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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58화 (458/1,214)
  • 458화. 호족(狐族) 여인들

    소녀가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고 쓰러졌다가 허둥지둥 일어난 망구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중년 사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감히 꼼짝도 하질 못했다.

    심협이 마당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연기와 먼지가 흩어지고 나자 놀랍게도 금망대진이 멀쩡히 마당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법진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조금 전의 만세호왕이 아니라 붉고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자태가 풍만하며, 여우처럼 갸름한 얼굴에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멍청한 놈들! 한낱 환술 따위에 속아 넘어가다니,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되려 망쳐버렸구나.”

    개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요물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마, 만세호왕이 아니었어. 견서(犬犀) 대인, 그럼 우리 왕의 계획은……?”

    “가장 아낀다는 어린 딸을 잡으면 동굴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늙은 여우가 그리도 겁을 먹고 대승기에 불과한 육미화호(*六尾火狐: 꼬리가 여섯 달린 불여우)만 내보낼 줄이야.”

    견서라는 이름의 요물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소옥(小玉), 괜찮아?”

    붉은 치마의 여인이 소리 높여 물었다.

    “려(儷) 언니, 저, 저는 괜찮아요.”

    소녀는 재빨리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이 요물들이 마족과 힘을 합쳐 우리 적뢰산에 침입하는 바람에 부왕께서는 대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오지 못하셨단다. 그분을 원망하지 말거라.”

    조금 안심한 붉은 치마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부왕을 원망하지 않아요. 제가 모두에게 폐를 끼친 걸요.”

    소옥이라는 소녀는 죄책감을 견디기 힘든 듯 말했다.

    “도우께서는 이름이 어찌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대가 아직 마족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제 누이를 좀 구해주십시오. 옥호 일족이 반드시 후사할 것입니다.”

    붉은 치마의 여인이 심협에게 외쳤다.

    “당신은 어쩔 생각입니까?”

    심협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저는 이 금망대진을 뚫을 수 없어 떠날 수가 없군요. 제 누이만이라도 구해주십시오.”

    붉은 치마의 여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자 소옥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려 언니!”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견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한 놈도 떠날 수 없다!”

    버럭 고함을 친 그는 그대로 날아오르더니 거대한 바윗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집 지붕을 그대로 내리쳤다.

    쿵!

    둔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집 전체가 무너져 내렸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서 일었다.

    한데 그 사이로 한 줄기 흐릿한 달빛이 흩어졌다. 심협이 전광석화처럼 연기와 먼지 사이를 날쌔게 오가며,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던 호족 소녀를 옆구리에 끼고 곧장 폐허를 벗어나 전원으로 날아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심협은 그녀에게 당부하고는 다시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의 돌사자 옆에 이르렀고, 그의 손에는 어느새 진해빈철곤이 쥐어져 있었다.

    심협이 기세를 북돋아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발천난봉을 시전하자, 금빛 곤영이 응집되어 돌사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연이은 동작들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지극히도 빨랐다.

    “멈춰라!”

    심협의 움직임이 이렇게 민첩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견서가 버럭 외치며 막아서려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콰쾅!

    폭발음이 울렸고, 돌사자의 몸에서 금빛이 새어나오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법진의 기반인 진각(陣脚)의 기둥이 하나 줄어든 금망대진은 한순간 금빛이 어지러이 흐트러지더니 더는 형세를 갖추지 못했다. 그 틈에 붉은 치마 여인은 얼른 마당에서 빠져나와 소녀 곁으로 돌아갔다.

    한편, 심협은 말뚝 위에 한 발로 내려서서 어깨에 곤봉을 턱 걸치고는 도발하듯 견서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금망대진 안에 갇힌 상태였더라면 온 힘을 다해 발천난봉을 시전해야 법진을 깰 수 있었겠지만, 법진 바깥에서 파괴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이 인간족 수사가 왜 갑자기 자신들 편에 선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붉은 치마의 여인과 소옥은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네놈이 죽고 싶은 게냐!”

    견서가 분노로 포효하며 등 뒤의 두 날개를 흔들자 온몸이 검은 회오리바람에 휩싸이더니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협은 두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는 한 손에 진해빈철곤을 쥔 채 몸을 휘돌리면서 후방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막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났던 견서는 금빛에 휩싸인 장곤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기겁하며 다시 한번 흐릿해져 사라졌다.

    심협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견서가 나타나 양 날개를 펄럭이며 살벌한 표정으로 심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 두 얼간이들이 또 말썽을 부렸구나! 어디서 이런 놈을 건드린 게냐?”

    그는 분노의 불길을 망구와 중년 사내 두 사람에게로 돌렸다.

    “이놈이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수사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게 다 망구 탓입니다! 저는 본디 저자를 쫓아 보내려 했사온데, 그가 이놈을 다섯 번째 산송장으로 만들려다가 이리 된 것입니다!”

    중년 사내의 다급한 변명에 망구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어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네놈들의 잘잘못은 후에 다시 따질 것이다. 얼른 가서 저 두 여우 년들을 다시 잡아 오지 않고 뭣 하는 게야?”

    견서가 화를 내며 명하자 중년 사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피부는 마치 맹독에 물든 것처럼 검푸르게 변하더니, 자흑색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내는 몸을 훌쩍 솟구쳐 심협을 돌아 곧장 호족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뒤처져 있던 망구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저 성가신 심갑정이라는 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사내가 마당 한가운데를 막 지났을 때, 심협의 몸이 움직이더니 발밑에 달빛을 흩뿌리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귀신처럼 중년 사내 뒤에 불쑥 나타나 장곤을 내리쳤다.

    “지금이다!”

    세찬 고함이 울려 퍼지면서 견서가 그 뒤를 바짝 뒤쫓아 왔다.

    그가 망구와 중년 사내에게 공격을 지시한 것은 심협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곤의 기세가 다른 쪽으로 향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를 일격에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심협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번 일격은 애초에 속임수였던 것이다. 그는 중년 사내를 무시한 채,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로 곤의 방향을 틀어 견서를 향해 휘둘렀다.

    견서는 대경실색하여 새카만 창을 치켜세우고 공격을 막아냈다.

    쩍!

    놀랍게도 정철(精鐵)로 만든 창이 진해빈철곤에 닿자 두 동강이 났다.

    견서는 산과 바다를 뒤엎을 듯한 힘이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양팔은 어느새 감각을 잃었고, 몸도 통제를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심협은 여전히 중년 사내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견서를 뒤쫓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진 중년 사내는 자신이 미끼가 된 것을 알고 속으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여전히 소옥과 려를 쫓는 발걸음은 그대로였다.

    “조심히 있다가 정세가 틀어지면 먼저 달아나. 명심하렴, 적뢰산으로 되돌아가면 안 돼.”

    붉은 치마의 여인은 긴장한 얼굴로 소옥에게 당부했다.

    “려 언니…….”

    하지만 소옥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붉은 치마의 여인은 이미 양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양손에서는 어느새 가느다란 장검이 하나씩 나타나 온몸에서 자흑색 기운을 뿜어내는 중년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직 다가가기도 전에 중년 사내에게서 옅은 시체 냄새가 풍겨왔고, 붉은 치마의 여인은 이 냄새를 맡자마자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재빨리 숨을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중년 사내는 이를 보고 씩 웃으며 곧바로 몸을 솟구쳐 양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두 소매가 불룩하게 부풀더니 엄청난 양의 자흑색 독기를 거세게 뿜어냈다.

    이 독기는 거대한 두 마리 독사로 변해 서로 뒤얽히며 붉은 치마의 여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거대한 독사들의 입에는 뾰족한 이빨들이 돋아나 있었고, 자흑색 기운을 쉬지 않고 뿜어냈다.

    여인은 호흡을 차단한 뒤로 자흑색 기운이 더는 침입하지 않음을 깨닫자, 더 이상 피하기만 하지 않고 민첩한 몸놀림으로 중년 사내에게 다가가 장검을 연이어 휘둘렀다. 검은 하나하나 상대의 급소를 공격했다.

    중년 사내는 꼼짝없이 제압당해 한순간 벗어날 수 없었다.

    한편, 소옥은 붉은 치마 여인과 중년 사내의 전투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면서 간혹 심협 쪽을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만세호왕은 비빈이 수두룩했고, 자손은 더욱 많았다. 그녀와 려 언니는 배다른 자매임에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더욱이 소옥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줄곧 려 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온 터였다. 만세호왕이 불허했을 텐데도 려가 몰래 적뢰산을 탈출하여 소옥을 구하러 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심란했던 탓에, 소옥은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산송장이 자신을 에워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줄곧 마당 안의 동향을 조심스레 관찰하다가 심협과 붉은 치마 여인이 몸을 뺄 수 없음을 확인한 망구가 네 산송장을 조종하여 소옥을 포위한 것이다.

    망구가 의식으로 명을 내리자, 네 산송장이 갑자기 뛰어올라 동시에 소옥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소옥은 뒤늦게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에 붉은 치마의 여인이 깜짝 놀라 도우러 가려 했지만, 중년 사내의 소매에서 나온 검은 뱀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입을 쩍 벌려 뒷목을 물려고 했기에 일단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망구는 자신이 마침내 공을 세워 앞선 잘못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희색이 만연했지만, 그때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은빛 번개 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가닥가닥 번개 채찍이 되어 사방을 휩쓸자 네 산송장의 머리가 터져 나가면서 새카맣게 타 죽은 고충 몇 마리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산송장들을 조종하던 망구는 그 반발 작용에 부르르 떨었고, 시커먼 피를 왈칵 토해냈다.

    산송장들은 사방에 흩어져 쓰러졌지만,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소옥은 여전히 가늘게 떨며 한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부적이 한 장 들려 있었다.

    “엄마야! 간 떨어질 뻔했네. 이건…… 너무 엄청나잖아!”

    소옥은 감탄한 듯 외쳤다. 조금 전 인간족 수사가 그녀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부적을 한 장 쥐어주고는 정말 위급할 때 쓰라며 사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심협은 낙뢰부(落雷符)가 발동하는 소리에 눈길을 돌려 어린 호녀(狐女)를 흘끗 보고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진해빈철곤을 꽉 움켜쥔 채, 곧장 발천난봉을 시전했다.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견서는 심협이 제대로 공격을 해오자 기겁했다. 사방에 곤영이 빼곡하게 나타나 그야말로 커다란 금빛 그물처럼 그를 그 안에 가두려 했다.

    심협의 곤법은 갈수록 빨라졌고, 기세는 점점 맹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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