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진짜 목적
‘두 분 선배님, 마족은 간교하니 좀 더 지켜보고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심협은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전음으로 주의를 주었다.
이에 우마왕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청망에게 말했다.
“너의 귀안(鬼眼) 신통력으로 그녀에게 이상한 점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명을 받은 청망은 양손을 동시에 결인하여 자신의 두 눈 위를 덮었다. 그리고는 그런 독특한 자세로 그 여인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두 손을 풀고 입을 열었다.
“골상(骨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눈속임 따위의 법술도 없고, 뼈를 깎아낸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신혼은 조금 온전치 않은 듯합니다.”
“골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분명 옥아일 걸세. 저렇게 망연하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우리를 아예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데…… 신혼이 온전치 못한 탓이겠지.”
만세호왕이 애틋한 눈길로 말하자 우마왕의 얼굴에도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묻어났다.
“우마왕, 이제 우리 제대로 거래를 해볼 수 있지 않겠소?”
검은 해골이 그제야 끼어들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우리가 서로 돕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으나…… 나를 마족의 개로 만들려 한다면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네놈들이 옥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 반드시 수천수만 배로 되갚아주겠다!”
우마왕이 싸늘한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명성 자자한 우마왕이 감정에 솔직한 호걸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안심하시오. 그대가 귀순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반석처럼 굳건하니, 우리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 거요. 심지어 앞으로 취운산, 적뢰산과 찬두호산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며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조할 수도 있소.”
검은 해골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 치우고 요구 조건이나 말해라!”
“우리의 조건은 오직 하나, 지금 당장 그대 손에 있는 천책을 넘기는 것이오.”
검은 해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마왕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마왕에게 천책이 있다는 사실을 마족이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심협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 많은 악행을 저지르더니, 알고 보니 그 물건을 노린 것이었구나!”
우마왕이 차게 웃으며 말했다.
“우마왕의 그 말은 틀렸소. 나는 본래 그대를 합류시키라는 명을 받았소. 허나 그대의 태도가 단호하니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양보해 차선책으로 천책을 구하려는 거요.”
검은 해골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물건을 넘기기만 하면 네놈들은 옥아를 놓아주고 적뢰산 경계에서 물러날 것이냐?”
우마왕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심협은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소. 앞서 약조했듯이, 앞으로 마족의 모든 부대는 그대를 비롯한 그대 친족의 부족들과 평안히 지낼 것이고, 다시는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지도 않을 것이오.”
검은 해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 천책은 본디 옛 천정의 유물로, 나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니 너희들에게 주면 그뿐이다. 허나 앞으로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다면 우리 부족 전체를 동원하여 너희와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우마왕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검은 해골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마족은 교활하니 가벼이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심협이 우마왕에게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
“옥아가 저들의 손에 있는데 자네는 나에게 어쩌라는 것인가?”
우마왕이 그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호왕 선배님, 설득 좀 해보십시오.”
이번에는 만세호왕에게 말했으나, 그 역시 난처한 얼굴로 구름 끄트머리에 선 여인을 보고 있었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멈췄다.
심협은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뭐라 말해도 더는 소용이 없을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발아래 푸른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우마왕이 날아오르려 했다.
“우마왕께서는 오실 것 없이 천책만 보내면 되오.”
검은 해골이 그리 말하자 우마왕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은 멈춰 섰다.
“그렇다면 동시에 움직이도록 하지. 내가 천책을 보낼 테니, 너는 옥아를 돌려보내라. 어떠냐?”
“좋소. 그리 합시다.”
검은 해골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우마왕이 두 눈을 집중하며 손을 들어 휘두르자, 몸 앞에 금빛이 번쩍이며 금빛 서책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그 서책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힐끗 보더니 손을 휘둘러 쳐냈다.
천책은 허공에 둥둥 뜬 채 검은 해골을 향해 날아갔다.
바로 그때,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천책은 절대 마족의 손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그림자는 천책을 품으로 챙겨 넣고는 도망치려 했다.
“심 도우!”
노기 가득한 고함소리가 울리면서 아홉 개의 거대하고 새하얀 여우 꼬리가 사방에서 뻗어 나와 즉시 그의 진로를 막아섰다.
심협이 미처 둔술을 쓰기도 전에 커다랗고 시커먼 손이 허공에 뻗어 나와 그를 덥석 붙잡았다.
“난 자네가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번 일은 문제 삼지 않겠네.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되네.”
우마왕이 다가와 심협의 손에서 천책을 빼내고는 검은 해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검은 해골도 이를 보고 손을 들어 옥면공주의 환생인 여인을 구름 아래로 밀었다.
우마왕은 심협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곧장 몸을 날려 여인을 맞았다.
그러나 옥면공주가 우마왕에게 가까워지는 순간, 그녀의 단전 부분에서 갑자기 눈부신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아주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힘이 곧 폭발하려 했다.
“단전 자폭!”
심협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 과연 요마들이 계략을 쓴 것이었다. 옥면공주의 환생은 미약하기에 자폭한다 해도 우마왕에게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나,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우마왕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갑자기 속력을 내 거의 순간이동을 하듯 여인 앞에 이르렀고, 동시에 손을 뻗어 그녀의 아랫배를 누르며 부드러운 힘을 천천히 주입해 폭발하려던 힘을 억지로 억눌렀다.
“네놈들이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우마왕은 한 팔로 여인을 품에 끌어안으며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변이 발생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갑자기 잔인한 표정이 떠오르더니, 소매에서 몸체가 온통 새카만 비수가 불쑥 미끄러져 나와 우마왕의 명치를 향해 파고든 것이다.
“안 돼!”
만세호왕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우마왕의 명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여인의 얼굴에 가득 튀었다.
뜨거운 피가 얼굴에 닿자, 여인의 얼굴에서 잔인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풀었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기색만이 얼굴에 남았다.
“부왕!”
홍해아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여인은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겁에 질려서 외쳤다.
“괜찮소. 내가 그대에게 진 빚을 갚은 것뿐이오.”
우마왕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그때, 심협이 갑자기 소리 높여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갑자기 우마왕 뒤에서 검은 잔상이 불쑥 나타나 손에 검은 송곳을 쥐고는 등 한복판을 찔렀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우마왕은 호통을 치며 몸을 돌리지도 않고 뒤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체내 법력이 미친 듯이 솟구쳐 나오면서 팔뚝에는 마치 푸른 비갑(*臂甲: 팔뚝에 차는 갑옷)을 입은 것처럼 눈부시게 푸른 빛이 휘감겼고, 그가 팔을 휘두르는 순간, 푸른 빛이 찬란하게 피어오르며 눈부신 섬광이 폭발했다.
쾅!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사나운 충격파가 순식간에 높은 하늘에서부터 사방을 휩쓸었다. 허공의 구름들이 요동치고 잔물결 같은 아지랑이가 일었고, 검은 해골은 이 웅대한 힘에 그대로 만 장이나 날아가 요마 대군에 처박혔다. 그와 충돌한 수백수천의 요괴 병사들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허공에 휘몰아친 폭풍은 요괴 병사들을 실은 검은 구름을 그대로 찢어버렸고, 요마 대군은 메뚜기 떼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만여 장 밖 허공에는 검은 해골이 처참한 모습으로 허공에 서 있었다. 그의 한쪽 팔은 이미 완전히 터져버렸고, 앞가슴의 갈비뼈도 3할 이상 부러졌으며, 특히 등뼈 위로는 거의 관통될 정도의 균열이 생겨났다. 이는 법력으로 고치더라도 결국은 완전히 아물게 할 수가 없는 부상이었다.
“대력우마왕,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래도 다행히 천책을 얻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검은 해골은 하나만 남은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금빛 서책을 꽉 쥐며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책을 내려다본 그의 눈구멍 속에서는 두 귀린(鬼燐)이 격하게 떨렸다. 이 떨림은 이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금빛 찬란했던 서책은 짙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고, 위에는 눈에 거슬리는 금빛 글자로 ‘허튼소리’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이 서책의 속표지에는 반짝반짝 광택이 도는 여우 털까지 끼어 있어 그가 느낀 치욕은 배가 되었다.
검은 해골은 그제야 자신이 우마왕 패거리에게 완전히 농락당했음을 알아차렸다. 앞서 인간족 수사와 충돌한 것도 자신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가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전에 저쪽에서 그림자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상대의 한쪽 팔에 푸른 불꽃이 휘감긴 것처럼 푸른 빛줄기들이 맺혀 있었다.
검은 해골은 대경실색했다.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우마왕의 주먹에 한 번이라도 더 맞는다면 모든 뼈가 가루로 흩어지리라. 그리 되면 요행히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경지가 절반은 깎일 터였다.
검은 해골은 번쩍 몸을 날려 저 멀리 달아났다.
우마왕은 그가 줄행랑치는 것을 보고는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잠시 후, 곤두박질치듯 땅으로 추락했다.
심협 등은 화들짝 놀라 그의 곁으로 날아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우마왕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앞가슴에는 아직 비수가 꽂혀 있었고, 위에는 실오라기 같은 검은 빛이 뻗어나가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은…… 혈마독(血魔毒)!”
만세호왕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심협의 안색도 더욱 차갑게 굳었다.
혈마(血魔)는 본디 치우 휘하의 첫째가는 마족 대능으로, 그의 마혈 신통력은 놀라울 정도로 끔찍하다. 심첨독혈(心尖毒血)은 태을의 경지에 이른 선인조차도 막아내기 힘든 맹독으로 유명한데, 이 비수에 묻은 독이 그것일 공산이 컸다.
그러니 하나같이 두 눈 빤히 뜨고도 애만 태우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홍해아, 이리 오너라…….”
우마왕이 다소 기운이 없음에도 근엄한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부왕.”
홍해아가 즉시 몸을 굽히고 가까이 다가갔다.
“방금 그놈을 물리치느라 제때 혈독을 막지 못하여 이미 심맥 일부에 독이 침투했다. 지금 네가 삼매진화로 상처를 지져 잠시 독소를 억제하게 도와준다면, 심맥 전체에 번지지는 않을 게다.”
우마왕이 말했다.
“부왕, 이 불길은 너무나도 뜨거워 혈독을 태울 때 부왕의 심맥까지 상할까 두렵사옵니다.”
홍해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다. 마음 놓고 하거라. 심맥이 상한다 해도 혈독에 침식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모두 이 아비를 위한 길이다.”
그제야 홍해아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소자 최선을 다해 부왕의 심맥을 지켜낼 것이옵니다.”
우마왕은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여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여인은 겁먹은 토끼 같은 눈으로 떨고 있었다.
“내 곁으로 오시오.”
여인은 잠시 갈등했으나, 두려운 와중에도 죄책감에 결국 그에게 다가가 몸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