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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57화 (457/1,214)
  • 457화. 묘령의 소녀

    심협도 더는 속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맷부리를 털며 그 거무칙칙한 고깃덩어리를 바닥에 던졌다.

    “내가 먹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정말이지 여러분이 준비한 고기는 너무 모양새가 별로라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는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겠소?”

    심협이 손을 펴 보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

    “이 난세에 진짜 유랑민이라면 고기의 맛 따위에 신경을 쓰겠나? 배불리 먹고 목숨을 부지하면 그뿐이지. 심 아우가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벽곡기는 지난 수사일 터. 다만 경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군?”

    망구가 헛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그전에 내 좀 물을 것이 있소이다. 당신네들이 만들어낸 이 산송장들과 마당에 쳐 놓은 법진으로 또 무얼 하려는 거요?”

    심협이 실소하며 말했다.

    그가 법진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사실에 망구가 흠칫 놀라며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갑자기 밖에 바람이 한바탕 일더니 닫혀 있던 방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마당 밖 폐허에서 온통 어슴푸레한 가운데 사람 그림자 하나가 중정의 폐허를 뚫고 다가왔다.

    심협이 시선을 집중하여 바라보니 비단옷을 입고 손에 주목 지팡이를 든 백발노인이 보였다. 수염과 머리칼은 온통 하얀 반면 얼굴에는 전혀 늙은 티가 나지 않았다. 피부도 뽀얗고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아 오히려 백발홍안(白髮紅顔)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허허, 역시 친딸이라 그런가, 노친네가 직접 오셨구먼.”

    중년 사내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망구는 마당 밖을 슥 내다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때, 백발노인 뒤에서 녹색을 띤 눈동자들이 쌍쌍이 연달아 빛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족히 백 쌍은 넘을 것 같았다.

    “심 아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이지 않겠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그저 여우 요괴를 잡아 요단을 빼앗은 뒤 선단(仙丹)을 만들기 위해서라네. 자네나 나나 같은 인간족이니 이런 경우에는 서로 힘을 합쳐야지. 자네 몫도 챙겨주겠네. 어떤가?”

    망구가 돌연 제안해오자 심협은 피식 웃으며 애매한 태도로 말했다.

    “형세가 심상치 않으니 바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구려. 망구 도우도 참 상황파악을 잘하는 것 같소.”

    말을 마친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벽 쪽에 놓인 칠목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망구는 살의가 번득이는 눈으로 잠시 심협을 쳐다보더니, 곧 다시 웃음기를 내비치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럼 한 걸음 물러나도록 하지. 심 아우가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내 후하게 답례하겠네.”

    그는 상자에 담긴 ‘물건’에 몹시도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심협은 편할 대로 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을 뿐,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때, 줄곧 바깥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외쳤다.

    “왔다!”

    마당을 돌아보니 백발노인이 마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무너진 담벼락 밑에 묻힌 돌사자 한 마리가 두 눈에서 가장 먼저 금빛을 발했고, 곧이어 벽 쪽에 세워진 말뚝 하나에 부적 문양이 떠올랐다.

    그 뒤, 고보자봉(*固步自封: 제자리걸음하다)이라 적힌 돌 편액과 흙 속에 파묻힌 시커먼 고목에도 잇달아 법진 문양이 빛났다. 돌사자의 눈에서 솟구쳐 나온 금빛은 돌 편액에 이어 고목과 말뚝에 줄줄이 금빛 광선을 반사시켜 마당에 커다란 금빛 그물을 만들어냈다.

    백발노인은 금빛 그물 한가운데에 서서 보이지 않는 힘에 갇혔고, 모습도 흐릿해지고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또렷하게 보이지 않게 됐다.

    심협은 굴절된 광선들을 보면서 자신이 뚫을 수 있을지를 속으로 가만히 따져 보는 한편, 이 법진의 등급과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실력을 가늠해보았다.

    앞서 처음 적뢰산 바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하늘에서 이곳의 법진을 발견했기에 곧장 살펴보러 온 것이다. 다만 신분을 숨기기 위해 몸의 기운과 신식의 힘을 완전히 차단하여 망구가 자신의 깊이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한편, 지금 그 두 사람이 발산하는 기운으로 보아, 그들의 실력은 분명 대승 중기일 터였다.

    심협은 성급하게 나서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며 형세 변화를 좀 보고 다시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간 큰 무뢰배들이 매일같이 적뢰산 경계 안에서 우리 호족(狐族)의 후예들을 학살하더니, 이제는 감히 본왕의 어린 딸까지 잡아가다니. 지금이라도 무사히 풀어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으나, 그러지 않는다면 본왕이 반드시 네놈들을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법진에 갇힌 노인은 티끌만큼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당당히 외쳤다.

    “호왕(狐王) 어르신, 오셨소? 힘들게 잡은 녀석을 그냥 풀어줄 수는 없지. 따님을 되찾고 싶거들랑 먼저 그 금망대진(金罔大陣)부터 뚫어보시든가.”

    망구가 낄낄대며 대꾸하자 심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호왕이라면 설마 그 적뢰산의 만세호왕을 말하는 것인가!

    “쯧, 아직 젊은 놈들이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비단옷의 백발노인이 호통을 치고는 손에 든 주목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고 허공을 홱 가리키자 지팡이 끄트머리에 박힌 자색 능석(*棱石: 모가 난 돌)에서 순간 수천수만 갈래의 빛이 반사되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자색 빛이 너무 예리하고 눈부셔서, 심협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자칫하면 눈이 상할 것만 같았다.

    망구와 중년 사내도 대경실색하여 몸을 틀고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한편, 마당에서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면서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날카로운 검처럼 허공을 갈랐고, 허공의 금방대진은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잘려나갔다.

    펑! 펑! 펑!

    마당에 세워진 말뚝과 돌사자 등이 연달아 터져 나가면서 수많은 돌조각이 되어 날아다녔다.

    방금 전까지 마당에 서 있던 호왕은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았건만 순간 몸이 일련의 잔상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망구와 거의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곳에 나타났다.

    망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양손으로 허공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산송장 네 사람이 즉시 꼭두각시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중년 사내도 몹시 놀란 나머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진선기 수사도 가볍게 가둘 수 있는 금망대진이 만세호왕 앞에서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답운수(踏雲獸)가 지시한 임무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을 터였다.

    만세호왕은 사람들을 슥 훑어보더니 시선을 심협에게 던졌다.

    “네놈도 한 패냐?”

    “선배님, 오해십니다. 후배는 그저 길을 지나던 참이었으나, 저 역시 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했지요. 선배님이 찾는 이가 여기 있습니다. 후배가 잠시 지키고 있었지요.”

    심협은 깔고 앉은 나무 상자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이 상자에는 우리 왕께서 하사하신 금부(禁符)가 붙어 있다! 풀 방법이 없으면 그 새끼 여우를 풀어줄 생각일랑 말아라!”

    망구는 대노하며 외쳤다.

    “뭐, 이 금부에는 비결이 좀 담겨 있는 것 같지만, 이 상자는 천하의 보물 따위는 아닌 것 같군. 그러니 힘으로 깨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

    심협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망구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완력으로 금제를 깨뜨리겠다고? 어디 한번 해보거라. 다만 금부가 폭발할 때 그 새끼 여우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구나. 하하하!”

    만세호왕은 그 말에 당황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손을 맞비볐고, 그러자 순간 손끝에서 어두운 자줏빛 화염이 치솟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다만 이 화염에서는 아무런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다.

    “자유골화(紫幽骨火), 육신과 신혼이 아닌 뼈만을 불태우지. 들어본 적이나 있느냐?”

    만세호왕이 싸늘한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을 때, 망구는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서리를 쳤다.

    심협의 눈빛도 미묘하게 떨렸다. 자유골화는 삼매진화, 홍련업화 등과 함께 천지이화(*天地異火: 하늘과 땅의 기이한 불)의 하나였다. 그 속성은 유달리 특이하여 사람의 살과 신혼은 태우지 않고 오로지 뼈만 불태우는데, 그 뼈를 가루로 만들면서도 육신은 아무런 외상이 없어 마치 질척질척한 진흙처럼 변하게 한다. 당하는 자는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세 호흡의 시간을 주겠다. 그전에 금제를 풀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게 이 자유골화의 악명을 보여주마.”

    만세호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심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비단옷의 노인을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보았다.

    반면 망구는 덜컥 겁을 먹은 듯 눈빛에서 일말의 망설임이 스쳤다. 그러나 만세호왕이 손바닥을 휘둘러 자유골화를 쏠 기미가 보이자 안색이 돌변하여 황급히 말했다.

    “호왕 어른, 조급해하지 마시오. 내 바로 금제를 풀어드리겠소. 다만…… 이 부적은 예사 것이 아니라서 시간이 좀 걸려야 풀 수 있으니 어르신께서는 인내심을 갖고 잠시만 기다려주셨으면 하오.”

    이에 만세호왕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심협이 끼어들었다.

    “저자를 믿지 마십시오. 그저 시간을 끌려는 속셈입니다.”

    “네 이놈!”

    망구는 계획이 들통 나자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음처럼 차가운 자색 불길이 이미 그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망구는 기겁하며 재빨리 나무 상자 앞으로 가서 양손으로 법인을 맺은 뒤, 나무 상자 위의 금부를 향해 손끝에서 법력을 쏘아 보냈다.

    상자에 붙어 있던 부적에 엷은 금빛이 번지면서 부적 문양의 긴 사슬이 나무 상자 전체에 떠올랐다. 부적 문양은 그야말로 쇠사슬처럼 상자 전체를 10여 바퀴나 휘감고 있었다.

    망구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풀려라’ 하고 작게 외치자 나무 상자에 감겨 있던 부적 문양 사슬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상자에서 한 토막씩 차례로 사라졌다.

    부적 문양이 마지막 3할쯤 남았을 때였다.

    쿠당탕!

    마당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등에 두 날개가 달리고 개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거대한 형체가 하늘로부터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가 일으킨 폭풍이 세차게 밀려와 중정을 휩쓸고 방 안까지 들이닥쳤다.

    한데 만세호왕은 이 폭풍에 닿자 놀랍게도 연무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를 본 망구는 깜짝 놀라 즉시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심협이 그의 뒤까지 바짝 다가와서 어깨를 짓누른 채 맹렬한 법력을 불어넣었다. 이 법력은 망구의 경맥을 타고 곧장 돌진했다.

    망구가 결인한 손을 채 거둬들일 겨를도 없이 한 줄기 법력이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 더 빠른 속도로 상자 위의 금부에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금제의 마지막 3할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쾅!

    금부가 풀리자 내부에서 맹렬한 충돌음이 들려오며 나무 상자가 터져나가면서 새하얀 여우꼬리 세 개가 휙 뻗어 나와 망구와 심협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심협은 곧바로 망구의 어깨를 눌렀던 손을 떼고 가볍게 꼬리를 피해냈다.

    그때, 바닥에 한가득 부서진 나무 조각들 사이에서 낯빛이 뽀얀 묘령의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소녀는 하얀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뽀얀 데다가 등 뒤에는 크고 굵직한 세 가닥 꼬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를 악문 소녀의 표정은 험악했고, 입가에는 뾰족한 두 개의 송곳니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비록 여리지만 야성적인 아름다움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너를 구한 사람까지 공격할 참인가?”

    심협은 옆으로 물러서며 어이가 없다는 듯 따졌다.

    허나 귀에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는지 소녀는 벽을 등지고 서서 경계심과 분노가 가득한 눈길로 그 자리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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