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68화 (468/1,214)
  • 468화. 역할분담

    “그럼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남은 하나도 분명 간단하지 않을 테지만, 심협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물었다.

    “둘째는 내 여식 옥면공주에 관한 것일세. 그 아이는 당시 취경인들에게 죽임당하여 혼백이 구유(九幽)로 돌아갔다네. 시간을 따져보니 그 아이도 지금쯤 이미 윤회하여 환생했겠지. 딸아이를 되찾아올 수만 있다면 동맹을 맺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마왕은 자네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게야. 다만 마족이 강림하여 구유의 땅도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윤회의 우물도 파괴되어 누구도 환생한 종적을 추적할 수 없게 되었다더군.”

    만세호왕의 한숨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심협은 쓰게 웃었다. 과연 이 또한 거의 이루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내가 해줄 말은 이게 전부일세. 해낼 수 있을지는 심 도우의 재주에 달렸지.”

    만세호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왕 선배님, 옥면공주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당시 신선과 부처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마왕이 선도와 불가에 몸담은 이들을 증오하게 된 것 아닙니까? 호왕께서도 옥면공주의 아버지이시니 분명 원한이 있으실 터. 한데 어찌 저와 손을 잡기로 하셨습니까?”

    심협은 호왕을 동부 입구까지 배웅하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물어보았다.

    “이 늙은이는 그 고집불통 소와는 다르네. 옥면의 원한이야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겼네만, 남은 일족의 목숨 또한 중하지. 나는 그저 옥호 족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네.”

    만세호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답하고는 유유히 멀어져갔다.

    심협은 감탄한 눈으로 만세호왕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고는 동굴로 돌아와 손을 뒤집고 천책을 꺼냈다. 그러나 천장들을 굴복시키지 위해서가 아니라 천책의 잔경에 들어가 백의의 노인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안개 장벽 속에 곧 금빛 안개가 용솟음치더니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도우가 벌써 찾아오다니, 우마왕과 접촉하는 일에 갈피가 잡힌 겐가?”

    백의의 노인이 심협을 보고는 반기며 물었다.

    “이미 적뢰산으로 가 옥호족의 만세호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뢰산에서 우마왕과도 만났지요.”

    심협이 담담하게 말했다.

    “옥호족이 연맹에 합류하도록 설득했다고? 게다가 우마왕도 벌써 만났고?”

    백의의 노인은 놀라움과 기쁨에 겨워 소리치듯 물었다.

    심협은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된 일입니다. 여러 우연이 겹쳤지요. 다만 우마왕은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절대 선불의 사람들과는 손을 잡지 않겠다는군요.”

    “음, 그때 일로 우마왕이 선불과 척을 졌지. 그 틈을 좁히기는 어려울 것 같구먼. 어찌 됐든 도우의 임무는 이미 완수했으니, 여기 비단잉어 변화술이네. 잘 기억하게나.”

    백의의 노인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곧 마음을 가다듬고는 소매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앞 허공에 작은 금빛 글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바로 비단잉어로 변하는 변화술이었다.

    심협은 이 변화술을 읽고는 마음 깊이 새겼다.

    “선배님, 아직 낙담하실 것 없습니다. 만세호왕이 말하길, 두 가지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우마왕이 마음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는군요.”

    심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백의의 노인은 고개를 홱 쳐들었다. 두 눈에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놀랍도록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

    “그게 정말인가? 어떤 일들인가?”

    안개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심협은 온몸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는 이 노인의 경지를 조금 더 우러러보게 됐다.

    “사실이긴 하오나 결코 쉽게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첫째는 우마왕의 아들 홍해아를…….”

    심협은 우마왕의 응어리가 된 두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백의의 노인에게 전하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변화술을 전수해준 데 대한 보답이었고, 둘째는 혹시 이 노인이라면 그 두 가지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상대의 경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판단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덤이었다. 심협은 천책 잔권의 보유자들에게 아주 큰 경계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 도우의 일처리가 확실하구먼. 이 늙은이 감사를 표하겠네. 그러나 홍해아와 옥면공주의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으니, 내 다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논하도록 하지.”

    백의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들어 맞은편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멀리서 금빛 안개가 용솟음치더니 황의의 사내와 은갑의 사내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어인 일로 찾으셨습니까? 엇, 새로 온 어린 도우도 있군요. 설마 적뢰산 일이 결실을 맺은 겁니까?”

    황의의 사내가 심협을 보더니 물었다.

    “그렇다네. 이 도우가 이미 우마왕과 접촉했다는군. 그리고 더 나아가…….”

    백의의 노인은 그간의 정황과 우마왕을 포섭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 두 가지 일이 어렵기는 하나 우마왕을 포섭하기 위한 길이니, 두 도우에게 좋은 계책이 있거든 조언해주길 바라네.”

    백의의 노인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 옥면공주의 환생을 찾는 일에는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지만, 홍해아의 행방을 찾아봐줄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우마왕 곁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할지는 일단 행방부터 찾아낸 뒤에 다시 논의합시다.”

    황의의 사내가 생각에 잠긴 채 낮은 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놀란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마족의 근거지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니, 이 사람은 마족 안에 밀정을 심어두었거나 사람을 찾는 특별한 신통력이라도 갖고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이 상황에서도 백의의 노인과 은갑 사내가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또 한 번 동요했다.

    “옥면공주가 환생했다면 내 사람을 보내 단서를 조사할 수 있으나, 찾아내리라고는 보장하지 못합니다.”

    황의의 사내에 이어 은갑의 사내도 입을 열었다.

    “그럼 두 사람에게 부탁하겠네.”

    백의의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공수했고, 심협은 세 사람의 대화 끼어들지 않은 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세 사람은 금방 상의를 마쳤고, 백의의 노인이 심협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정보가 나오면 수고롭겠지만 우마왕 쪽에는 도우가 연락을 해야겠구먼.”

    “문제없습니다. 다만 적뢰산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마족 무리가 공격을 해왔는데, 우두머리는 태을경에 이른 검은 해골입니다. 또한 혈제법으로 휘하 요마들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지요. 만약 적뢰산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저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심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이네. 도우는 부디 자신의 안위를 중히 여기게나. 끝내 우마왕을 회유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자네만은 무사해야 하네.”

    백의의 노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심협은 허무한 기분이었다. 방금 그런 말을 꺼낸 이유는 세 사람에게서 뭔가를 좀 얻고자 함이었는데, 뜻밖에도 백의의 노인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해주었으니, 허공에 주먹질을 한 셈이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듯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좀 남았으니까요.”

    황의의 사내가 인사를 남기고 떠나가려 하자 심협이 급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어린 도우, 무슨 용건이 더 남았소?”

    황의의 사내가 돌아보았는데, 언뜻 미소를 띤 듯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것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저는 심씨이니 귀하께서는 저를 어린 도우가 아닌 심 도우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어찌 불러드려야 할지요? 진짜 성씨를 말씀하시기 꺼려진다면 별칭을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눌 터인데 지금은 영 불편하군요.”

    심협은 남몰래 눈을 흘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 세 사람 모두 내력이 대단한 사람들 같아 보였고, 마족 내부의 상황을 조사할 수 있을 정도이니 이곳 적뢰산 상황이야 당연히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신분은 조만간 드러날 터. 그러니 아예 미리 밝혀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는 언제 꿈속 세계를 떠날지 모르니 이 사람들이 성씨를 알게 된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닐 터였다.

    “심 도우의 말도 일리가 있구먼. 그 일은 늙은이가 소홀했네. 모두들 앞으로 나를 원(元) 도인이라 불러주게.”

    백의의 노인이 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그럼 나는 뇌(雷) 도인이라 부르시오.”

    황의의 사내는 웃으며 그렇게 답하고는 다음 순간 사라져버렸다.

    “화(華) 도인이오.”

    은갑 사내도 짧게 답하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뇌 도우와 화 도우 모두 성격이 괴이하긴 해도 심 도우를 무시해서 저러는 것이 아니니 너무 불쾌해하지 말게나.”

    백의의 노인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런 작은 일은 저 역시 개의치 않습니다.”

    심협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 늙은이도 바쁜 일이 좀 있으니 이만 실례하겠네.”

    백의의 노인도 말하면서 떠나려고 했다.

    “원 도우, 잠시만요.”

    심협이 다시 그를 불렀다.

    이에 원 노인은 멈춰 서더니 조금 놀란 듯 심협을 바라보았다.

    “제가 적뢰산에서 두 가지 물건을 얻었는데, 저의 실력이 미약하니 원 도우께 이 이 물건들이 안전한지를 좀 검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수가 필요하다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심협은 만세호왕에게서 얻은 옥영과와 봉인법구를 꺼냈다.

    “그저 물건 한번 검사하는 일에 보수는 필요 없네만, 지금은 내 바쁜 일이 있으니 시일이 좀 지난 뒤에야 이것들을 돌려줄 수 있을 걸세.”

    원 노인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원 도우께서 되는 대로 천천히 살펴봐주십시오.”

    심협은 법력을 운행하여 옥영과와 봉인법구를 감쌌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그다지 애를 먹지 않고 옥영과와 봉인법구를 전달할 수 있었다.

    * * *

    눈앞에 금빛이 번쩍하더니 다시 동부 안으로 되돌아온 심협의 입가에는 한 가닥 미소가 번졌다.

    그가 원 노인에게 옥영과과 봉인법구를 살펴봐달라고 한 것은 그저 구실일 뿐, 실제로는 실험을 하나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도 천책 공간에 들어가 그 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어쩌면 꿈속 세계의 물건을 천책 공간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가능하다면 더 이상 현실의 짧은 수명 때문에 근심할 필요도 없으리라.

    “가능했으면 좋겠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으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잠시 뒤, 눈을 뜬 심협은 천책의 금빛 연무대에 들어가 계속 천장을 항복시켜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어느 천장이 나타날지 모르겠군.”

    진해빈철곤을 꺼내 든 그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연무대 맞은편에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몸집의 천장이 나타났다. 짙은 눈썹에 코는 넙적했고, 머리에는 눈이 세 개 달려 있었는데, 가운데 눈은 신통하게도 하얀 빛이 반짝여 위엄이 넘쳤다. 몸에는 환하게 빛나는 갑옷을 입었고, 손에는 자주색과 푸른색 쌍편(雙鞭)을 들었는데 그 위로는 교룡이 한 마리씩 휘감겨 있었다. 기이한 이 교룡은 암수 한 쌍인 듯했고, 각각 지직거리는 자주색과 푸른색 벼락이 날름거렸다.

    심협은 눈앞의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상대는 지금까지의 천병이나 천장들과 달리 생기가 넘쳤고, 눈빛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놀랍게도 진짜 사람 같았던 것이다.

    “네가 바로 천책의 새로운 주인이냐? 일개 진선 중기 애송이로군. 이정이 왜 네놈에게 천책을 맡겼을꼬!”

    세눈박이 천장은 심협을 두어 번 훑어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그 눈길을 받은 심협은 온몸이 번갯불에 휩싸인 듯 찌릿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어쨌든 이정이 택한 이상 뭔가 뛰어난 구석이 있겠지. 내 채찍부터 받아라!”

    세눈박이 천장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자줏빛 장편(長鞭)에 굵직한 자주색 천둥번개가 떠오르면서 커다란 우렛소리가 울렸고, 연무대가 진동했다.

    심협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전력으로 황정경을 운공했다. 여섯 마리 용과 코끼리의 허상이 몸 주위로 나타나 포효하며 돌아다녔고, 진해빈철곤에서도 금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찌릿한 느낌이 대부분 사라졌고, 심협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