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64화 (464/1,214)
  • 464화. 공주의 죽음

    만세호왕은 우마왕을 외면한 채 몸을 돌려 심협에게 다가왔다.

    “심 도우, 도움에 감사하네. 옥호 일족은 자네의 은덕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걸세.”

    만세호왕이 진중한 얼굴로 포권했다.

    “과찬이십니다. 평천대왕께서 제때 와주신 덕분이지요.”

    심협이 겸손하게 말하고는 우마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금승이 금빛과 함께 멀리서 날아와 번쩍하고 그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우마왕은 심협을 위아래로 두어 번 훑어보았는데, 눈빛이 다소 기이했다.

    만세호왕은 이번에도 우마왕을 외면한 채 심협을 마운동으로 안내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우마왕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곧 호족 병사들이 몰려왔는데, 이들은 우마왕에게 더없이 공손해, 푸른 옷의 여인과 은갑 청년을 필두로 앞으로 나와 감사를 표했다.

    “예의 차릴 것 없네. 적뢰산과 나 대력우마왕이 어디 남인가? 이 노우(老牛)는 절대로 마족들이 이곳에서 함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걸세.”

    우마왕이 정색하고 말하자 호족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호했다.

    “평천대성께서 지켜주시니 마족들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은갑 청년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참, 방금 그 인간족 수사는 누구인가? 인간 수사를 싫어하시던 호왕께서 그자는 특별히 눈여겨보시는 듯하던데…….”

    우마왕의 물음에 은갑청년에게 답했다.

    “심 도우 말씀이군요. 그는 우리 적뢰산과 동맹을 맺고자 찾아온 인간족 수사입니다. 부왕께서는 이미 응낙하셨고요.”

    “동맹을 맺는다고?”

    우마왕은 어째서인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 * *

    마운동 안의 대청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만세호왕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심 도우, 자네는 뒤에 나타난 그 마족들과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얼마 전 흑랑산에서 그자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뿐,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심협은 흑랑산에서 마족들과 조우한 과정을 이야기했으나, 천책이 검은 해골의 주변에 감돌던 검은 기운을 거둬들였던 일만은 비밀로 했다.

    “그리 된 것이로군. 마족에는 어떤 혈제법(血祭法)이 있어서 빠른 속도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고, 몸을 반마(半魔)의 몸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 소문이 진짜일 줄은 몰랐네.”

    만세호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엄청난 속도의 자가 치유 능력이 실로 까다롭긴 합니다만, 머리나 단전을 공격한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자가 치유 능력도 소용이 없지요.”

    심협이 말했다.

    “좋은 방법이로구먼.”

    만세호왕이 눈을 반짝였다.

    심협은 그런 만세호왕을 쳐다보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으나, 호왕은 그 낌새를 눈치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내게 우마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지? 그 늙은 소는 바깥에 있으니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호왕 선배님.”

    심협은 기쁜 얼굴로 만세호왕에게 포권하고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득 만세호왕이 심협을 불러세웠다.

    “심 도우, 잠시만 기다리게.”

    “호왕께서는 용무가 더 있으십니까?”

    심협이 발걸음을 멈추자 만세호왕은 청옥 상자를 하나 꺼내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두고 열었다. 그 안에는 복숭아 모양의 백옥 영과(靈果)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진한 향기가 풍겼다. 가닥가닥 실오라기 같은 영기를 품고 있어 범상한 물건이 아닌 듯했다.

    “호왕 선배님, 이것은……?”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 옥영과(玉靈果)는 적뢰산의 특산품인 영물이라네. 수련 경지를 크게 높여주고, 수명을 500년이나 늘릴 수 있지. 인간족 수사에게도 도움이 될 게야. 심 공자는 두 차례나 호족을 도와주었으니, 이 늙은이가 조금이나마 보답할 길이 지금은 이것뿐일세.”

    만세호왕이 청옥 상자를 밀어 건넸다.

    “이런 귀한 물건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심모가 나서서 호족을 도운 것은 이런 선과(仙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번 전투에서 많은 옥호족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사오니, 호왕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내리심이 좋을 듯합니다.”

    심협은 옥영과를 보며 가슴이 크게 요동쳤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 선과가 귀하긴 하나 우리 호족의 안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호족은 늘 은혜를 입고도 갚는 법이 없었으니, 심 도우가 기어이 받지 않는다면 우리 옥호 일족을 업신여기는 것일세.”

    만세호왕의 조금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거절도 결례인 듯하군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심협도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옥영과를 받아 챙긴 뒤,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향했다.

    그가 막 마운동을 나서자마자 우마왕이 먼저 다가왔다.

    “평천대성, 저는 심협이라합니다. 대성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사온데, 오늘 이리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심협은 황급히 그를 맞았다.

    “지나친 겸사요. 도우가 몇 번이나 나서서 옥호 일족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내 이미 사람들에게 들었소. 이 노우가 정말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와하하!”

    우마왕은 커다란 손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그 마족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적(公敵)이니 그들의 만행을 좌시할 수는 없지요.”

    심협이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옳은 말이오. 심 도우의 의협심이 그리 높다니, 이 노우에게 좋은 벗이 생긴 듯하오. 내 잠시 호왕과 논의할 것이 있으니 오늘은 먼저 실례하겠소.”

    우마왕이 포권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심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우마왕은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심협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런 심협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다.

    “심 선배님, 오늘 우리 일족을 위해 거듭 대전을 치르신 점 감사드립니다. 쉴 곳을 마련해두었으니 제가 안내를 해드리지요.”

    그녀는 바로 려추였다.

    “좋지요. 그럼 부탁드리리다.”

    심협은 실제로 조금 피곤하기도 했고, 우마왕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마냥 기다리기도 마땅치 않아 려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려추는 심협을 적뢰산 깊은 곳의 외지고 조용한 동부로 안내했다.

    그곳은 영기가 상당히 짙었고, 동부 밖으로 폭포가 흘러 더없이 아름답고 고요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동부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려추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주 좋군요. 여기로 하지요.”

    심협은 이곳이 실로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근처에 사람을 배치해두었으니 시키실 일이 있으면 그저 분부만 하시면 됩니다.”

    려추는 안도하며 더는 귀찮게 굴지 않고 떠나가려 했다.

    “려추 도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심협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심 오라버니께서는 무슨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려추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대력우마왕에 대해 묻고 싶어 그럽니다. 보아하니 옥호 일족과 꽤 가까운 사이인 듯한데, 만세호왕 선배님께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좀 모진 것 같았소.”

    “대력우마왕은 우리 호족의 부마입니다. 부왕의 맏딸은 옥면공주라는 이였는데, 우마왕의 첩으로 시집을 갔지요. 허나 천 년 전, 우마왕 때문에 강적을 건드리는 바람에 옥면공주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부왕께서는 대력우마왕을 몹시도 미워하시고요.”

    려추의 설명에 심협은 천책 잔경의 백의의 노인 등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확인하듯 물었다.

    “감히 누가 있어 평천대성의 처첩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불문의 사람이라는 말은 들었지만요.”

    “불문이라……. 알겠소.”

    심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의 노인 등에 따르면, 옥면공주는 저팔계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불문과도 관련이 있는 셈이다.

    려추는 심협이 더 묻고 싶은 게 없음을 확인하고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심협은 동부에 가부좌를 튼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비로소 눈을 감고 황정경을 운공하며 법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적뢰산에서 수백 리 떨어진 어느 깊고 어두운 산골짜기. 그곳에는 놀랍게도 짙푸른 빛깔의 거대한 법진이 10여 개 설치되어 있었다. 법진들은 빠른 속도로 운행하며 줄줄이 녹색 빛을 발했다.

    검은 해골과 마 주인장, 검은 호랑이 요물 등을 비롯해 앞서 적뢰산을 공격했던 마귀 떼가 모두 이곳에 있었는데, 하나 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적잖은 요마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빌어먹을! 결정적인 순간에 그 늙은 소가 나타날 줄이야! 다행히 존자님께서 빈틈없이 헤아리시어 이곳에 을목선진(乙木仙陣)을 미리 쳐놓고 제때 모두를 전송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번에 우리 모두 그 파초선 아래 죽고 말았을 겁니다.”

    마 주인장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 되어 욕을 한바탕 퍼붓고는 검은 해골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다른 요마들도 이구동성으로 검은 해골의 영명함과 그의 선견지명을 칭송했다.

    그들보다 앞서 적뢰산을 공격했던 자치와 대머리 사내가 다가왔다. 두 사람도 검은 해골의 수하였던 것이다.

    “옥호 일족과 우마왕은 관계가 아주 친밀하다. 적뢰산이 습격을 당했는데 우마왕이 어찌 좌시하고만 있겠느냐. 애초에 너희에게 적뢰산을 공격하도록 지시한 것도 우마왕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느니라.”

    해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여기 존자님의 생각은 깊고 원대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검은 호랑이 요물은 단 한 수에 심협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체면이 잔뜩 구겨졌던 터라 검은 해골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리며 물었다.

    “너희는 일단 여기서 잠시 쉬어라. 내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마치기만 하면 분명 우마왕도 얌전히 우리 분부대로 따를 것이다.”

    검은 해골이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보고 다른 요마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마운동 동부 안. 심협의 온몸에는 금빛이 감돌았고, 천지 영기가 끊임없이 몰려들어 앞서 소모한 법력이 금세 회복되었다.

    그가 이어서 수련 경지를 공고히 다지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심협은 신식을 뻗어보고는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거대한 체구의 우마왕이 서 있었다.

    “평천대성이셨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심형은 이리 예의 차릴 필요 없소. 우리 요족은 이런 번잡한 예절을 싫어한다오. 만약 나를 중히 여긴다면 그냥 노우(老牛)라 부르면 되오. 하하하!”

    우마왕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아우, 염치없지만 우(牛)형이라 부르도록 하지요.”

    심협은 요족의 성격을 알기에 고집을 부리지 않고 같이 웃으며 대꾸했다.

    우마왕은 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심협의 됨됨이도 대범하여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한데 우형께서는 어인 일로 이 아우를 찾아오셨습니까?”

    심협은 우마왕을 탁자 앞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이 노우와 호족의 관계는 심 아우도 알고 있을 테지?”

    우마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사람들에게 조금 듣기는 했습니다.”

    심협은 사실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는 한순간의 착오로 큰 적을 불러들여 옥면을 처참히 죽게 했다네. 이후로 줄곧 마음에 가책을 느껴왔고, 호족에게 마음의 빚을 갚으려 애쓰고 있지. 허나 심 아우도 보았듯이, 만세호왕께서는 내게 매우 냉담하시네. 심 아우는 호왕의 귀한 손님이니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부탁이니 나 대신 좋은 말을 좀 해주게. 이 숙원을 풀어준다면 이 노우, 감사하기 그지없겠네.”

    우마왕이 더없이 진중한 태도로 포권을 해오자 심협도 정중히 답했다.

    “이 아우, 당연히 거절할 수 없지요. 기회를 보아 반드시 관계를 풀어볼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는 호왕께서도 우형에게 겉으로는 비록 싸늘하시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인정하시는 듯했습니다.”

    “정말인가?”

    우마왕은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아우는 그렇다고 자신합니다. 앞서 우형이 오셨을 때 호왕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다가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제가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노우도 그러길 바라네.”

    우마왕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