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73화 (473/1,214)
  • 473화. 종적을 찾다

    “금림! 벌써 가는귀가 먹은 것이냐? 썩 꺼지란 말이다!”

    흑우는 지금 심협에 의해 천책에 기록되어 성영대왕까지도 새카맣게 잊어버린 터라 징벌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호통을 쳤다.

    허나 금림은 본디 성격이 개차반에 제 숙부까지 등에 업은 데다 성영대왕 휘하의 통령인지라 평소 현공동에서 호가호위하며 횡포를 부렸다. 그래서 자신보다 실력이 높은 흑우의 호통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흑우 네 이놈! 면을 세워주려해도 사양하는구나! 이 몸께서 네놈의 화리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네놈 복이거늘! 눈치껏 칼을 내게 넘기지 않으면 불기둥 형벌이나 기다려야 할 것이다!”

    흑우가 단칼에 거절하고 호통까지 치자 금림은 벌컥 화를 내며 대뜸 욕을 퍼부었다.

    흑우는 주인을 데리고 현공동에 들어가려던 차에 이렇게 가로막히자 화가 치밀었고, 단칼에 금림의 머리통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하지만 말썽을 일으킨다면 심협에게도 불리할 터라 성격대로 나서지 못했다.

    ‘저 독수리 요괴의 숙부가 누구냐?’

    한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심협이 전음으로 흑우에게 물었다.

    ‘금림의 숙부는 대승기 금염응(金焰鷹)이온데, 이름은 금례(金禮)라 합니다. 현공동의 5대 통령 중 하나이지요. 성영대왕과 그 휘하의 진선들은 평소 아무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아 현공동의 사무는 대부분 5대 통령이 맡고 있습니다.’

    흑우가 전음으로 답했다.

    ‘오, 그렇구나. 내 걱정 말고 저 녀석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주거라. 그러고 나서 현공동으로 들어가자.’

    뜻밖에도 주인이 자신을 옹호해주는 듯하자 흑우는 크게 기뻐하며 즉각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손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붉은 곡도 한 자루가 나타나 금림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헛! 감히 나를 공격하다니!”

    금림은 흑우가 감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터라 기겁을 하면서도 분노하여 황급히 짙푸른 군도 한 자루를 꺼내 맞섰다.

    챙!

    굉음이 울리면서 푸른 군도가 곡도를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금림의 몸은 휘청하고 흔들렸다.

    다시 붉은 빛 한 줄기가 번쩍 스치더니, 다른 곡도 한 자루가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금림의 몸에 꽂히면서 세찬 도기(刀氣)가 독수리 요괴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금림은 순식간에 나가떨어져 땅에 나동그라졌고, 피를 한 모금 내뿜더니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렸다.

    “대장!”

    독수리 요괴 옆에 있던 몇몇 요괴 병사들은 아연실색해 있다가 잠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모여들어 금림을 일으켜 세웠다. 흑우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위의 다른 순찰병들도 깜짝 놀라 멍하니 흑우를 쳐다보았다.

    “흥! 약해빠진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기는!”

    흑우는 쌍도를 거두고 경멸어린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몸을 날려 현공동 안으로 날아갔다.

    요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왁자하게 소란을 벌였다. 흑우는 실력이 뛰어나고 평소 조용한 편이었건만,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벌이다니!

    하지만 주위의 요괴 병사들은 더 구경하지 않고 곧 하나둘 자리를 떴다. 금림은 성미가 괴팍한데, 이리 개망신을 당했으니 괜히 남아서 구경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우려한 것이었다.

    몇몇 심복 병사들이 응급처치를 하자 금림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흑우 그놈은?”

    금림은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며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부상이 매우 컸지만, 출규기 요물답게 요체(妖體)가 강인하여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대장님, 우리는 이제 어찌 합니까?”

    옆에 있던 요괴 병사가 물었다.

    “저 흑우란 놈이 정신을 놓고 미쳐 날뛰어 대장님께 손찌검을 하였으니, 절대 이리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요괴 병사 하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연하지! 가라! 당장 숙부님을 찾아가란 말이다! 흑우 그놈이 화삼을 잡지 못했다는 것을 그분께 알려드려라. 이번에는 반드시 그놈에게 불기둥 형벌을 내려야겠다. 그놈이 죽고 나면 화리도는 내 것이야!”

    금림은 독살스럽게 외치며 옆에서 부축하던 요괴 병사를 밀쳐내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 * *

    흑우는 뒤에 일어난 소동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거처인 현공동 중간층의 어느 동부 안에 이르렀다.

    “……현공동 밑바닥에는 커다란 화영맥(火靈脈)이 있습니다. 밑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영력이 더 짙어지지요. 강한 사람일수록 더 아래층에 머물도록 배정됩니다. 성영대왕과 진선기 요족들 모두 가장 아래층에 살고 있지요.”

    흑우는 현공동의 간이지도까지 그려가며 심협에게 현공동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그렇구나. 네가 전에 말했던 보물을 만드는 밀실은 어디에 있느냐?”

    심협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성영대왕의 동부는 더 아래쪽에 있는데, 그곳은 땅속 용암지대와 아주 가깝습니다. 온도가 너무 높아 살기에는 적당치 않지만, 보물을 만드는 데에는 안성맞춤이지요.”

    흑우가 지도의 어느 한곳을 짚었다.

    “그럼 화매족은 어디에 갇혀 있느냐?”

    심협은 한 가지 일을 떠올리고는 또다시 물었다.

    “보물을 만드는 밀실 더 아래쪽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용암동굴이 있는데, 화매족은 모두 그곳에 갇혀 있습니다.”

    흑우가 연보(*煉寶: 보물을 제련하는 일)밀실 아래쪽의 어느 지역을 짚었다.

    “그곳은 땅 밑바닥에 더욱 가까운데, 화매족이 그런 불구덩이 같은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냐?”

    “화매족은 이종(異種)이라 평범한 요족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무더운 고온의 환경일수록 더 좋아하지요.”

    흑우의 설명에 심협은 감탄하고는 곧 다시 용암동굴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용암동굴은 땅 밑바닥에 있어서 흑우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구체적인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심협은 이제 신식을 천책 공간으로 집어넣어 화삼에게 묻기 시작했다.

    “대선, 벌써 현공동에 들어가셨습니까? 그 용암동굴은 크기가 수백 장이나 되고 땅 밑바닥의 화영맥 호수와 바짝 붙어 있습니다. 용암동굴과 연보 밀실은 구염귀원대진(九炎歸元大陣)으로 연결되어 있사온데, 평소 우리 화매족이 용암동굴 안에서 지화(地火)의 정수를 정제하여 법진을 통해 맞은편의 연보 밀실로 전달합니다.”

    화삼은 용암동굴 안 상황을 자세히 묘사해주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서 물었다.

    “화매족이 갇힌 용암동굴은 땅 밑바닥인데, 너는 어찌 탈출하였느냐?”

    “성영대왕이 화활산에 내려오기 전에 우리 화매족은 그 용암동굴을 발견했지요.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좁다란 통로가 있고, 여러 곳의 용암지대를 건너야 하기에 성영대왕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소인은 바로 그 좁은 통로로 도망쳐 나왔지요.”

    화삼이 막힘없이 설명하자 심협의 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화삼이 그 통로로 나왔다면 자신도 그리로 잠입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용암동굴은 연보 밀실과 이웃하여 있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일을 훨씬 편하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용암지대를 몇 군데 가로지르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심협은 화삼에게 그 통로의 입구를 비롯한 여러 상황을 자세히 물어본 뒤, 천책 공간에서 물러나왔다. 이제 흑우에게 성영대왕 휘하의 진선기 요물들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허점을 찾아볼 참이었다.

    한데 그때,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그 금례라는 자가 왔구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뒤집어 노란색 비단 손수건을 꺼내 몸을 감싸고 기척도 없이 동부의 땅바닥으로 녹아들었다.

    심협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흑우의 동부 대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 굴 안으로 날아 들어왔고, 연기와 먼지가 흩날렸다. 이어서 몇몇 그림자가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왔는데, 우두머리는 금빛 옷을 입은 사내로, 요괴의 모습을 완전히 없애버려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만 코는 조금 구부러졌고, 기세가 날카롭고 사나웠으며, 눈빛이 번개처럼 예리했다.

    금빛 옷의 사내 뒤에는 금림이 서 있었고, 그 곁에는 요괴 병사 몇몇이 있었다. 한 요괴 병사는 손에 요물을 하나 붙들고 있었는데, 이전에 흑우와 함께 화삼을 찾던 그 키 작은 새 요괴였다. 한데 이 새 요괴는 온 얼굴이 피범벅인 채로 이미 기절해 있었다.

    “흑우!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화삼을 잃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유 없이 동료를 폭행했단 말이더냐! 규율을 무시하고 미쳐 날뛰다니, 반역이라도 하려는 게냐? 당장 무릎을 꿇어라!”

    금빛 옷의 사내는 잔뜩 흉악한 표정으로 대승기의 거대한 위압을 폭발시켜 흑우를 압박해갔다.

    이에 흑우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무의식중에 몇 걸음 물러났지만, 곧 다시 몸을 가누고 제대로 섰다.

    금빛 옷의 사내는 이 장면을 보고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방금 위압으로 흑우를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고함에 진혼(震魂) 신통력을 담았다. 동급의 수사들도 그 일격을 견뎌내려면 마음과 정신이 불안정해지게 마련이건만, 뜻밖에도 흑우가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다니!

    ‘이 흑우란 놈이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신혼을 굳건하게 해주는 어떤 숨겨진 보물이라도 가진 것인가?’

    금빛 옷의 사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흑우가 금빛 옷 사내의 진혼 신통력을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그의 신혼이 절반 이상 천책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금빛 옷 사내의 이까짓 진혼 공격은 당연히 그에게 큰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금례 통령께서는 진정하시지요. 제가 앞서 했던 모든 일들은 염라 대인의 밀명을 받고 한 것입니다. 실례를 범한 점, 통령께서는 책잡지 말아주십시오.’

    흑우가 공수하며 전음으로 말했다.

    ‘염라 대인!’

    금례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했다.

    염라는 5대 통령의 우두머리로 경지가 이미 대승기 정점에 달했으며, 겁을 겪고 신선이 되기까지 한 발짝밖에 남지 않았으니 금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염라 대인께서 네게 무슨 밀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금례는 표정만큼이나 진중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숙부, 이 흑우 놈이 오늘 사람들 앞에서 제게 큰 망신을 주었으니 이대로 넘길 수 없습니다!”

    금림은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자 다급히 끼어들었다.

    “닥쳐라!”

    금례가 눈을 흘기며 싸늘하게 외치자 금림은 찔끔하여 즉시 입을 다물었다.

    “염라 대인의 밀명은 제게 내리신 것인데 금례 대인께서도 알고자 하신다면 염라 대인의 미움을 사지 않겠사옵니까?”

    덤덤한 대답에 금례는 흠칫하더니 이내 껄껄 웃고는 오른손을 번개처럼 뻗어 흑우의 목을 틀어쥐려 했다.

    흑우는 깜짝 놀라 등에 달린 두 날개에 검은 빛을 급히 반짝이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금례의 경지는 그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의 손바닥에 금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흐릿하게 변하면서 흑우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내게는 음화연혼(陰火煉魂)의 수단이 있어 사람을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자, 직접 말을 하겠느냐, 아니면 나의 음화연혼을 맛보고 입을 열 테냐?”

    금례는 흑우를 붙잡아 들어 올리며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금림은 흑우가 붙잡힌 것을 보고 순간 크게 기뻐했다.

    “좋습니다.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이 일은 절대 제삼자에게 알리시면 아니 됩니다.”

    흑우는 목덜미를 붙잡힌 채로 힘겹게 말하면서 눈으로 동부 깊은 곳의 밀실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