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허를 찌르다.
“크아악!”
흑의의 노인은 미처 다른 법보를 꺼낼 겨를도 없이 몸이 두 동강 나버렸다. 잘려나간 그의 시체는 이어서 완전히 폭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체 조각들은 먹처럼 새카만 두 덩이의 마기로 변하더니, 다시 빠르게 하나로 합쳐져 멀리 날아갔다. 다만 그 기세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비술로 죽음을 모면하긴 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만은 분명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 온 놈이지? 저 금색 막대기는 또 무슨 보물이고, 저 노란색 손수건은 무엇이기에 저리 신묘하단 말인가! 적어도 하늘에서 내린 영보(靈寶)의 단계일 터! 어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흑의의 노인은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며 재빨리 물러나려 했다.
한데 그때, 어디선가 황금승이 날아와 금빛을 발하며 검은 기운을 휘감았다.
검은 기운이 즉시 흩어지면서 황금승에 꽁꽁 묶인 노인이 드러났다.
황금승을 막아낼 보물이 없었던 노인은 온몸의 마기를 전부 단단히 속박당하여 돌덩이처럼 추락했다. 마음 또한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금빛 곤영 한 줄기가 스쳐 지났다. 진해빈철곤이 바람을 안고 수많은 잔상을 드리우며 흑의의 노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퍽!
노인의 머리는 수박 깨지듯 터져버렸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신혼은 미처 달아나지도 못하고 허무로 되돌아갔다. 진선 후기의 심오한 경지를 지녔음에도 방심하던 차에 이어진 심협의 속전속결에 본신의 능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채 죽고 만 것이다.
심협은 손을 흔들어 금빛 한 줄기를 쏘아 보내 흑의의 노인이 지닌 저물법기와 불골염주를 휘감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몸을 돌렸다.
“학 마사!”
홍해아는 흑의의 노인이 눈 깜짝할 새 죽어나가자 깜짝 놀라 주먹으로 자신의 코를 한 대 치고 입을 벌려 불꽃을 내뱉었다.
우르릉! 쾅!
거대한 삼매진화가 뿜어져 나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거령신과 뇌부천장은 이 화염의 위력을 알아차리고는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홍해아가 양손을 결인하자, 손끝에 붉은 빛 두 덩이가 떠올라 그의 법결을 따라 날렵하게 움직였다.
근처의 천지영기가 벌 떼처럼 몰려왔다. 그러자 반경 3~4장에 불과했던 삼매진화가 급격히 퍼져 나가면서 갑자기 거대한 투명 불구름으로 변하여 뒤덮었다.
용암동굴은 공간이 비좁아 뇌부천장과 거령신을 비롯한 천병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모두 불구름에 휩싸였다.
화매족은 홍해아의 신통력을 본 적이 있었던 터라 그가 삼매진화를 시전하기 전에 재빨리 허화술(虛化術)을 시전해 아슬아슬하게 용암 속으로 숨어들었다.
“화분삼계(火焚三界)!”
홍해아는 크게 외치며 손의 법결을 다시 바꾸었다.
불구름 전체가 끓어오르듯 소용돌이 쳤고, 구름 속 삼매진화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 주위의 천지영기를 미친 듯 흡수하면서 더욱 크고 강력해졌다. 덩달아 가뜩이나 뜨거웠던 열기가 몇 배나 치솟아 심지어 주위의 공간마저 불타버릴 듯 심하게 뒤틀렸다.
구름 속에 있던 뇌부천장과 거령신이 금세 불길에 파묻혀 허무로 돌아갔으니 대승기의 천병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도리어 기뻐했다.
“저것이 현천공화결이로구나! 현천공화결로 삼매진화를 조종하면 이토록 막강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니, 불구름의 신통력은 그야말로 신선이든 부처든 막을 이가 없다! 그렇다면 현천공화결로 홍련업화의 힘을 불러일으키면……?”
그 위력은 삼매진화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심협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몸에서 금빛을 번쩍이더니,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하여 홍해아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홍해아는 진즉부터 심협의 상황을 눈여겨보던 터라 즉각 반응했다. 그는 투명 불구름 속으로 가라앉으며 양손을 재빨리 결인했다. 그러자 붉은 법결이 불구름 속으로 연이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불구름 속 삼매진화가 몇 배로 불어나면서 그를 에워싸고 빙빙 회전하면서 단숨에 높이가 무려 50여 장에 이르는 투명한 화염 회오리를 일으켰다. 이 회오리는 불과 바람이 서로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소리와 기세를 뿜어냈다.
그때, 홍해아의 몇 장 옆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뇌부천장과 거령신이 다시 나타나 금빛 뇌곤(雷棍)과 거대한 푸른 도끼로 화염 회오리를 내리쳤다.
콰쾅!
화염 회오리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요동치는 빛과 소용돌이치는 기류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바깥을 향해 퍼져 나갔다. 빛과 기류가 지나는 곳마다 그 엄청난 기세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바위가 낙엽처럼 날아갔다. 근처의 용암 호수에는 거대한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잠시 후, 화염 회오리에 커다란 틈이 생기고 홍해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찌 이럴 수가! 분명 이미 내 삼매진화에 불타버렸는데…….”
뇌부천장과 거령신을 발견한 홍해아는 깜짝 놀랐지만,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반응하여 손의 법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삼매진화가 날아와 거대한 두 마리 화염구렁이가 되어 단숨에 뇌부천장과 거령신의 몸을 휘감고 몇 바퀴를 돌더니, 갑자기 확 조여들었다.
바로 그때, 심협이 화염 회오리의 갈라진 틈으로 날아 들어와 홍해아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그러나 홍해아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갑게 웃으며 양손에 붉은 빛을 거세게 발하더니 덥석 맞잡았다.
“네놈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앞에 유리화광(琉璃火光)이 스쳐 지나더니, 유리화막(琉璃火幕. 火幕은 불의 장막) 한 겹이 허공에 맺혔다.
그러나 심협은 멈추지 않고 두 용의 팔뚝을 번개처럼 내뻗어 화막에 꽂아 넣었다. 삼매진화의 무서운 위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삼매진화는 곧바로 심협의 몸을 휘감고 그의 두 팔을 타고 올라 온몸으로 뻗어갔으나, 그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홍해아를 향해 날카로운 용의 발을 뻗었다.
홍해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곧장 뒤로 물러나면서 손에 든 화첨창을 내찔렀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화첨창이 두 번 연이어 찔러오자 금빛 용의 발에는 순식간에 두 개의 구멍이 뚫리며 피가 흘렀다.
그러나 용의 발에서 금빛이 미친 듯이 불어나더니, 상처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 화첨창을 덥석 움켜쥐었다.
홍해아는 있는 힘껏 창을 뽑아내려 했지만, 마치 땅속 깊이 박혀버린 것처럼 도무지 뽑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낯빛이 변한 그가 입을 벌리자 삼매진화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굵직한 불화살을 이루어 심협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도 입을 벌리고 노란 부적 하나를 뿜어냈다. 천호미신부(天狐迷神符)였다.
퍽!
가벼운 소리가 울리면서 삼매진화가 심협의 가슴팍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몸에 한 차례 하얀 빛이 감돌더니 몸이 빠르게 얇아지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종이 인형으로 변했다. 이 종이 인형은 이윽고 삼매진화의 불길에 파묻히고 말았다.
“겁을 대신할 종이 인형이었어!”
홍해아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대처하려 했다.
그때, 미신부가 갑자기 노란 빛을 환하게 내뿜으면서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변화무쌍한 노란 여우 그림자를 무수히 만들어냈다.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노란 빛에 홍해아의 눈에도 여우 그림자들이 떠올라 표정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굵직한 금빛 한 줄기가 다시 날아오더니 거대한 금빛 곤봉이 홍해아를 정면으로 내리쳤다. 그 위세는 족히 천지를 부술 만해, 용암동굴이 다시 한번 우르릉 하고 흔들렸다.
이때 홍해아는 미혹당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지만 다섯 금고리는 여전히 빛을 발하며 스스로 공격에 맞섰다. 실로 대단한 영성을 지닌 법기였다.
그러나 진해빈철곤에서 갑자기 금빛 한 가닥이 떨어져 나오더니, 다섯 금고리가 홍해아의 몸을 떠난 틈을 타 쏜살같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 빛줄기는 바로 황금승이었다.
홍해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퍼뜩 정신이 들었지만, 이미 황금승에 꽁꽁 묶이고 몸속의 법력이 속박당한 상태였다.
그의 법력이 끊기자 주위의 삼매진화도 빠르게 흩어졌고, 거대한 화염 회오리도 곧장 꺼졌다.
“금고아환(金箍兒環)!”
홍해아는 겨우겨우 손을 들어 다섯 금고리를 소환하려 했다. 그것은 그 옛날 관세음보살이 그를 구속하기 위해 썼던 영보(靈寶)였지만, 그는 이 다섯 금고리를 이미 오래전에 제련하여 자신의 호신 보물로 만들었다.
이 금고리는 영특해서, 법력이 받쳐주지 않아도 간신히 쓸 수는 있었고, 곧장 홍해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진해빈철곤이 뚝 떨어지면서 위에 금빛이 더욱 폭발적으로 불어나 다섯 금고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때, 홍해아 옆의 허공이 일렁이더니 심협의 모습이 나타나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홍해아의 몸이 금빛으로 뒤덮였고,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곧 금빛 공간 속에 나타났다.
“휴우, 정말이지 쉽지 않군.”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몇 가지 수단은 대단치 않아 보였지만, 실상은 이미 자신의 밑천을 거의 다 드러낸 상태였다. 재난을 대신 당할 수 있는 창백지인과 천호미신부까지……. 어쨌든 다행히 단번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진해빈철곤을 소환하고 다섯 금고리를 천책 공간에 거둬들인 뒤, 회복 단약을 꺼내 먹고 운기조식하며 정제했다.
그러다가 문득 수원독에 중독되어 쓰러진 자들이 떠올랐다. 그자들 모두 마족의 끄나풀이니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고개를 돌리고 용암동굴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뜻밖에도 용암동굴 구석에 쓰러져 있던 일곱 요마들은 물론이고 연기로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자들은 중독되어 쓰러졌으니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었을 터. 그렇다면 누군가 그들을 데려갔다는 뜻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자신의 신식을 완전히 피해 그 일곱 사람에 연기로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면 적어도 태을경의 수사일 터!
심협은 손을 뒤집어 뇌 도인이 준 치염단주를 꺼내 손바닥으로 덮은 채 눈으로 동굴 안 곳곳을 둘러보았고 신식도 뻗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심협은 그곳에 오래 있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해 용암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 * *
반 시진 후, 화활산맥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의 지면에 노란 빛이 번쩍이더니 심협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활산맥에서 멀찌감치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바짝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 풀렸지만, 잔뜩 찡그린 미간은 그대로였다.
‘용암동굴에서 그자는 일곱 요마를 구출하고 연기로까지 가져갔으면서 어째서 홍해아와 그 노인을 구하러 나서지 않았던 걸까? 그 일곱 요마 틈에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의혹이 들었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됐다. 그자의 목적이 무엇이건, 나는 홍해아를 잡는 임무를 완수한 거야.”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내고는 천책 공간 안으로 신식을 집어넣었다.
황금승에 묶인 홍해아는 몸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마치 잘 익어서 벌게진 새우 같았다. 더욱이 체내에 법력이 한 가닥도 남지 않은 상태라 몸부림도 그저 헛수고일 뿐이었다.
그의 화첨창과 다섯 금고리는 옆에 떨어져 있었는데, 금빛으로 만들어진 빛 덮개에 갇혀 있어서 마찬가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공이 번쩍이며 금빛이 하나로 모이더니 심협의 모습을 이루었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홍해아는 심협을 보자 애써 일어나 앉더니 벌컥 역정을 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소. 그대가 성영대왕 홍해아라는 게 중요하지. 나는 그대의 부친께서 그대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보낸 사람이오.”
심협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너를 보내셨다고?”
홍해아는 그 말을 듣고 노기를 조금 거두더니 의외로 덤덤하게 되물었다.
“평천대성께서는 귀하가 마도에 빠지자, 부자가 등 돌리고 훗날 전장에서 서로 칼날을 겨누게 될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괴로워하셨소.”
“흥! 난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 없다!”
홍해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마족과 함께해서 좋을 게 무어겠소? 그대가 탐하는 것은 그저 그들과 함께 비행을 일삼는 타락감일 뿐이지. 지금 적뢰산과 취운산(翠雲山) 모두 마족과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게 됐으니 훗날 전장에서 만나게 될 텐데, 그대는 부친을 향해 창을 찌를 수 있겠소?”
심협의 덤덤한 지적에 홍해아는 일순 답하지 못했지만, 괴팍한 성정답게 곧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너는 아버지의 아랫사람이라면서 감히 나를 묶어둔 것이냐! 얼른 풀어주지 않으면 내 돌아가서 절대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는 방촌산의 제자로, 그대 부친의 아랫사람이 아니오. 적뢰산에 도착하면 그대 부친을 뵙고 풀어줄 것이니, 지금은 얌전히 있으시오.”
심협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리 말하더니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렸다.
천책 바깥에 있던 그의 몸에 노란 빛이 번쩍였고, 심협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적뢰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