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82화 (482/1,214)
  • 482화. 겁을 대신할 그릇

    “겁을 대신하는 방법입니다.”

    심협이 말했다.

    “겁을 대신하는 방법?”

    만세호왕이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겁을 막는 편법이긴 합니다만, 조금 응용하면 홍해아의 몸에 있는 심마주와 금제를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성련법단의 단주 임달에게서 배운 것이다. 다만 현실 세계에서는 자질에 한계가 있어서 법진의 형태만 가까스로 기억했을 뿐, 그 안에 담긴 오묘함은 깨닫지 못했다. 꿈속 세계에 들어오고서야 그 법진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었고, 심지어 부족한 점을 더 보완할 수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금제와 심마주를 옮기는 데는 큰 자신이 없었다.

    “좀 자세히 말해보게. 내 듣고 난 뒤에 결단을 내리겠네.”

    우마왕이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방법을 행하려면 우선 그릇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수련경지와 법력이 그와 거의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사람이어야만 하지요. 그 뒤에…….”

    심협은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을 이어갔다.

    “이 방법은…… 정말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우마왕은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홍해아와 경지가 비슷한 자를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일단 그릇이 되고 나면 그 뒤의 결과는 육신과 신혼 모두 죽어 없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세호왕이 물었다.

    “그 일은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심 도우, 그 법술을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우마왕이 잠시 헤아려보더니 말했다.

    “이 법진은 저도 직접 써본 적이 없으니 응용해서는 안 됩니다. 약간의 조정과 변화가 필요하지요. 그밖에도 특수한 재료들이 필요하긴 하나, 사흘 정도면 될 듯합니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답했다.

    “알았네. 그럼 나는 잠시 떠났다가 사흘 뒤, 제시간에 맞춰 돌아오겠네.”

    우마왕이 말했다.

    “부왕…….”

    홍해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부친을 불렀다.

    “괜찮을 게다. 너는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마친 우마왕은 성큼성큼 마운동을 떠났다.

    “호왕 선배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제게 조용한 방을 하나만 마련해주십시오.”

    심협이 말했다.

    “문제없네. 소옥, 심 도우를 나의 폐관실로 데려가거라.”

    만세호왕이 백옥 영패를 하나 던지며 말했다.

    “예.”

    영패를 받은 소옥은 곧장 심협을 마운동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 * *

    깊은 밤, 고요한 석실 안. 심협은 홀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사방 벽에는 형석(*螢石: 반딧불이 같은 빛을 내는 돌)의 빛이 석실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석실 한가운데에는 3척쯤 되는 정사각형 모래판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고운 소금처럼 하얀 모래가 가득했다. 심협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모래알들은 춤추듯 움직이며 모래판 위에 1촌 정도 높이의 언덕들을 이루었다.

    “임달의 법진은 수많은 고승들의 공덕을 빌려 자신에게 내리는 천도의 징벌을 상쇄하려는 의도였지만, 홍해아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지. 하지만 적어도 진선 중후기 수사 여섯이 법진을 통제하고 심마주와 그의 몸에 있는 금제를 함께 옮기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모래판 변두리에 솟아있던 모래 언덕이 하나하나 무너졌고, 일곱 개만 남았다. 하나를 중심으로 여섯 개가 둘러싼 형태였다.

    “하지만 우마왕은 태을경이니 진선기 수사 한 명쯤 빠져도 괜찮을 거야.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실수를 하기 십상이지.”

    심협이 계속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가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휘두르자, 모래판 위에 있던 모래언덕 두 개가 곧 또다시 사라지고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는 언덕 네 개가 중앙의 모래언덕을 둘러쌌다.

    “이 법진에는 음양이 뒤바뀐 법진을 결합해야 하고, 속성이 서로 잘 맞는 법보 두 개를 사용해 법진을 안정시켜야 해. 하나는 진해빈철곤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정해주 정도면 되겠지. 나머지는 진도(陳圖)를 보완하는 것인데…….”

    심협이 말을 마치고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자, 모래판 위에 깊이가 들쑥날쑥한 부진(符陳) 문양들이 떠올랐다.

    * * *

    사흘은 눈 깜짝할 새 지났다.

    적뢰산 어느 평탄한 골짜기에는 거대한 숲이 말끔히 정리되었고, 그 한가운데에 둘레가 10장이 넘는 네모난 제단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 산골짜기에 햇살이 떠오를 무렵, 제단 주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심협은 사람들을 등지고 서서 손에 육진편을 든 채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제단 한가운데의 돌기둥에 부적 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머리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눈은 벌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그는 어젯밤부터 이곳에 부적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다. 모래판에 이미 수백 번을 그려봤으나,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새겨 넣었다.

    마지막 부적 문양 선까지 합쳐진 뒤에야 그는 육진편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곧게 편 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됐는가?”

    옆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우마왕이 곧바로 홍해아를 이끌고 다가와 물었다.

    “됐습니다.”

    심협은 눈에 약간 핏발이 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 도우, 수고했네.”

    우마왕이 엄숙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아닙니다. 이제 홍해아를 데리고 오셔도 됩니다. 우리 말고도 진선 후기의 수사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심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 자네들과 함께하지.”

    만세호왕이 대답했다.

    “아직 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꼭 진선 후기의 수사여야 한다면, 귀수도 가능한가?”

    우마왕이 주저하며 물었다.

    “경지만 충분하면 됩니다.”

    “알았네.”

    우마왕은 짧게 답하고는 손을 들어 허리띠 한가운데에 박힌 자줏빛 보옥을 문질렀다. 그러자 자줏빛 옥에서 자색 연무가 한 가닥 흘러나와 허공에서 형체를 갖추더니 삿갓을 쓴 흑의의 청년이 되었다.

    “주인님.”

    사내는 형체를 갖추기가 무섭게 우마왕에게 포권을 했다.

    “청망(靑莽), 잠시 기다렸다가 여기 심 도우의 지휘에 따라 진을 치거라.”

    우마왕이 분부했다.

    “예.”

    청년은 짧게 답한 뒤 곧 우마왕과 심협에게 포권하며 예를 갖추었다.

    심협도 예를 갖추며 답례하고는 ‘시종인 귀수조차 진선 후기의 경지라니, 과연 태을의 수사는 비범하군’ 하고 속으로 찬탄했다.

    “사람이 다 모였으니 시작할까요? 한데 겁을 대신할 그릇은 어디 있는지요?”

    심협이 묻자 우마왕이 또다시 손을 들어 소매에서 손바닥만 한 포대를 꺼냈고, 포대 주둥이를 열고 바닥에 댄 우마왕이 조용히 몇 마디 읊조리자,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람이 툭 떨어져 내렸다.

    자세히 보니 회백색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있었다. 다만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체격과 달리 생김새는 괴상했다. 시커먼 들창코에 머리 위에는 축 처진 귀가 두 개 달려 있는 요족이었다.

    그는 몸통 바깥에 노란 천을 한 바퀴 감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부적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에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입까지 틀어막혀 그저 낑낑거릴 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심협은 개 요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의아하다는 듯 우마왕을 바라보았다.

    “전에 마족이 취운산을 공격하려 했는데, 이놈이 진선 후기의 경지를 믿고 밖에서 거듭 도발을 해왔지.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내 이놈을 생포해 줄곧 동부 안에 가둬두었다네.”

    우마왕이 말했다.

    “그의 경지면 겁을 대신하기에 딱 좋습니다. 지체해서 좋을 게 없으니, 각자 법진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제가 법진을 작동시키는 주문을 전해드리면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심협의 말에 모두가 응답했다.

    이어서 심협이 법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발을 구르자 제단 전체가 진동했다.

    한가운데의 돌기둥이 이 힘에 몇 촌이나 솟아올랐고, 심협은 발끝을 그 밑에 들이밀고는 3척 높이의 돌 받침대를 공중으로 슬쩍 들어올렸다.

    그는 손을 뒤집어 진해빈철곤을 꺼내 땅바닥에 댄 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돌기둥을 정확히 받아냈다.

    이어서 그는 도사 행색을 한 개 요괴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더니 진해빈철곤을 등지게 하여 돌기둥을 향해 집어던졌다.

    가엾은 개 요괴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간절한 눈빛으로 우마왕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낑낑거렸다.

    우마왕은 이를 못 본 척하고 손을 들어 휘둘렀다. 그러자 홍해아는 머리 위에 정해주가 드리운 빛에 뒤덮인 채 진해빈철곤 위의 돌기둥으로 보내졌다.

    심협과 세 사람도 몸을 날려 각자 돌기둥에 내려선 뒤 가부좌를 틀었다.

    “제가 진해빈철곤에 법력을 주입하면 우마왕 선배님께서 동시에 법력을 정해주에 주입하십시오. 법력 양은 저와 거의 비슷하게, 균형을 맞춰주시면 됩니다. 여기까지 마무리되면 여러분께서는 주문을 외우십시오.”

    심협의 말에 세 사람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전음으로 사람들에게 주문을 알려준 뒤, 한 손으로 결인하여 진해빈철곤에 법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진해빈철곤 위에서는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우마왕도 즉시 법력을 조종하여 정해주에 주입했다. 그러자 정해주는 더욱 눈부신 푸른 빛을 뿜어냈다.

    빛이 밝아지자 심협과 세 사람은 함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네 사람의 법력이 아래쪽의 돌기둥에 주입되어갔다.

    돌기둥의 부적 문양이 법력에 의해 점화되어 하나둘 핏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제단 바닥에 새겨진 부적 문양도 따라서 빛나더니, 꼭 화염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타오르는 것처럼 바닥에서 핏빛이 내비쳤다. 진해빈철곤이 떠받치고 있는 돌기둥에도 붉은 빛이 번져갔다.

    상반신을 발가벗은 채 돌기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홍해아는 다소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숙여 자기 가슴과 배 사이에 박혀 있는 심마주를 바라보았다.

    아직 심마주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그저 그 위에 새겨진 금제 부적 문양이 법진의 영향을 감지한 듯 깜빡깜빡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심협이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한쪽 손바닥을 세워 한가운데 있는 홍해아를 향해 밀어냈다.

    그들의 손바닥에서는 법력이 한 줄기씩 맺혀 나와 홍해아의 몸을 때렸다.

    “윽!”

    홍해아가 신음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앞가슴에 박혀 있던 심마주도 위험을 알아차린 것인지 표면에 새겨진 금제 부적 문양이 순간 빛을 번득였다. 금제가 심마주를 폭파시킬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심협이 가볍게 외쳤다.

    “일어나라!”

    다음 순간, 사방의 돌기둥과 바닥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이 밀물처럼 정중앙의 돌기둥을 향해 모여들더니 홍해아와 돌기둥, 개 요괴를 가운데에 둘러싸고 나선형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한 줄기 기이한 힘이 그 안에서 흘러나와 홍해아의 몸속으로 밀려들자, 심마주의 금제 문양에서 번득이던 빛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그제야 잔뜩 곤두서 있던 우마왕의 신경이 조금 풀렸다.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당분간 금제를 억누르고 심마주를 분리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심협이 주의를 주자 사람들은 다시 온 정신을 집중했다.

    심협은 홍해아에게 전음을 전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요. 일단 성공적으로 심마주를 분리해내면 좋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대는 잠시나마 온 힘을 다해서 심마주를 억눌러야 하오. 그럼 우리가 둔술로 그대를 데리고 적뢰산에서 멀리 벗어날 거요.’

    홍해아는 그 말에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심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