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67화 (467/1,214)
  • 467화. 우마왕의 아들

    체내에서 거세게 들끓던 힘이 이미 잠잠해졌기에 심협은 가부좌를 튼 채 거령신과의 대전에서 소모한 법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어서 천책을 꺼내고 그 안에 들어가 더 많은 천장들을 항복시키려 했다.

    앞서 거령신을 죽였던 전투가 치열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막상 큰 힘을 들이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의 규칙에 따르면 다음에 나오는 천장은 분명 진선기 정점일 터, 그의 지금 실력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황금승이라는 비장의 무기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심협은 다소 귀찮았지만, 일단 신식으로 상대가 누구인지를 살폈다. 그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곧장 천책을 거두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바로 만세호왕이 서 있었다.

    “선배님, 어찌 오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심협은 만세호왕을 동부 안으로 청했다.

    “심 도우의 수련 경지가 진선 중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기쁜 일일세. 축하하네.”

    만세호왕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주신 옥영과 덕분입니다.”

    심협은 자신의 경지가 올라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기에 만세호왕이 알아차린 것이 전혀 의외라 여기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심 도우는 참으로 겸손하구먼. 모두 도우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니 단번에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일세. 적뢰산에는 유향과(流香果) 나무 세 그루가 있어 5백 년마다 10여 개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네. 하지만 우리 옥호족에서 그 열매로 돌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지.”

    “한데 선배님께서 전에 이 옥영과에 수명을 연장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셨는데, 열매 한 알이면 얼마나 연장할 수 있습니까?”

    심협은 현실 세계의 자신을 떠올리며 은근히 물었다.

    “아마 3백 년쯤 될 걸세. 주된 효과는 아무래도 수련 경지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보니, 수명 연장 효과는 다소 부족하지. 혹시 수명을 연장시켜주려고 싶은 이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 이따가 사람을 시켜 두 알을 더 보내주겠네.”

    만세호왕은 조금 의아한 듯 그리 말했다.

    “적뢰산의 귀중한 보물이니 한 알을 받은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어찌 감히 더 바라겠습니까? 그저 궁금해 여쭌 것뿐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심협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만세호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더는 그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족의 습격이 빈번하여 옥호 일족은 그간 모아둔 옥영과를 반 이상 소모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했던 말은 그저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선배님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심협이 묻자 만세호왕은 피식 웃었다.

    “왜, 이 늙은이가 한담을 좀 나누러 오면 아니 되는가? 아니면 심 도우 생각에 내가 너무 늙어빠져서 나와는 말을 섞기 귀찮은 겐가?”

    “그럴 리가요. 선배님께서는 정정하셔서 젊은 사람이라도 따라갈 이가 몇 없는데, 어찌 늙었다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심협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하하하! 자, 농은 여기까지만 하고, 솔직히 말하지. 내 심 도우를 찾아온 것은 용건이 있어서라네.”

    만세호왕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귀담아 듣겠습니다.”

    심협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마족들이 세상에 내려와 천지의 생명들, 특히 인간족과 요족을 버러지처럼 여기며 마음대로 살육하고 있네. 심 도우는 사방을 두루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이 많으니 분명 잘 알고 있을 테지.”

    “분명 현실이 그러하지요.”

    심협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옥호 일족도 마족의 괴롭힘을 실컷 겪었네. 그들은 옥호족 사람들을 도륙했을 뿐만 아니라 가증스럽게도 그들을 사악한 힘으로 유혹하여 마도에 빠지게 하였다네.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야!”

    만세호왕의 눈에 원한 어린 매서운 빛이 스쳤다.

    “호왕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자 하십니까? 솔직히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심협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에둘러 말하지 않겠네. 이 늙은이는 심 도우에게 우리 일족의 객경 장로를 맡아 달라 청하고 싶은데, 도우의 의중은 어떠한가?”

    만세호왕은 이렇게 말했다.

    “객경 장로요? 호왕의 말씀은 정말 뜻밖이로군요. 우리는 이미 동맹을 맺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과 요족은 줄곧 대립해 왔사온데, 제가 객경 장로를 맡으면 일족의 비난을 살까 두렵지 않으십니까?”

    심협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고 애매하게 답했다.

    “심 도우는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여 훗날 한량없는 성취를 이룰 것이네. 그러니 이 늙은이가 심 도우와 친해지고 싶은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인간과 요족의 대립이야 맞는 말이네만, 지금은 마족이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대적에 맞서려면 서로 손을 잡아야 마땅하지. 게다가 심 도우가 여러 차례 우리 일족을 도운 덕에 일족 사람들도 자네를 아주 높이 평가하는데 어찌 비난이 있겠는가.”

    심협은 웃으며 말하는 만세호왕을 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 늙은 여우는 우마왕보다 사리에 훨씬 밝았다. 우마왕은 만세호왕과 관계를 풀어보려 애를 쓰고 있으니, 이 늙은 여우를 통해 우마왕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없던 심협을 보며 만세호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 늙은이도 심 도우에게 대가 없이 일을 시킬 생각은 없네.”

    만세호왕이 탁자 위로 손을 슬쩍 휘두르자 세 개의 옥합이 나타나더니 저절로 열렸다.

    첫 번째 옥합에는 노란 부적이 들어 있었는데, 노란색 둥근 광채들이 가리고 있어 위에 그려진 부적 문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옥합은 백옥 선과로, 바로 옥영과였다.

    그리고 세 번째 옥합 한에는 주먹만 한 하얗고 둥근 공이 있었다. 그 위에는 봉인 부적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어 봉인 법기 같아 보였다. 공 안에는 자그마한 자줏빛 불꽃들이 떠다녔는데, 바로 만세호왕이 시전했던 자유골화였다.

    “이 부적은 나의 천호미신부(天狐迷神符)일세. 내 여식인 옥면공주가 당시 상고의 방법으로 직접 만든 것인데, 미혼(迷魂) 효과가 강력하기 이를 데 없지. 여러 번 사용할 수 있고, 보통 부적과 달리 사용하는 자의 수련 경지가 높을수록 위력도 더 크다네. 이 천호미신부는 두어 번밖에 쓰지 않았으니 최소 일고여덟 번은 더 쓸 수 있을 게야.”

    만세호왕은 심협이 묻기 전에 설명했다.

    심협은 잠시 넋이 나간 눈으로 노란 부적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머리는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옥영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마지막으로 이 봉인법구(封印法球) 안에는 나의 자유골화 일부를 봉인해두었네. 심 도우도 이 골화에 관심이 있을 테지. 공 안의 자유골화가 적다고 불평하지 말게나. 그건 봉인을 해두어서 그런 것일 뿐, 봉인을 풀면 결코 적지 않다네.”

    만세호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심협은 만세호왕의 예리함에 내심 놀랐다. 그는 홍련업화 때문에 앞서 자유골화를 처음 보았을 때 눈여겨보았는데,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상대가 눈치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호왕께서 저를 이리 높이 사시니 심모가 더 이상 사양한다면 너무 몰인정해 보이겠지요. 다만 심모에게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적뢰산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심협이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괜찮네. 이것은 전음지연(傳音紙鳶)일세. 앞으로 우리 일족이 위기에 처하면 늙은이가 이 부적으로 도우에게 알려주겠네. 심 도우의 경지는 이미 진선 중기에 이르렀으니 어지간히 먼 곳에 있지 않은 이상 금방 올 수 있지 않겠나.”

    만세호왕은 영광(靈光)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는 푸른 부적을 하나 꺼내 심협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적을 챙겼다.

    만세호왕은 이야기가 잘 풀린 듯하자 흡족해하며 돌아가려 했다.

    심협이 그런 호왕을 재빨리 불러 세웠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게, 심 도우.”

    만세호왕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솔직히 아뢰자면 이번에 심모가 평천대성을 찾은 것은 대성과 손을 잡고 함께 마족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심협이 말을 꺼냈다.

    “심 도우가 이번에 적뢰산과 동맹을 맺고자 한 진짜 이유는 우마왕이었군. 하긴, 그 소가 여색을 밝히긴 하나 실력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우리 작디작은 옥호족에 비할 것이 아니지.”

    만세호왕은 문득 어찌 된 일인지 깨닫고 냉담하게 말했다.

    “호왕 선배님. 저는 절대 옥호족을 업신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심협은 만세호왕의 불쾌함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해명하려 했다.

    “심 도우는 해명할 것 없네. 자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든, 도우가 우리 일족을 여러 차례 도와준 것은 사실이니 말이야. 자네에 대한 늙은이의 감사는 변하지 않을 것이네.”

    만세호왕은 손을 들어 심협의 말을 막으며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심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갔군. 그 소 이야기를 좀 더 하지. 힘을 합쳐 마족을 막아내는 것이야 좋은 일이니 우마왕 그놈이 거절할 리 없지만, 그는 줄곧 선도(仙道)와 불가에 몸담은 사람들을 적대시 해왔지. 게다가 성질머리도 고집불통이라 그에게 청하기란 순탄치 않을 터인데?”

    만세호왕이 다시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호왕께서는 실로 영명하십니다. 짐작하신 것에 한 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평천대성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호왕께서는 그와 오랜 세월 알고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호왕께 조언을 몇 가지 구하고자 합니다. 평천대성의 마음을 돌릴 방도가 있을는지요.”

    심협이 공수하며 말했다.

    “우마왕은 고집이 세서 일단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바꿀 수 없다네. 심 도우의 이번 걸음은 아무래도 소득이 없을 듯하군.”

    만세호왕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결정을 바꿀 방법은 정녕 없는 것입니까?”

    심협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음, 우마왕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있기는 하네.”

    만세호왕은 수염을 꼬며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호왕께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심협이 눈을 반짝이며 공손하게 공수했다.

    “다만 그 두 가지 일 모두 몹시 어려워 거의 해내기가 힘들 걸세. 그래도 심 도우가 알고 싶어 하니 내 알려주도록 하지.”

    만세호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심협을 흘끗 보고는 탄식했다.

    “첫째는 우마왕의 아들 홍해아라네. 녀석은 포악하고 괴팍해서 당시 취경인들을 곤란하게 만든 탓에 관세음보살에게 선재동자(善財童子)로 거두어졌지. 치우가 세상에 나온 뒤 마족 대군이 낙가산(洛伽山)을 침공하자 천성이 포악했던 홍해아는 마족에게 의탁하여 지금은 마족의 대장(大將)이 되었다네.

    우마왕은 그의 아들이 마수에서 벗어나길 몹시도 원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족은 막강하기 이를 데 없고, 홍해아는 머무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그도 어쩔 수가 없네.”

    만세호왕의 깊은 탄식을 들으며 심협의 낯빛도 한층 어두워졌다.

    호왕의 말대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족들이 천하를 활보하고 있으니 그들의 손에서 홍해아를 구해내기가 어찌 쉽겠는가? 더구나 홍해아는 스스로 마족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니 더욱 어려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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