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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71화 (471/1,214)
  • 471화. 성영대왕(聖嬰大王)

    심협은 주위를 잠시 훑어보고는 곧 시선을 거둬들이고 손을 뒤집어 옥간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뇌 도인이 그려준 북구로주 지도가 담겨 있었고, 여기에 화활산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려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땅속으로 돌진했다. 노란 빛이 번쩍하고 곧장 3백여 장이나 땅속으로 파고들더니 그제야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심협은 원 노인이 전수해준 선천연보결을 운공했다.

    노란 비단 손수건이 즉시 수십 배로 커져 매미날개처럼 얇고 가벼운 노란 천으로 변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놀랍게도 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그의 존재가 땅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감쪽같이 기운이 은폐되자, 심협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 무렵, 멀리서 검은 구름 한 덩이가 다가오더니 60여 명에 이르는 검은 갑옷을 입은 요괴 병사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는 하나같이 자흑색이었고, 손과 발에는 부패하거나 퉁퉁 붓는 등 변이된 상태였다. 심협이 예전에 보았던 요괴 병사들보다 더 흉악해 보였다.

    심협이 원 노인 등에게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북구로주의 요물들은 오랜 세월 이곳의 장기와 접촉한 탓에 몸 곳곳에 변이가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이곳의 요물들은 보통의 요물들보다 훨씬 강력했고, 대다수가 장기와 독 따위의 신통력에 능했다.

    우두머리인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는 몸에 변이가 없었지만, 짙은 요기 속에 깊은 마기가 뒤섞여 있었다. 수련 경지는 무려 진선 중기에 도달한 상태였고, 다른 요괴 병사들도 모두 대승기와 출규기 경지였다.

    검은 갑옷의 사내는 손에 검붉은 구슬 하나를 받쳐 들고 빙글빙글 굴리면서 물결 모양의 붉은 빛을 멀리까지 내뿜으며 주위 상황을 살폈다.

    심협이 몸을 숨긴 곳도 붉은 물결에 영향을 받았지만, 노란색 비단 손수건은 실로 현묘하여 붉은 물결들이 노란 얇은 천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상하군. 방금 이곳의 장진(*瘴陣: 장기로 만들어진 법진)에 이상한 것이 뚫고 들어오는 걸 분명히 느꼈는데, 왜 또 사라졌지?”

    검은 갑옷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음명해의 음수(陰獸)들이 어쩌다 부딪쳤나 봅니다. 근래 들어 바깥의 음수들이 영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대승기 요족 하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닐 수도 있다. 내 듣기로는 바깥에 남아 있는 인간과 신선, 요괴들이 감히 치우 대인께서 깊은 잠에 빠진 틈을 타 슬그머니 힘을 모아 반격하려 한다더군.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계속 이쪽을 뒤져볼 테니, 너희들은 실오라기 하나 빠뜨리지 말고 주변을 살펴보아라!”

    검은 갑옷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예!”

    다른 요족들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한 뒤 사방으로 뿔뿔이 날아갔다.

    검은 갑옷 사내는 손에 검붉은 구슬을 받쳐 들고 근처를 몇 바퀴나 돌고도 별 소득이 없자 그제야 병사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땅속 깊은 곳에 있던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후로도 한동안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난 뒤에야 요괴 병사들이 정말로 갔음을 확신하고는 노란 비단 손수건의 은폐 신통력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땅 위로 돌아가지는 않고 계속 땅속에서 토둔술로 나아갔다. 비록 법력의 소모가 크긴 하겠지만, 훨씬 안전할 터였다.

    심협은 잠시 주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도와 대조해본 뒤,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구로주는 뇌 도인의 말대로 마족 천하였고, 거의 모든 요족이 마족에게 귀순한 상태였다.

    게다가 마족이나 반마들이 이끄는 순찰대가 도처에 깔려 있어 심협은 땅속으로 잠행했음에도 몇 번이나 들킬 뻔했다.

    다행히 그는 수련 경지가 매우 높았고, 워낙 기민한 데다 여러 현묘한 보물의 도움까지 받은 덕에 무사히 마족들의 정찰을 피할 수 있었다.

    * * *

    이틀 째 되던 날, 심협은 조용히 땅 위로 올라왔다.

    앞쪽은 온통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였는데, 기이하게도 산봉우리만 빛깔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하나같이 화산이었는데, 어떤 것은 높이가 천 장에 달하는 반면 어떤 것은 겨우 10여 장밖에 되지 않았다. 산 입구에서는 짙은 연기가 무럭무럭 뿜어져 나왔고, 간혹 진홍색 용암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산맥 깊숙한 곳에는 작열하는 붉은 빛이 가득하여 마치 산맥 전체가 불타는 듯했다.

    심협은 산맥 바깥까지 이글이글한 불길이 얼굴로 훅 달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그의 이번 임무의 목적지, 화활산맥이었다.

    ‘화활산맥은 범위가 아주 넓어 보이는데, 홍해아라는 녀석은 어디에 있담?’

    그는 다소 막막한 심정으로 눈앞의 광활한 산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 화산지역은 비단 넓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땅속 도처에 용암이 퍼져 있고 불의 영력이 충만하여 더 이상은 토둔술로 전진하기가 힘들었다.

    심협은 노란색 비단 손수건을 거둬들이고 하얀 부적을 꺼내 몸에 붙였다. 새롭게 배운 은신부였다.

    부적이 하얀 빛으로 변해 몸으로 녹아들자, 그의 온몸이 빠르게 투명해지기 시작했고, 몇 호흡 뒤에는 완전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그의 기운까지도 절반 이상 숨겨졌다.

    ‘그럭저럭 괜찮군.’

    심협은 흡족한 듯 웃으며 몸을 날려 날았지만,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이 은신부는 비록 행적을 일부 감춰주었지만, 그의 높은 경지를 모두 가려주기에는 역부족이라 한 번에 너무 큰 법력을 쓰면 꼬리를 밟힐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지금 심협은 단서를 찾는 중이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화활산은 몹시도 황량하여, 한참을 날아도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마주치지 못했다. 다른 곳과 달리 순찰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조금 속도를 내볼까?’

    한데 바로 그때, 화활산 깊은 곳에서 붉은색 요운(妖雲)이 나타나더니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왔다.

    이 붉은 구름은 아주 불안정했고, 쉬지 않고 요동쳤다. 그렇게 중간쯤 날아오다 갑자기 무너져 내리더니 붉은 요물 하나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치가 공교롭게도 심협에게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심협은 멈춰 선 뒤 몸의 기운을 숨기고는 그쪽을 자세히 살폈다.

    이 요물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장작개비처럼 바싹 말랐고, 얼굴에는 크고 둥그런 눈에 코가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커다란 입에는 누런 이빨이 빽빽해 새끼 원숭이처럼 몹시 추했다. 피부와 머리칼 모두 불처럼 붉었고, 등에는 붉은 날개도 한 쌍 돋아 있는 것이 불 요괴인 듯했다. 한데 한쪽 날개는 거의 뿌리까지 잘려나가 살갗만 살짝 붙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친 상태였다.

    이 작은 불 요괴의 경지는 겨우 출규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몸을 뒤집으며 튀어 올라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내달렸다.

    그때, 멀리 하늘에 두 개의 검은 빛줄기가 나타나더니 그쪽을 향해 날아왔다.

    작은 불 요괴는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두 날개에 붉은 빛을 번쩍였다. 그러자 몸 주위에 붉은 불구름이 떠올라 그를 떠받치고 다시 힘겹게 날아올랐다.

    심협은 순간 결단을 내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 요괴 옆으로 날아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금빛 한 줄기가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날아가 작은 불 요괴를 뒤덮었다. 뒤이어 심협이 살짝 들어 올리자 작은 불 요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금빛도 따라서 사라졌다.

    두 줄기 검은 빛은 매우 빨라서 얼마 후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그리고는 인간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크고 작은 한 쌍의 요괴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손에 구부러진 칼을 각각 한 자루씩 들고 있었는데, 수련 경지는 키가 작은 자는 출규 중기, 큰 자는 출규 후기였다.

    “아니! 그 화노(火奴)가 방금까지는 여기 있었는데, 어찌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지?”

    키가 작은 새 머리 요괴 병사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다 네놈이 미련한 탓이다! 출규 초기인 화노조차 제대로 못 지키다니. 그놈을 놓치면 대왕께서 네놈의 털까지 다 태워버리실 게다! 뭐해! 어서 찾지 않고!”

    키 큰 요괴 병사가 벌컥 짜증을 내자 키 작은 요괴 병사는 잔뜩 골이 나서 입을 꾹 다문 채 황급히 근처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키 큰 요괴 병사도 함께 찾아 나섰지만, 주변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작은 불 요괴는 마치 증발해버리기라도 한 듯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나는 저 앞을 찾아볼 테니, 너는 좌우 양옆을 뒤져라!”

    키 큰 요괴 병사는 그 불 요괴가 아주 신경 쓰이는지 고함을 버럭 지르고는 앞을 향해 날아갔다.

    키 작은 요괴 병사 역시 짧게 대꾸하고 왼쪽으로 날아갔다.

    두 요괴 병사가 떠난 뒤, 심협의 흐릿한 모습이 가까운 곳의 어느 커다란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는 두 요괴가 멀어져간 방향을 훑어보고 몸을 날려 멀리 날아갔다.

    곧장 20여 리를 날아간 뒤에야 그는 어느 산골짜기에 멈춰 서서 신식을 천책 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금빛 공간 안에는 그 작은 불 요괴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감히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이때, 그 앞에 금빛이 용솟음치며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금세 반투명한 금빛 사람 그림자를 이루었다. 바로 심협이었다.

    작은 불 요괴는 이 광경에 눈알을 두어 번 휘휘 굴리더니 이내 심협의 발치로 뛰어들었다.

    “소인 화삼(火三), 목숨을 구해주신 대선(大仙)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오, 내가 너를 구했는지 어찌 아느냐? 혹시 모르지, 내가 식량이 부족하여 너를 잡아와 탕을 끓여 먹으려는 걸지도.”

    심협은 작은 불 요괴의 약삭빠른 모습에 미소를 띠며 놀리듯 말했다.

    “대선께서는 신통력이 한량없으시니 저를 죽일 생각이셨다면 진즉 손을 대셨겠지요. 더구나 대선께서 제 한 목숨 구해주셨으니, 이 목숨을 대선께 드려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화삼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영리한 놈이로구나. 허나 감사할 것 없다. 너를 살려준 것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니까. 네놈의 하찮은 목숨 따위에는 관심도 없단 말이다. 내게 만족스런 답을 준다면 금방 너를 풀어주고 포상까지 해줄 것이다.”

    심협도 더는 상대를 놀리지 않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선. 무슨 일이든 물어보십시오. 소인 반드시 아는 대로 다 말씀드릴 것입니다!”

    화삼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내 조금 전에 네가 화활산 깊은 곳에서 날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너는 이 산맥의 요물이냐? 방금 그 새 머리의 두 요물은 왜 너를 추격했던 것이냐?”

    “대선께 아뢰옵니다. 소인은 원래 이곳 화활산에 살았던 화매(火魅) 일족입니다. 수년 전 한 무리의 요마들이 이 산을 차지하고 우리 화매 일족을 모조리 잡아들이고는 우리더러 매일 지폐지화(地肺之火)를 소환해 그들을 위한 법진을 제련하라고 몰아세웠지요. 우리 화매 일족은 날 때부터 불을 다루는 신통력을 지녔습니다만, 실력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 지폐지화 속에는 화독(火毒)이 담겨 있어 오랜 시간 접촉하면 중독되어 죽고 말지요. 소인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요괴 병사들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도망쳐 나왔지만, 순찰병들에게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선을 만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화삼은 마지막에 가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이었다.

    “그 요마들 중 성영대왕(聖嬰大王)이라는 자가 있나? 혹은 홍해아라거나.”

    심협의 물음에 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그 성영대왕이 바로 이 요마 떼의 우두머리인 걸요! 어린아이 모습에, 손에는 화창(火槍)을 들었는데, 실로 엄청납니다.”

    “그래, 바로 그자다. 그들은 화활산 어디에 있느냐? 이곳의 요마들 중에 성영대왕 외에 다른 강력한 요물이 더 있느냐?”

    심협이 눈을 반짝이며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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