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추문(推問)
견서는 대처하기가 점점 힘에 부치자 두려움에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그는 손에 든 비륜 두 개를 심협에게 집어던졌다. 이 비륜들은 공중에서 둘레가 1장쯤 되는 거대한 두 개의 광륜(光輪)으로 변하더니,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며 기습했다. 그러나 정작 견서의 그림자는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심협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진해빈철곤을 크게 내리쳤다. 그러자 사방을 뒤덮은 금빛 곤영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하면서 철곤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하나하나 떨어져 내렸다.
금빛 곤영들이 겹겹이 내리치고 충격이 연이어 떨어져 내리면서 길이가 천 장이나 되는 거대한 기둥을 이루더니, 두 비륜을 그대로 튕겨내고는 쏜살같이 나아가 견서를 따라잡았다.
견서의 두 날개가 곤영의 금빛에 말려들어가면서 한순간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꽈광!
견서는 엄청난 압력에 마치 운석처럼 채석진 바깥에 추락했고, 그곳에는 깊이가 몇 장에 이르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심협은 상대가 일어서기도 전에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기다란 금빛 밧줄이 뱀처럼 굽이쳐 나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도록 그를 단단히 옭아맸다.
“간도 큰 놈이로군! 감히 우리에게 맞서다니, 네가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깊은 구덩이 속에서 견서가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심협은 슬쩍 눈썹을 찌푸리고는 손을 휘둘러 견서를 끌어낸 뒤, 그를 끌고 다시 삼진원으로 날아 돌아갔다.
망구와 중년 사내는 견서가 사로잡힌 것을 보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중년 사내가 한눈을 판 틈에 붉은 치마의 여인이 두 장검을 엇갈려 찔렀다. 장검이 동시에 상대의 명치를 관통하며 핏줄기가 솟구쳐 나왔다.
“어서 물러나십시오!”
이를 본 심협이 낮게 외쳤고, 붉은 치마의 여인은 반사적으로 장검을 놓고 멀찍이 물러났다.
장검에 관통당한 중년 사내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새카만 피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 피는 부식성이 엄청나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쌍검을 녹여 부러뜨렸다. 그녀도 제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여인은 심협을 향해 포권을 하며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를 전했다.
심협은 대충 대답을 하고는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흘끗 보며 웃었다.
“망구 도우, 어딜 가시오? 일단 뭐라도 좀 먹고 가지 그러오?”
그러더니 그는 손을 휘둘러 고깃덩이를 망구에게 던져주었다. 앞서 망구가 주었으나 먹는 척하며 숨겨두었던 시커먼 고깃덩이였다.
“이 모든 게 요마들의 핍박에 못 이겨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개과천선하여 선배님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망구는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그대로 꿇어앉아 용서를 빌었다.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한다면 목숨을 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소.”
심협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는데, 망구 입장에서는 화를 내는 것보다 더욱 두려웠다.
“예, 예. 조금도 숨김없이, 아는 바는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망구가 거듭 말했다.
“당신네들이 이 어린 여우를 잡은 것은 만세호왕이 적뢰산을 떠나도록 유인하기 위함이었소?”
“그렇습니다. 이 옥호 일족은 우마왕의 도움에 기대어 줄곧 마족에게 투항하려 하지 않고 적뢰산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족도 그들이 숨어 있는 진짜 동굴을 찾을 수 없어 이런 하책을 내놓게 된 것이지요.”
망구가 즉시 답했다.
“그대가 나오기 전에 적뢰산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망구의 대답에 심협은 고개를 돌려 붉은 치마의 여인에게 물었다.
“이미 마족이 요괴들을 이끌고 포위했습니다. 허나 한동안 공격하지 않았지요. 부왕께서 산을 떠나시기를 기다린 것일 겝니다.”
붉은 치마의 여인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호왕을 유인해 산을 떠나게 한 뒤 금망대진으로 가둬두고 적뢰산 쪽이 일단락되면 홀로 남은 만세호왕을 처리하려는 계획이었군.”
심협이 정확히 짚어내며 힐끗 쳐다보자 망구는 겸연쩍게 웃었다.
“호왕이 속지 않았으니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를 본 견서가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이를 갈며 버럭 성을 냈다.
“망구! 이 쥐새끼 같은 놈! 네가 죽는 길을 택하는구나!”
“반짝이는 진주가 어둠 속에 버려진 것처럼 예전에는 네놈들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 아니더냐! 이제 심 선배님께 구원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너희 요마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서지 않을 것이다!”
망구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장군처럼 외쳐댔다.
심협은 망구의 뻔뻔함에 탄복하는 한편 이 상황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몇 마디 말로 자신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시키다니, 정말이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이번에 적뢰산을 포위 공격하는 데 앞장선 게 누구요?”
심협이 물었다.
“마(魔)에 빠진 답운수 한 마리입니다. 수만에 이르는 요마들을 거느렸고, 그 수하에는 이 들개 외에 자줏빛 꿩와 지렁이도 있었습니다.”
망구가 재빨리 대답했다.
“답운수라……. 그 경지는 어느 정도요? 주의할 만한 특징이 있소?”
심협의 이어진 물음에 망구가 막 입을 떼려는데, 옆에 있던 견서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죽어라!”
다음 순간, 망구의 미간에 갑자기 금제 표시가 떠오르더니 머리가 마치 잘 익은 수박마냥 터져 버렸다. 견서는 어렵사리 법력을 움직여 망구의 몸에 심어든 금제를 작동시킨 것이다. 견서의 법력은 금세 황금승에 흡수되었지만,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협은 이를 보고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견서 곁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네가 저자를 죽이면 이제 너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잖으냐?”
“흥! 내게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견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 다행이군. 나는 너 같은 강골들을 좋아하거든.”
심협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입술 한 쪽을 말아 올렸는데, 그 모습이 견서에게는 섬뜩해 보여 간담이 서늘해졌다.
“제천대성 손오공에게 보물이 하나 있었지.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것인데 알고 있겠지? 내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 있다. 자, 이걸 네 귓구멍에 넣어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협은 진해빈철곤을 쥔 채 말했다.
“어쨌거나 죽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그딴 협박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좋아, 배짱이 있구나.”
심협은 그렇게 감탄한 듯 갈채를 보내면서도 진해빈철곤을 바늘 모양으로 작게 줄인 뒤, 견서의 귓구멍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견서는 귓속이 간지러워 참지 못하고 귀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귓속의 바늘이 갑자기 두 배 이상 길고 굵어졌다.
“네, 네놈……. 으윽!”
견서가 호통을 치려는 순간, 전해빈철곤은 더욱 굵어져 그의 귓구멍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견서는 고통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칼로 배를 가르든 도끼로 팔을 자르든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귓속 연약한 부분의 미세한 변화들은 단순한 고통을 뛰어넘어 끔찍한 두려움을 몰고 왔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한 답 외에는 꼼짝하지 마라! 입도 뻥끗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 진해빈철곤은 한 토막씩 더 자라날 것이다.”
“감히 이 몸에게…… 끄아악! 그, 그만!”
또다시 큰소리를 치려던 견서는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귓속의 진해빈철곤이 이미 엄지만큼 굵어져 그의 귓구멍을 억지로 벌린 것이다.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허나 이 진해빈철곤이 네 머리뼈를 조금씩 짓이겨 부수면 어떻게 될까? 그럼 난 네 머리 뚜껑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네놈의 신혼을 뽑아 천년 불멸의 혼등(魂燈)을 켜서 옥호 일족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너를 아주 잘 돌봐주겠지. 자칫 실수로라도 네가 윤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심협은 마치 아침 인사를 건네기라도 하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고, 이에 더욱 두려움을 느낀 견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본래대로라면 이 지부(地府)는 혼란한 터라 그는 죽더라도 마족의 비술을 통해 마혼이 된 다음,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함으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혼등에 불을 밝힌다면 적어도 천 년은 죽느니만 못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다시 대화를 해볼까? 그 답운수란 놈의 경지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신통력을 지녔느냐? 대군은 어찌 배치하였고, 또 어떻게 적뢰산을 공격할 계획이냐?”
심협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고, 견서는 심한 갈등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이를 본 심협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진해빈철곤이 순간 배로 커졌다. 이에 따라 견서의 귓속에서는 징을 두드리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끄으윽!”
견서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아, 깜빡했군.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이리 된다.”
견서의 눈에 절망이 스쳤다. 그가 과거에 만났던 적수들은 대부분 선계(仙界)의 패잔병이나 하계(下界: 인간 세상)의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정의감에 불타올라 한차례 꾸짖은 뒤 죽자 살자 목숨을 걸고 싸웠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껏 이토록 악랄한 자를 만난 적이 있었겠는가?
“네놈이 그걸 알아봐야 소용없다. 지금 적뢰산은 이미 우리 왕께서 완전히 평정하셨으니까.”
견서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붉은 치마의 여인과 소옥이 경악하며 다가왔다.
“뭐라!”
“헛소리! 적뢰산을 그리 쉽게 함락할 수 있다면 굳이 온갖 궁리를 해서 만세호왕을 산 밖으로 유인하려 들지는 않았겠지.”
심협은 견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 웃었다.
“흥! 늙은 호왕을 산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계획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지 못한다 해도 적뢰산을 짓밟을 방법은 다 세워두었지.”
견서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에게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겠느냐? 네 꼴을 보아하니 그 답운수라는 놈도 머리가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심협은 계속 비웃었다.
“네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우리 왕께서는 이미 호족 사이에 정탐꾼을 심어 놓으셨다. 오늘은 호왕이 나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곧 쳐들어갈 것이니 너희는 이미 상갓집 개…… 이 비겁한 놈!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다니.”
견서는 욕을 반쯤 내뱉다가 그제야 자신이 심협의 유도신문에 걸려든 것을 깨닫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심협은 그런 견서를 무시한 채 두 호족 여인을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적뢰산에 정말 변고가 난 모양입니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붉은 치마의 여인과 소옥은 이미 잔뜩 초조했던 터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놈은……?”
심협이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붉은 치마의 여인은 소옥의 상처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고는 곧장 앞으로 나서며 손을 뒤집어 구부러진 칼을 한 자루 꺼냈다.
“무, 무얼 하려는 게냐?”
견서가 겁에 질려 외쳤다.
이를 본 심협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진해빈철곤이 순간 백여 배나 불어나 굵고 커다란 기둥이 되었다. 아래에 있던 견서의 몸은 자연히 박살이 나버렸다.
“갑시다.”
심협은 손을 흔들어 떨어진 견서의 저물 팔찌를 챙기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