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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81화 (481/1,214)
  • 481화. 어쩌면 해볼 만할지도?

    적뢰산, 마운동.

    우마왕과 만세호왕이 마주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심 도우는 우리 옥호 일족의 은인일세.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마족 토벌에 우리 옥호 일족은 반드시 참가할 게야.”

    만세호왕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번 마족의 침입이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삼계의 붕괴는 이미 기정사실입니다. 천정이 남아 있을 때에도 막지 못했는데, 지금 남은 세력만으로 판을 뒤집으려 하다니요.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우마왕이 눈썹을 찌푸린 채 답했다.

    “순진하다? 이 난세에 몸 사려서 제 한 몸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순진한 것일세. 삼계가 모조리 마족의 손에 넘어가면, 자네는 정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살아갈 수 있을 성싶은가?”

    만세호왕이 비웃듯 말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허나 그가 정말 제 아들을 데리고 돌아온다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우마왕은 장인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한 수 접었다.

    그러자 만세호왕이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며 말했다.

    “그 아이가 태어난 이래로 얼마나 많은 말썽을 일으켰는가? 관세음보살을 따라 수련을 하고도 그리 미련하게 마족과 한 패가 되다니. 제 스스로 타락한 게지. 심 도우가 이번에 가서 어떤 위험을 겪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네만, 만약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우리 옥호 일족은 은인을 대할 면목이 없을……”

    “보고드리옵니다, 대왕. 심 도우가 소대왕(小大王)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만세호왕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동실(洞室) 밖에서 요병의 급보가 들려왔다.

    만세호왕과 우마왕 두 사람 모두 안색이 변하여 동시에 벌떡 일어나서는 황급히 마운동을 나섰다.

    두 사람이 동실을 나가 마운동 대청에 이르자 심협이 한 손으로 황금승의 한쪽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대편 끝에는 황금승에 포박된 어린아이가 보였다.

    “해아야.”

    우마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부왕…….”

    홍해아는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심협은 손을 들고 황금승을 당겨 거둬들였다.

    “착한 아가, 고생했구나.”

    쪼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홍해아의 어깨를 짚는 우마왕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한데 그때였다. 홍해아가 갑자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심가 놈아, 너는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가슴과 배 사이에서 붉은 빛이 불쑥 솟아올랐다.

    “안 돼!”

    만세호왕의 외침과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북두칠성검이 한 치쯤 떠올랐고, 그와 심협 등의 앞에 갑자기 높은 얼음장벽이 나타나 홍해아를 가로막았다.

    다음 순간, 새빨간 화염이 홍해아의 입과 코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날름거리는 불길이 되어 엄습해왔다. 얼음장벽에는 순식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안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라 대청 전체를 자욱하게 채웠다.

    만세호왕은 이미 소옥을 보호하며 몸을 피했고, 심협도 뒤로 몇 장이나 물러나면서 손에 금빛을 반짝여 황금승을 불러내 홍해아에게 던지려 했다.

    그때,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쿵!

    우마왕의 커다란 주먹이 홍해아의 등에 꽂혔고, 홍해아는 땅바닥에 팽개쳐졌다가 튕겨 올랐다. 그리고 다시 떨어져 내렸다.

    홍해아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염도 뚝 끊겼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뭘 하려는 것이냐?”

    우마왕이 땅 위에 엎드러진 아들을 홱 잡아당기며 꾸짖었다.

    “부왕, 정…… 정해주(定海珠)를…… 쓰십시오.”

    홍해아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힘겹게 말했다.

    우마왕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한 줄기 푸른 빛이 번졌다. 이어서 주먹만 한 물빛 구슬이 번쩍이며 손바닥에서 솟아올라 홍해아의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푸른 물빛을 내뿜어 그를 감쌌다.

    심협은 그 푸른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바다처럼 기운차고, 그 속에는 뚜렷한 금제의 힘이 있어 강력한 속박류 법보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홍해아가 왜 갑자기 난동을 부렸는지, 또 왜 우마왕에게 정해주로 자신을 제압하게 한 것인지, 사람들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아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우마왕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푸른 빛에 싸인 홍해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쪽 옷자락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아랫배에 검은 구슬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구슬은 크지 않아 용안(龍眼)만했는데, 그 위에는 검은 기운이 어슴푸레하게 감돌았다. 주위로는 핏줄 같은 검은 문양들이 갈라져 나와 홍해아의 피와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이게 무엇이냐?”

    우마왕은 안색이 급변하여 물었다.

    “심마주(沁魔珠)입니다. 그 요마들의 수단이지요. 치우의 마기가 담겨 있어 나날이 제 몸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제가 완전히 마화되는 날까지 말입니다.”

    홍해아가 말했다.

    “이 때문에 마족에 들어간 것이오?”

    심협이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가 그들과 한 패가 되길 원한 줄 알았느냐? 보살께서 그리 오랜 세월 가르치셨는데, 설마 내가 조금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까봐? 보타산이 전멸할 때 나도 피 흘리며 싸웠다. 한데 어찌…….”

    홍해아는 깊게 탄식했다.

    “바보 같은 것. 너는 왜 아비를 찾아오지 않은 게냐? 내 분명 너를 구할 방도를 생각해냈을 터인데…….”

    우마왕이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이 심마주는 이미 제 피와 살과 하나가 되어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홍해아는 웃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는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등을 보였다.

    “이게 무슨……?”

    우마왕은 분노로 두 눈을 부릅떴다.

    홍해아의 등에는 검은 맥들이 고목 가지처럼 넓게 뻗어 있어, 앞에서 봤을 때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게다가 이 심마주에는 금제가 있어서 제가 찬두호산을 떠난 지 7일이 넘으면 심마주가 폭발합니다. 그리 되면 제 단전도 함께 터지면서 제 몸속의 삼매진화가 통제를 잃고 흘러 넘쳐 온 적뢰산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지요.”

    홍해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눈앞의 홍해아가 세상을 어지럽히던 악당이 아님을 깊이 깨달았다.

    심협은 조용히 다가가 홍해아의 배에 박힌 심마주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그 위에는 자그마한 부적 문자들이 보였다. 다만 평소 보던 부적 문양의 전자(篆字)체와 달라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만세호왕 역시 다가와 한참을 살펴보고는 무척 어두운 얼굴로 침음했다.

    “평범한 금제 부적 문양이 아니라 마문(*魔文: 마족의 문자)으로 적힌 것이로군. 일반적인 해금(解禁)법은 무용지물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마왕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얘야, 너는 마족에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원하느냐?”

    우마왕의 질문에 심협의 신경이 즉시 바짝 곤두섰고, 옆에 있던 만세호왕도 안색이 돌변했다. 두 사람 모두 우마왕이 홍해아 때문에 마족에 합류하지는 않을까 크게 걱정이 된 것이다.

    “부왕, 소자가 어찌 마족에 들어가길 원하겠습니까?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은 그저 아직 달갑지 않은 마음이 조금 있어서일 뿐입니다.”

    홍해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비에게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다만 네 목숨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네 신혼은 지킬 수 있을 게다.”

    우마왕의 말에 홍해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왕, 그 말이 정말이옵니까?”

    우마왕은 말없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소자 육신이 파괴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이리 고통받고 싶지도 않고요.”

    홍해아가 곧 소리쳤다.

    우마왕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휘두르자, 앞에 금빛이 번쩍이면서 금빛 서책 하나가 그의 앞에 떠올랐다.

    ‘천책!’

    심협은 금빛 서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고는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이 다섯 번째 천책 잔권이 뜻밖에도 우마왕의 손에 있다니, 그 역시 천도가 선택한 사람이란 말인가?

    “이게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인가?”

    만세호왕이 경탄했다.

    “천책…… 부왕, 이 천책이 어찌 부왕 수중에 있사옵니까?”

    홍해아가 반쯤 넋이 나가 물었다.

    “천책이라면…… 천선(天仙)들의 신혼이 담긴 그 천책?”

    홍해아의 말에 만세호왕이 놀라서 되물었다.

    “놀랄 것 없다. 천책의 일부 잔권에 불과하니까. 아비가 네 신혼을 천책에 올려두기만 하면 네가 죽더라도 후에 이 천책으로 신혼을 되살릴 수 있다.”

    “천책에 실린 것은 모두 잔혼인데, 우마왕 선배님께서는 설마 홍해아의 모든 신혼을 그 안에 담으시려는 것입니까?”

    심협이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그렇다네. 그래야 이 아이의 신혼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지.”

    우마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방법이긴 하군.”

    만세호왕은 기뻐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렇게 사람들이 정말 살길을 찾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홍해아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는 듯한 말을 꺼냈다.

    “부왕, 그 방법은…… 소용이 없사옵니다.”

    사람들 모두 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어찌 소용이 없단 말이냐?”

    우마왕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설마…… 벌써 천책 속에 잔혼의 흔적을 남긴 적이 있소?”

    심협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렇다. 관세음보살 좌하(座下)에 귀의하였을 때, 이미 천책에 신혼의 흔적을 남겼지. 그러니 이제 다시 실을 수가 없어.”

    홍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마왕은 그 말에 희망의 불꽃이 꺼진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홍해아가 이미 신혼의 흔적을 남겼다지만, 그것은 그저 한 가닥의 잔혼일 뿐이다. 그러니 설령 우마왕의 아들의 잔혼을 기록한 천책 잔권을 찾아낸다 해도 이를 통해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영식(靈識)이 온전치 않은 잔혼일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들의 잔혼을 싣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결자해지(結者解之)라던가. 누가 네게 금제를 심었느냐? 아비가 그자를 찾아가겠다.”

    우마왕은 두 눈시울을 붉히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를 찾아가도 소용없사옵니다. 소자에게는 시간이 7일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이 심마주 속에 담긴 것은 치우의 마기인지라 금제를 심은 자가 꼭 풀 수 있으리란 법도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너는…… 아무래도 찬두호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우마왕이 허탈한 기색으로 손을 휘둘러 정해주를 거둬들이고 홍해아를 보내주려 했다.

    그때, 옆에서 손바닥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우마왕의 팔뚝을 붙잡았다.

    “선배님,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자네, 나를 막으려는가?”

    우마왕이 싸늘한 눈길로 심협을 돌아보았다.

    “확실하진 않으나 제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우선 들어보시겠습니까?”

    “뭐라? 정말인가?”

    우마왕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심협의 팔뚝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물론이지요.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다만 성공 가능성은 5할 정도에 불과하니 결정은 선배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심협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우마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홍해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부왕, 소자 한번 해보고 싶사옵니다.”

    “허나 성공할 가능성이 반밖에 되지 않는데…….”

    우마왕이 주저하자 홍해아가 진중한 목소리로 설득에 나섰다.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소자 어찌어찌 목숨을 연명할 수야 있겠으나, 아마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마기에 완전히 물들어 마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옵니다. 그리 되면 남에게 통제를 받아 적뢰산으로 창끝을 돌리게 될 터인데, 부왕께서는 정녕 그런 광경을 보고자 하시옵니까?”

    그제야 우마왕도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심협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말한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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