 잠시 말이 없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제천대성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두 작은 요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들으며, 심협은 돌계단 위로 천천히 솟아나와 그들을 따라서 안쪽으로 향했다.

돌계단은 곧장 아래로 구불구불 뻗어 있었고, 사방에는 제법 먼 간격으로 빛이 띄엄띄엄 빛나고 있었다.

두 작은 요괴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나누는 대화를 어렴풋이 들으며 칠보영롱등을 꺼내서 살펴볼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문득 앞에서 노기를 띤 호통이 들려왔다.

“눈도 못 뜬 두 짐승들 같으니라고! 죽고 싶은 게냐?”

뒤이어 조금 전의 두 요괴가 끊임없이 낮은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술 좀 가져오라 했더니만 꾸물꾸물 늑장을 부려? 죽고 싶으냐!”

다시 한번 호통이 울려 퍼졌다.

심협이 조심스레 따라가 보니, 돌계단 끝자락에 널찍한 지하 대청이 보였다. 대청 사방에 모닥불이 타고 있어 아주 훤히 보였다.

대청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칠흑처럼 검고, 악귀 같은 얼굴을 한 마족 사내가 서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앞에 꿇어앉은 두 작은 요괴를 꾸짖고 있었다.

두 요괴 중 하나는 머리에 구부러진 뿔이 나 있고 아래턱에는 수염이 난 산양 요괴였고, 다른 하나는 얼굴에 나뭇결이 있고 피부가 회갈색으로, 마치 나무가 요괴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흑굴 대인,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일부러 꾸물댄 것이 아니라 대인의 술병을 깨지 않으려 조심하느라 빨리 걸을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노여워 마시고 용서해주십시오.”

두 요괴 모두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는 것으로 보아 상대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마족 사내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바닥 한가운데에 검은 안개를 응집하여 산양 요괴를 향해 뻗었다.

이에 산양 요괴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흑굴 대인, 살려주십시오!”

“뭘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나의 마기를 흡수하면 마화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앞으로 이런 허드렛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되겠지.”

흑굴이라는 마족 사내가 피식 웃으며 다소 깔보는 투로 말했다.

“흑굴 대인, 누구나 마화될 수는 없다는 건 저 같은 놈도 알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마기가 순수하지 않거나 몸과 혼백이 너무 약하면 마화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곧 목숨을 잃게 되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산양 요괴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말이 흑굴을 완전히 격노하게 만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네 말은 내 마기가 충분히 순수하지 않다, 이 뜻이렷다?”

흑굴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소인은 제 몸과 혼백이 허약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대인, 저는…….”

산양 요괴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부랴부랴 해명하려 했다. 옆에 있던 나무 요괴는 몸을 낮춘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쉬지 않고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감히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산양 요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굴은 이미 그 목소리에 짜증이 난 듯 손안의 마기를 흩어버리고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요괴의 머리를 철썩 내리치려는 듯했다.

한데 그때, 근엄한 고함이 들려왔다.

“멈춰라!”

그 목소리에 일순 멍해진 흑굴이 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에 그는 낯빛이 변하여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대왕!”

흑굴은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아첨하는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앞에는 검은 해골이 서 있었는데, 몸의 뼈에는 금이 잔뜩 가 있었고, 기운은 더없이 불안정해 보였다. 놀랍게도 앞서 적뢰산을 습격했던 마족의 우두머리인 흑골대왕이었다.

“지금쯤이면 흑몽산(黑蒙山)에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흑굴은 상대가 아무 말이 없자 약간 의문이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이 흑골대왕은 물론 심협이 본명호모를 이용해 둔갑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접촉하면서 그는 검은 해골의 기운과 용모에 익숙해졌기에 둔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네가 정해줄 참이더냐? 온종일 일은 하지 않고 이런 졸개들이나 상대하고 있다니, 네가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

심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대왕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모두 속하의 잘못이옵니다.”

흑굴은 곧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인정했다.

두 작은 요괴들은 흑골의 목소리를 듣고 아예 꼼짝도 못할 정도로 겁을 집어 먹었다. 사고가 멈춰버린 듯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희 두 놈은 썩 꺼지지 않고 무엇 하느냐? 계속 거치적거릴 참이냐?”

심협이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두 작은 요괴는 그 말에 마치 사형에서 사면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허리를 몇 번이나 조아리고는 거의 굴러가듯 돌계단 쪽으로 내달렸다.

심협은 속으로 몰래 탄식하고는 흑굴에게 말했다.

“아직도 일이 아직 다 처리되지 않은 게냐?”

흑굴은 그 말에 간담이 서늘해져 머뭇거리며 답했다.

“대왕, 그 피 웅덩이들은 이곳에 지어진 지 오래되어 치우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요 며칠 동안 속하는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하였사옵니다만, 일을 마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옵니다.”

흑굴의 말에 심협은 눈 속의 귀린을 희미하게 반짝였다.

‘이 요마들이 옮겨간 지 며칠 안 된 모양이군?’

두 작은 요괴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옮겨간 곳은 흑몽산이라는 곳이었으나, 심협은 한참을 생각해봐도 그곳이 어디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흠, 흠! 됐다. 이곳의 일은 아랫것들에게 맡기면 되니, 너는 일단 나를 따라 흑몽산으로 돌아간다.”

심협은 가볍게 두 번 헛기침을 하고는 그렇게 분부했다.

“흑몽산으로 돌아간다고요? 당치 않사옵니다, 대왕. 존자님 일행이 철수하실 때, 이곳의 피 웅덩이 흔적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에는 따나지 말라고 분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는 존자님의 부하냐, 아니면 내 부하냐?”

심협은 눈에서 귀린을 번득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흑굴은 그의 이런 모습에 익숙했다. 흑골대왕이 화를 낼 때면 십중팔구 이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 당연히 대왕의 부하지요! 대왕께서 돌아가라 하셨으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테지요. 속하 당연히 대왕을 따라 돌아갈 것입니다. 한데 그럼 존자님 쪽에는……?”

흑굴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자 심협은 조금 누그러진 투로 덧붙였다.

“그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흑굴은 허리를 숙였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아래 가서 정리하거라. 우린 곧 출발해야 한다.”

심협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예.”

흑굴은 대답하고는 곧바로 대청 반대편 통로로 달려가 명령을 하달하고는 서둘러 돌아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앞뒤로 서서 돌계단을 따라 다시 땅 위로 돌아왔다. 가는 길에 심협은 전에 보았던 피 웅덩이를 지나쳤는데, 그 안은 이미 바짝 말라 있었다. 또한 여러 군데가 헐려 있었지만, 여전히 지하로 통하는 투명한 실들이 보였다.

이 피 웅덩이 아래쪽에는 지탱하는 법진이 있을 터였고,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곳은 아닐 터였다.

땅 위로 올라온 심협이 흑굴에게 말했다.

“나는 부상을 치료해야 하니 네가 어공 비행술을 펼치거라.”

“예!”

흑굴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즉시 답하고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몸 앞에 곧바로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몸체가 새카만 나무 비주(飛舟)가 나타났다.

“대왕, 오르시지요.”

흑굴이 허리를 숙이며 권했다.

심협은 몸을 날려 비주의 뒤편에 내려선 뒤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이를 본 흑굴은 재빨리 비주에 올라 한 손으로 법결을 맺고 법력을 운행하여 작동시켰다.

뭉게뭉게 마운(魔雲)이 피어올라 비주를 들어 올렸다. 삽시간에 만 장 높이에 이른 비주 위로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쏜살같이 빠르게 내달렸다.

심협은 내심 놀랐다. 흑굴은 겉보기에는 대승기 정점에 불과했지만, 이 비주의 속도는 진선만큼이나 빨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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