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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56화 (456/1,214)

456화. 온통 헛소리뿐

한참이나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심협은 다시 힘을 주어 문고리를 잡고 두드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이번에는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틈으로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계시오?”

이어서 그는 문을 밀어젖히고 걸어 들어갔다.

한데 그가 마당에 발을 내딛자마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얼굴이 누렇게 뜬 데다가 눈언저리가 움푹 들어간 중년의 사내가 중원(中院)의 폐허더미 속에서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러나 들어온 이가 꾀죄죄한 젊은이임을 알고는 실망한 것인지 사내의 얼굴에는 순간 일말의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

“웬 재수 옴 붙은 놈이 하필이면 여길 뭣 하러 기어들어 와?”

“저의 집이 화를 당해 줄곧 피난을 오다보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며칠을 쌀 한 톨 먹지 못하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픈 지경이었는데, 마당에 아직 등불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여…….”

심협은 한 차례 탄식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이런 때에도 비럭질을 하려 들다니,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게냐? 어서 꺼지지 못해!”

사내는 움푹 꺼진 눈가에 어두운 빛을 띤 채 성을 냈다.

“이보시오, 당신…….”

심협이 더 입씨름을 하려 들자 사내는 더욱 노여움을 참지 못하여 바닥에서 기왓장을 하나 주워 들고는 내려치려 했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어디선가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몸을 기울이고 그 중년 사내 너머로 시선을 향해 보니 검은 옷을 입고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망구(忘丘), 자네가 어찌 나왔나?”

중년 사내는 심협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손에 든 기왓장을 내던지고는 흑의의 청년, 망구를 맞았다.

망구는 깊은 병을 앓고 있는지 걷는 것조차 불안정해서 중년 사내에게 부축을 받은 뒤에야 발걸음을 멈추고 심협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심협의 몸을 몇 차례 훑어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아우님, 우리 일가 역시 변고를 당했다네. 나는 병을 치료하려고 여기까지 도망쳐왔지. 양식은 정말 얼마 없지만 며칠 전 그럭저럭 들짐승을 좀 잡았는데, 자네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와서 함께 먹지.”

“망구!”

중년 사내가 꾸짖듯 외쳤으나, 하지만 망구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세상살이가 어렵고 모두들 힘드니, 사람 목숨 하나 살리는 것도 음덕을 쌓는 셈이오.”

“지금 이런 꼴을 하고 음덕은 개뿔! 그게 하등 쓸모가 있단 말인가!”

중년 사내가 괴로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데 심협이 즉시 읍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세. 우리를 따라 들어오게나.”

망구는 한마디를 남기고 중년 사내의 부축을 받아 돌아서서 내원으로 향했다.

심협은 시선을 살짝 돌려 이 집안 풍경을 좌우로 슥 훑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두 사람을 따라 무너진 중원을 지나 그런대로 온전하게 보존된 후원(後院)에 이르렀고, 불빛이 새어나오는 정옥(正屋: 본채)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문 앞에 이르자 심협은 코끝을 살짝 찡긋거렸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조금 눅눅한 썩은 냄새와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뒤섞인, 몹시도 불쾌한 냄새였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무너져가는 방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불가를 둘러싸고 서너 사람이 널브러지듯 앉아 있다가 하나둘 고개를 들어 심협을 바라보았다. 차림새는 남루했고, 드러난 팔뚝과 얼굴의 피부에는 거무스름한 딱지가 져 있어, 하나같이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또한 눈빛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고, 절망적인 죽음의 기운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빤히 쳐다보자 심협은 왠지 불편해져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공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선을 옮기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눈 한 번 깜빡이질 않았다.

“이쪽은…… 참, 아우님은 이름이 어찌 되는가?”

망구가 물었다.

“저는 심갑정(*沈甲程: 중국어로 갑정은 가명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함)이라고 합니다.”

심협이 재빨리 말했다.

“여기 심 아우 역시 재난을 당한 불운한 사람이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줍시다.”

망구가 그리 말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고, 그중 한 사람은 안쪽으로 엉덩이를 조금 움직여 심협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심협은 자리에 앉은 뒤에야 눈앞의 모닥불 더미 위에 무쇠 솥이 하나 걸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에 무슨 고기를 삶고 있는지 조금 거무스름한 고깃국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고, 그 위로 짙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심 아우는 불쾌히 여기지 말게. 이것들은 며칠 전에 잡아온 여우 고기인데 보관하기 쉽도록 훈제해서 요 며칠 동안 그럭저럭 탕을 끓여 먹었다네.”

망구가 다소 멋쩍은 듯 설명했다.

“이런 때에 먹을 게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인데 제가 어찌 까다롭게 따지겠습니까?”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말을 마친 그가 또다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니 방의 다른 편 벽 가까이에 간이 나무 받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회백색 여우 가죽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그 가죽에는 아직도 짙은 갈색 혈흔이 묻어 있었다.

여우 가죽의 눈은 모두 도려내져서 동그란 빈 구멍만 한 쌍씩 남아 뒤편의 얼룩덜룩한 벽이 보였다.

“이곳 채석진 근처에서는 다른 동물을 찾기가 어려워. 여우만 많지. 예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들 모두 저 짐승들을 집 지키는 수호신으로 믿고 섬겼다네. 그들에게 조각상도 세워주고 제물도 바치면서 말이야. 한데 지금은 이곳 사람들 모두 죽었는데도 여우들은 온 산과 들판에 가득해. 집을 지켜주긴 개뿔…….”

중년 사내가 솥에서 거무튀튀한 고깃덩이 하나를 건지며 투덜댔다.

심협은 그가 고깃덩이에서 검붉고 기다란 살점들을 물어뜯는 것을 보고, 특유의 이상한 냄새를 맡으며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일었다.

“심 아우, 그렇게 있지 말고 괜찮으니 좀 먹게나. 배고파 죽을 지경 아닌가.”

망구가 생각이 났다는 듯 음식을 권했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심협은 그렇게 답하고는 솥에서 고기를 꺼내려다가 문득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뒤편 벽 쪽에 커다란 칠목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황동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자물쇠에 미세한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부적 문양을 자세히 훑어보았는데, 상자가 갑자기 펄쩍 튀어 오르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심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어제 갓 잡은 새끼 여우인데, 죽이기가 아까워서 일단 가둬 놓았다네.”

망구가 답하자 중년 사내가 콧방귀를 뀌더니 다가가 상자를 툭 걷어찼다.

“짐승 놈의 새끼가 밤새 갇혀 있었는데도 말썽을 부리는구먼.”

상자가 돌연 한 차례 흔들리더니 이내 안쪽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거 세상 돌아가는 게 사람도 살기 힘들고, 이 동물들도 살기 힘들고, 다들 쉽지 않군요.”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쳇, 몰라봤구먼그래. 네놈은 아직도 마음씨가 보살이로구나. 그럼 네놈은 이 솥의 고기를 먹지 말고 쫄쫄 굶어 죽어라. 단명할 놈 같으니라고…….”

중년 사내는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리 무례하게 굴지 마시오. 콜록콜록.”

망구는 낮은 소리로 꾸짖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심협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날이 곧 어두워질 테니 심 아우는 다 먹거든 바로 떠나지 말고 예서 하룻밤 머물도록 하게. 더는 밖에 나가서는 아니 되네.”

망구가 말했다.

“음식을 조금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어찌 더 폐를 끼치겠습니까? 다 먹고 나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심협은 잠깐 속으로 헤아려보더니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심 아우, 내가 일부러…… 콜록콜록…… 괜히 자네를 겁주는 것이 아니라, 이곳 채석진은 밤에 위험하다네. 바깥에는 전부 요마와 귀신들뿐이야. 자칫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내일 우리는 길가에 널린 자네의 시신을 수습해야 할 게야.”

망구가 재빨리 말했다.

“뭐라고요? 요괴가 있단 말입니까?”

심협은 짐짓 놀라는 척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여기 삼진원은 본래 이 마을의 큰 부잣집이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일세. 입구에 팔괘경(八卦鏡)이 걸려 있는데 아직 좀 쓸모가 있는지 귀신과 요괴들이 이 집에 들어온 적은 없다네. 그러니 안심하고 여기서 하룻밤 묵게나.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 늦지 않을 게야.”

망구가 재차 권하자 심협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고집부리지 않고 여러분께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온통 헛소리뿐이로군. 이곳 대문에 팔괘경이 걸려 있긴 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런 법력 파동이 없어. 방금 들어온 마당에 누군가 쳐 놓은 법진이야말로 요괴와 귀물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겠지.’

“심 아우는 너무 예의 차리지 말게. 음식 좀 들고, 일찌감치 쉬시게나. 한밤중에는 바깥이 아비규환일 터라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네.”

망구는 심협이 응낙하자 다시 한번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심협이 시원스레 대답하자 배도 꼬르륵 소리를 내며 호응했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옆 사람의 손에서 시커먼 젓가락 한 쌍을 받아들고 솥에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한데 그가 막 고깃점을 물어뜯으려는 그때, 밖에서 갑자기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마당 밖에서 한바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망구가 표정이 돌변하여 고개를 돌리고 문 밖을 내다보았다.

휘이익!

갑자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치며 방문을 왈칵 열어젖히자 방안의 모닥불에서 불똥이 온 사방에 튀었다.

“어, 어찌 된 겁니까?”

심협은 그 검은 고깃점을 가려 조심스레 소매 안에 넣은 뒤, 몇 번 씹는 척 쩝쩝거리며 허둥지둥 말했다.

마당 밖의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서 텅 빈 마당은 온통 어둠뿜이었다.

망구는 시선을 거두고 심협이 음식물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괜찮네. 밤에는 바람이 세서 말이야. 늘 이렇지.”

심협은 목이 메는 듯 자기 가슴을 두어 번 세게 치며 그를 향해 멋쩍게 웃어보였다.

“심 아우, 좀 천천히 먹게.”

“됐습니다. 충분해요. 제가 어찌 더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심협이 손사래를 치며 답하자 망구도 더는 강권하지 않았다.

한편, 중년 사내는 구시렁거리며 방문을 다시 닫았다.

문틈이 닫히던 찰나, 심협은 전원의 지붕 위에 어떤 들짐승의 눈 같은 녹색 빛이 번뜩이는 것을 언뜻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깃을 단단히 여민 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쉬었다.

* * *

밤이 되자 기왓장이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뜰 뻔했지만, 억지로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소리가 점점 더 잦아지자, 그는 그제야 졸린 눈을 비비며 놀라서 깬 척을 했다.

그가 눈을 뜨고 보니 앞서 불가 옆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그를 등진 채 문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망구와 중년 사내는 한쪽 옆에 서 있었다.

“심 아우, 깨어났는가?”

망구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심협이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별것 아닐세. 그저 몇몇 짐승들이 간덩이가 좀 부었는지 뜻밖에도 오늘 밤에 이 집 마당까지 들어왔지 뭔가.”

망구가 설명하자 중년 사내가 심협을 힐끔 돌아보고는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어찌된 일인가? 자네 고충(蠱虫)에 문제가 생긴 게야? 왜 저자에게는 아직 변화가 없지?”

“우리가 심 아우를 만만하게 보았소. 그는 아예 고육(蠱肉)을 먹지 않은 거요. 그렇지?”

망구가 시선을 심협에게 돌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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