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60화 (460/1,214)
  • 460화. 만세호왕(萬歲狐王)

    소옥은 초롱초롱하고 커다란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곧장 따라나서려 했다. 반면 붉은 치마의 여인은 다소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께서 구해주신 은혜, 이 후배가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구명지은을 입은 몸으로 이런 의심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선배님의 신분을 모르는 채로 선배님을 모시고 적뢰산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후배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지극히 옳은 말씀이오. 나는 심협이라 합니다. 방촌산 제자이지요. 다만 지금 제게는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믿고 안 믿고는 두 분의 몫입니다.”

    심협의 말에 붉은 치마의 여인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이 후배는 영광스럽게도 방촌산의 황정경 공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그 공법을 펼치실 수 있다면 신분은 증명되는 셈이겠지요.”

    심협은 내심 안도하며 웃었다. 지살칠십이변이나 근두운 같은 것을 시전해보라고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랬더라면 그로서는 실제로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소.”

    심협은 짧게 답한 뒤 곧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그러자 곧바로 우렁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선배님께서는 과연 방촌산 제자시로군요. 후배는 려추(儷秋)라 합니다.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붉은 치마의 여인은 만복(*萬福: 옛날 부녀자들의 인사)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옆에 있던 소옥도 따라서 예를 갖추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먼저 적뢰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제가 둔술로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한데 만세호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심협이 물었다.

    “우리 일족 사람들은 적뢰산에 있는 열아홉 개의 여우굴로 흩어졌는데, 부왕께서는 대부분의 일족을 이끌고 마운동에 머물며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곧장 마운동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려추가 방향을 일러주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바로 출발하지요. 제 팔을 꽉 잡으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양팔을 쭉 뻗자, 두 여인이 그의 팔을 하나씩 꽉 붙잡았다. 그리고 이내 진시천리의 신통력이 발휘되자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적뢰산 마운동 밖. 아비규환의 소음이 하늘을 뒤흔들었고 숲속은 온통 불바다였다.

    숲의 상공에는 등에 날개가 돋은 요마 수백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춤추듯 날아다녔다. 이들은 하나같이 손에 활을 쥔 채 산 중턱의 동부를 향해 깃털 달린 화살을 연거푸 쏘아댔다.

    이 화살에는 많은 법력이 맺혀 있어서, 하나하나가 땅에 꽂힐 때마다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진홍색 화염까지 솟구쳐 숲은 더욱 빠르게 불타올랐다.

    호수와 바다를 이룬 불길은 반쯤 포위하는 기세로 산꼭대기를 향해 이글거리며 타올라 산중턱의 마운동까지는 백 장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피부가 거칠고 살갗이 두꺼워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천의 요마들이 그 불바다 속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위를 향해 돌격했다.

    옥호 일족은 산 아래 골짜기 입구와 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배치한 이중 방어선이 이미 모두 뚫린 상태라 이 요마들을 그리 오랫동안 막을 수 없었다.

    천여 명의 호족이 패퇴를 거듭하며 결국 마운동 앞까지 물러났다.

    동굴 앞 광장에는 얼음결정으로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여장(*女墻: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 위에 세운 구조물)이 절벽 아래에서부터 전달되는 열기를 막아냈지만,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화살들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얼음결정으로 만든 높은 장벽 뒤에는 비단옷에 백발홍안의 노인이 한 손에는 주목 지팡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북두칠성검(北斗七星劍)을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앞에 꿇어앉은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왕, 소자 죽고 싶지 않사옵니다. 살고 싶사옵니다! 마족에게 투항하시지요. 마화되기는 하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지 않사옵니까. 부왕!”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청년은 백발노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거듭 애원했다.

    백발의 노인, 만세호왕은 눈앞의 청년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이 아들에게서는 자신과 닮은 점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왕은 곧 찌푸린 미간을 펴고 손가락으로 손에 든 칼집을 가볍게 밀었다.

    쉬익 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리며 차가운 빛이 한 줄기 번쩍였다. 그리고 청년의 머리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사방으로 튄 피가 호왕의 새하얀 옷에 점점이 붉은 반점을 물들였다. 한편으로는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하얀 설원에 피어난 겨울 매화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불효막심한 놈이 마족과 몰래 결탁하여 우리 적뢰산을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만세호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그 자리에 모인 호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탁록 전투 당시, 우리의 먼 조상들께서 직접 참전하시어 마족과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셨다. 한데 후손으로서 무슨 낯으로 마족과 함께 어울리겠는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뿐이다!”

    만세호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뿐입니다!”

    한목소리로 호응하는 호족들의 외침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그때, 높은 하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뿐이라…… 그것 참 멋지구나, 늙은 여우야! 범이 사납다고는 하나 제 새끼는 먹지 않는 법. 한데 너는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으니 우리 같은 요마들보다 훨씬 지독하구나. 하하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머리는 사자에 몸은 인간이요, 등에는 날개가 달린, 검푸른 갑주를 입은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그는 손에 검푸른 장창을 든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자색 옷을 입은 요염한 용모의 여인과 주름 가득한 얼굴 아래 검붉은 비늘갑옷을 입은 대머리 사내가 그의 좌우에서 뒤따랐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속히 와서 죽음을 맞으라!”

    만세호왕은 경멸어린 눈길로 상대를 흘끗 보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흥! 늙은 여우가 잘도 큰소리를 치는구나! 내 일격을 받아라!”

    대머리 사내가 벌컥 성을 내며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며 크게 날아올랐다. 이어서 그가 주름 가득한 얼굴을 갑자기 펴자, 땅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돋은, 커다랗고 시뻘건 아가리가 솟구쳐 마운동 쪽을 향해 포효했다.

    그 거대한 입에서 황토색 광채가 번쩍이며 시커먼 진흙이 솟구쳐 나와 마치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호족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몰려왔다.

    “부왕, 소녀가 맡겠습니다.”

    만세호왕보다 한 발 앞서 물빛 옷을 임은 아리따운 여인이 성큼 나서며 손을 들어 결인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푸른색의 커다란 여우꼬리 여섯 개가 뻗어 나와 허공을 한 차례 휘저었다.

    꼬리 앞부분의 허공에는 곧 푸른 빛이 맺히면서 거대한 장벽으로 변해 시커먼 진흙더미를 가로막았다.

    온 하늘을 뒤덮을 듯한 진흙과 돌 더미가 장벽과 충돌하면서 연달아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장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 위에 푸른 빛이 번득이자 진흙과 돌 더미가 잇달아 뒤로 물러났다.

    흙탕물은 숲으로 세차게 쏟아져 내려 수백 마리의 요마들을 집어삼킨 뒤, 순식간에 굳었다. 이에 요마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조각이 되었다.

    물빛 옷의 여인이 재빨리 손목을 돌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푸른 장검 한 자루가 나타나 대머리 사내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대머리 사내도 성큼 나서며 맞섰고, 두 사람은 이내 한데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만세호왕 뒤에서 호리호리한 체격에 은빛 갑옷을 입은 청년이 걸어 나오더니 손에 든 은창으로 답운수 뒤에 있는 자색 옷의 여인을 가리켰다.

    “자치(紫雉), 나와 싸워볼 테냐?”

    “공자님께서 청하시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어요? 호호호!”

    자색 옷 여인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몸을 날렸고,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기를 맞부딪치며 싸움을 벌였다.

    만세호왕은 저 아래, 이미 코앞까지 몰려온 요마들을 보고는 뒤에 선 일족에게 말했다.

    “적들을 전멸시키고 우리 옥호족의 땅을 보호하라!”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답운수를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옥호족은 너도나도 무기를 집어 들고 절벽 가장자리로 가서 포효하며 그 아래 요마들을 향해 돌격해갔다.

    “위풍당당하신 옥호 일족의 호왕께서 이때까지도 가면이나 내보이시다니, 재미없지 아니한가? 하하하!”

    답운수가 허공을 사이에 두고 조롱하듯 외쳤다.

    만세호왕은 아랑곳 않고 손 가는 대로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입고 있던 비단옷이 사라지고 눈보다도 더 하얀 옷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용모 또한 비범할 정도로 영준해졌다. 다만 머리칼만은 여전히 백발이었다.

    그는 몸을 솟구쳐 높이 하늘로 날아올라 답운수와 마주보고 섰다. 그의 새하얀 옷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선인의 자태와도 같았다.

    “사실 나는 너희 옥호 일족이 투항하길 결코 바라지 않는다. 네놈들의 그 미끈한 인간족 같은 모습이 가장 눈에 거슬리거든. 멀쩡한 요족의 모습이 아니라 온종일 꾸역꾸역 인간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정말 역겨워!”

    답운수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만세호왕은 아예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저 한 손에 검자루를 쥔 채 싸늘한 눈으로 답운수를 노려보며 몸에서 매서운 한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답운수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손에 든 장창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닥가닥 검은 마기가 몸 밖으로 뿜어져 나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그의 온몸을 감쌌다. 심지어 장창에도 실오라기 같은 검은 안개가 감겨 올라가 창끝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났다.

    등에 달린 두 날개가 펄럭이자 옆에서 검은 돌풍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생겨났고, 그 순간 답운수가 만세호왕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검은 장창을 불쑥 내찔렀다. 창끝에 맺힌 검은 화염이 순간 미친 듯이 솟구쳐 나와 검은 장룡(長龍)이 되어 만세호왕에게 달려들었다.

    호왕이 한 걸음 내딛자 그의 장검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몸을 떠나 새하얀 검광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고, 구름 속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거대한 고드름이 질풍과 폭우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검은 장룡은 고드름에 파묻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여전히 겹겹이 폭우를 뚫고 지나 만세호왕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검은 장룡의 머리가 다시 뭉쳐지면서 입을 쩍 벌리고 만세호왕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만세호왕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몸의 반을 검은 장룡에게 물어 뜯겼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모락모락 하얀 연무가 솟아났다. 남은 몸뚱이 반쪽도 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거의 동시에 답운수 뒤에 거센 바람이 일더니, 북두칠성검이 검광으로 변하여 순식간에 뒷목으로 파고들었다. 언제 환술을 썼는지, 만세호왕이 모습을 감추고 기척 없이 기습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답운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등 뒤의 날개를 활짝 펼쳐 마치 두 개의 방패처럼 뒷목을 보호했을 뿐이었다.

    챙!

    답운수의 날개에 꽂힌 북두칠성검은 마치 쇳덩이를 두들긴 것처럼 튕겨 나왔다.

    만세호왕은 그제야 답운수의 깃털에 금속처럼 새카만 광택이 감도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화된 뒤의 이점을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게다. 너와 나는 똑같이 진선 후기의 경지이나 지금의 너는 이미 나의 적수가 아니란 말이다! 하하하!”

    답운수는 호왕을 등진 채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만세호왕은 눈빛이 살짝 굳어졌으나, 다음 순간 그의 장검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면서 하얀 한기가 검신을 타고 세차게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답운수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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