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55화 (455/1,214)
  • 455화. 세객(說客)의 부탁

    “선배님께서는 어떤 물건과 맞바꾸고자 하시는지요?”

    “늙은이는 법보나 기물 따위는 필요 없네. 그저 자네가 이 늙은이를 도와 한 가지 일을 좀 해주길 바라네.”

    심협의 물음에 백의의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허허 웃고는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앞서 말한 삼계의 형세는 자네도 이미 분명히 들었을 테지. 지금 인간족과 선불(*仙佛: 신선과 부처) 두 세계는 그런대로 단합된 편이지만, 유독 요족만은 아직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 일을 성사시키기가 어렵다네. 한데 우리가 마족에 대항하려면 반드시 삼계의 모든 힘을 규합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생기지.”

    노인의 푸념하는 듯한 말에 심협은 한층 진중해졌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저에게 요족과 접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네. 요족은 지금 사분오열되어 그중 상당수의 부족이 스스로 마족에 가담했지. 나머지도 내분 중이라 통일은 요원한 상태야. 제천대성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의 명망으로 요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온 요괴의 왕이 되어 그들을 족히 다스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지금 그런 능력을 가진 요왕(妖王)은 딱 한 사람뿐이라네.”

    백의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또다시 절레절레 저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그게 누구입니까?”

    심협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당연히 손오공이 당시 의형제를 맺고 큰형님으로 모셨던 대력우마왕(大力牛魔王)이지.”

    은갑의 사내가 대신 답했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는 후배더러 가서 우마왕을 설득하라는 말씀입니까?”

    심협이 다소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하, 도장(道長)께서 혹시 농을 하시는 겝니까? 우마왕 그놈은 마족에게 의탁하지는 않았으나, 우리 천정, 영산의 세력과 늘 물과 불 같은 관계였습니다. 이 녀석을 보낸다면 개죽음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황의의 사내 또한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었다.

    “맞네. 우마왕은 당시 홍해아(紅孩兒)와 철선공주(鐵扇公主) 모자 때문에 취경인 무리와 충돌하여 결국 천정의 집중공격을 당해 한바탕 화를 입었지. 그 뒤로는 천정과 관계를 끊었으니 크게 척을 진 셈이라네. 하여 지금 그를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야. 허나 지금 삼계가 이런 지경이니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백의의 노인이 깊게 탄식했다.

    “선배님께서 이 후배를 대책 없이 사지로 내몰지는 않으실 터인데, 통할 만한 방법이 있습니까?”

    심협은 성급하게 거절하지 않고 나름의 이해득실을 자세히 따져보며 물었다.

    “우마왕은 자신의 찬두호산(鑽頭號山) 사방 8백 리를 모두 봉해 천정과 마족의 진입을 금하였네. 그러니 들켰다가는 분명 목숨이 날아갈 걸세. 자네가 인간족 신분이라고는 해도 그 안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테니 그를 직접 만나기란 더욱 어려울 테지. 이 늙은이도 자네더러 우마왕을 직접 만나라고 할 생각은 없네. 그저 자옥호(玉狐) 일족을 통해 찬두호산 쪽 소식을 알아봐주었으면 하네.”

    백의의 노인이 말했다.

    “우마왕과 옥호 일족의 관계는 줄곧 매우 가까웠으니 확실히 좋은 해결책이긴 합니다. 허나, 만세호왕(萬歲狐王)의 장녀, 그러니까 옥면공주(玉面公主)가 저팔계의 쇠스랑에 죽었을 당시 옥호 일족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지만, 천정에 대해 원망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천정이 별 볼 일 없게 됐으니 옥호 일족이 꼭 이런 일을 도우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은갑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자네 말이 맞긴 하네만, 이것이 지금 당장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 시도는 해봐야지. 더구나 이 도우가 몸담았던 방촌산은 줄곧 요족과 관계가 좋았으니 그가 간다면 아무래도 좀 낫지 않겠나.”

    백의의 노인이 말을 맺었다.

    당시 보제조사는 영대방촌산(靈臺方寸山)에 개단하고 가르쳤는데, 늘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문하의 제자 중에는 손오공과 같은 요족들도 많았다. 때문에 요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추앙을 받았다.

    사람들은 말을 마치고 시선을 심협에게로 옮기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이 후배,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한데 옥호 일족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속담에 이르길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 하였지. 옥호 일족도 당시 우마왕의 비호 아래 비로소 적뢰산(積雷山) 마운동(摩雲洞)에 터를 잡았다네. 허나 옥면공주가 죽은 뒤로 그들 일족은 외부적으로야 아직 마운동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진즉 적뢰산에 다른 동부(洞府)를 텄을 게야. 그러니 정확히 어디라고는 이 늙은이도 아직 확답할 수 없다네.”

    백의의 노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심협은 오히려 무척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자신이 탈출했던 곳은 적뢰산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니, 돌아가서 잠시 몸조리를 하고 나면 옥호 일족을 찾으러 갈 수 있을 듯했다.

    “그렇다면 후배 우선 적뢰산 경계 부근에서부터 옥호 일족의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무언가 알게 된다면 이 천책의 잔경으로 선배님들께 연락을 드리지요.”

    심협이 공손하게 포권했다.

    “이제는 삼계를 주관하던 천정이 사라져서 요족들의 행동거지가 예전보다 훨씬 더 사납고 난폭해졌네. 옥호 일족도 적뢰산 주변 백 리를 봉쇄하고 다른 종족의 출입을 금했다네. 인간족의 신분으로 갈 때에도 좀 더 조심하게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심협이 포권하자 백의의 노인도 마주 포권했다.

    “그럼 수고하게나.”

    사람들은 서로 작별인사를 나눈 뒤, 각자 모습이 차츰 흐릿해지더니 금빛 대청에서 사라졌다.

    * * *

    산속 계곡 옆에 갑자기 금빛이 번쩍이더니 허공에 천책이 먼저 떠올랐고, 뒤이어 금빛을 드리우면서 심협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이어서 손을 휘둘러 천책을 몸속에 거둬들이고 신식을 펼쳐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위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신식을 거둬들이고 물가 옆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조금 전 천책 잔경에서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찬두호산의 소식을 알아보는 임무를 받았으니 우선 옥호 일족을 찾아야겠군. 그전에 아무래도 이 백학화형술을 먼저 익히는 게 좋겠어.”

    심협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결정을 내린 그는 손을 뒤집어 옥간을 꺼낸 뒤, 신식을 투입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해가 안 가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법결을 읊조리는 한편, 옥간에 기록된 방법대로 신식의 힘과 법력을 동시에 움직였다.

    변화술은 환술과 달리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허초(虛招: 거짓 동작)가 아니라 몸과 정백, 기운과 신혼을 진짜로 바꾸는 것이다. 때문에 신혼의 힘, 법력, 기운과 육신의 힘 모두가 완벽하게 어우러져야만 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심협은 이미 진선의 몸이라 법력이 충분했고, 신혼의 힘 역시 강한 편인 데다가 <황정경> 공법까지 수련했기에 더없이 순조로웠다.

    불과 반 시진 뒤, 심협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좌우로 펴고 새들이 날개 치듯 위아래로 흔들며 변화주문을 가볍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뒤이어 숨을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몸이 순간 가벼워지더니 양팔에 새하얀 깃털들이 돋아났고, 몸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그대로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호리호리한 백학(白鶴)이 되었다.

    그는 발을 들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지만, 발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들면서 발을 살짝 헛디뎠다. 동시에 양팔을 흔들면서 결국은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사실 심협은 이제껏 새들이 어떻게 하늘로 날아오르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비행할 때는 술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갑자기 학으로 변해버리자 어떻게 날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차례 내달리고 날개를 퍼덕인 끝에 비로소 높이 날아올랐다.

    고개를 숙여 보니 계곡물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는 두 날개를 너무 자주 흔들었고, 두 다리도 뒤로 뻗지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그러나 반각 정도 비행한 뒤에는 진짜 학과 다름없이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적뢰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날갯짓하며 날았다.

    도중에 어느 숲을 지날 때, 심협은 문득 뒤에서 바람소리가 크게 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땅을 내려다보던 시선에도 거대한 그림자가 자기 그림자를 덮는 것이 보여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가 급히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자, 새카맣게 빛나는 갈고리 두 개가 그의 가슴팍을 바짝 스쳐 지났다. 뒤이어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몸을 스치고 지나더니 아래로 살짝 가라앉았다가 또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높은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고 다시 그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송골매!’

    심협은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어 곧장 아래로 날아 내려와 밀림으로 숨어들었다.

    송골매 역시 급강하하여 심협을 추격해왔다.

    그러나 이 매가 숲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물화살 한 줄기가 불쑥 날아와 날개를 쏜살같이 스치고 갔다. 이어 날개의 깃털 여러 개가 흩날렸다.

    이에 깜짝 놀란 송골매는 곧바로 숲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먼 곳으로 날개 쳐 사라져갔다.

    잠시 뒤에야 심협은 본래의 모습으로 밀림에서 나와 적뢰산 쪽으로 빠르게 날았다. 송골매의 습격을 받긴 했지만, 이 백학화형술의 독특한 점은 충분히 증명됐기에 그는 퍽 만족했다.

    수백 리를 질주한 심협은 저녁 무렵에 마침내 적뢰산 부근에 도착했다.

    그는 멀리 수십 리 앞에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검푸른 산봉우리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섣불리 산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산 밖에 어렴풋이 보이는 등불이 켜진 곳을 따라 날아 내려갔다.

    땅으로 내려온 뒤에야 심협은 그곳이 놀랍게도 심하게 파괴된 산기슭의 작은 마을임을 깨달았다.

    적뢰산에는 검은 현무암이 많았는데, 산에 의지하여 살아갔기 때문인지 이 파괴된 마을의 가옥 대부분은 검은 돌덩이를 쌓아 만든 것이었다. 또한 마을 입구의 대문 밖에는 돌로 만든 방문(坊門)이 하나 서 있었는데, 위에는 이미 칠이 벗겨진 채석진(采石鎭)이라는 세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심협은 자신의 기운을 억누르고 길가에서 푸른 이끼가 돋아 있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이슬 얼룩을 자기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손에 나무 막대기를 짚고 절뚝거리며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을의 규모와 가옥의 상태로 보아 이 채석진이란 곳도 아마 한때 영광을 누렸던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많은 집 앞에는 사람 키만 한 석재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위로 두꺼운 진흙과 이끼가 덮여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다른 가옥들도 이미 무너지고 파괴되어 온통 황폐하고 퇴락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심협은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간 뒤에야 마침내 자기가 하늘에서 보았던 등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면적 또한 가장 컸으며, 기세도 독보적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웅장하다고 해봐야 주위의 가옥들에 비해서 그런 것뿐이었고, 실제로는 겨우 삼진원(*三進院: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세 개 넘어야 하는 구조의 중국 전통 가옥)에 불과했다. 그 집의 가장 앞쪽과 가장 뒤쪽의 건물 두 채는 그런대로 온전하게 보존되었으나, 한가운데의 건물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그 노란색 불빛은 바로 맨 뒤의 건물에서 비쳐 나온 것이었다.

    심협은 전원(前院)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몇 차례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계시오?”

    심협은 소리 내 사람을 불렀다. 마치 오랫동안 길을 재촉한 것처럼 힘없고 소심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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