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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53화 (453/1,214)
  • 453화. 네 사람

    하얀 옷의 노인이 마지막 천책 잔편의 소유자에 대한 정보를 꺼냈을 때 그 두 사람이 살짝 움찔한 것으로 보아,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몹시 감격한 눈치였다. 다만 이번에도 그들은 상대의 신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하얀 옷의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타인의 신분을 묻는 것은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조급해하지 말게. 여기 도우는 처음 왔으니 아직 우리가 왜 모였는지 잘 모를 게야. 천책 잔편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더욱 모를 테고 말이야.”

    하얀 옷의 노인이 말했다.

    “예,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들이 있지요.”

    황의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이보시오, 도우. 그대의 신분에 대해 밝힐 필요는 없소. 대신 번거롭더라도 그대의 족속과 과거에 몸담았던 종문 그리고 그대의 현재 처지를 좀 이야기해 주시오.”

    은빛 갑옷의 사내가 마무리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한 끝에 조심스레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후배는…… 인간족 수사로, 과거에는…… 방촌산 제자였습니다. 종문이 멸문당한 뒤에는 바깥을 떠돌아다니다가 동해에 있었는데…….”

    “있었던 곳까지 말할 것 없소.”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은빛 갑옷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끊고는 일러주었고, 심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있었던 곳을 말하지 말라는 것은 자네를 위해서라네. 천책의 일부를 가진 자는 모두 마족에게 있어 눈엣가시라, 종적이 드러나면 위험하기 때문일세.”

    하얀 옷의 노인이 일러주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수행이 깊지 않은 후배 수사로구먼. 천책이 왜 그를 택했는지 모르겠어.”

    황의의 사내가 탄식했다.

    물론 심협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방촌산 제자라고 한 것도 애초에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방촌산의 조사당(*祖師堂: 사찰에서 불교 종파의 창건자 등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불교건축물) 족보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

    “천책 잔편이 숙주를 찾을 때는 모두 천도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니 틀리는 법이 없네. 됐고, 역시 이 늙은이가 자네에게 먼저 우리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 좋겠구먼. 요즘 삼계에는…….”

    심협은 이어지는 백의(白衣) 노인의 말을 들을수록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마침내 처음으로 온 삼계의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봉인이 풀려 마신 치우가 지계(地界)에서 탈출하여 천지를 집어삼킨 뒤로 삼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또한 천정과 서천은 연이어 함락되었고, 천계의 대능들도 잇달아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옥황상제와 불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탁탑천왕, 마가사장(魔家四將: 마례수를 포함한 마씨 4형제), 거령신 등 천장(天將)들이 연이어 전사하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지장보살 등도 잇달아 목숨을 잃는 등, 온 하늘의 신령과 부처 태반이 전사했다.

    저승에서는 윤회가 끊어져 인간 세상이 지옥에 빠졌고, 천정과 서천은 반대로 요마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물이 창궐하고 사방에서 요환(妖患)이 일어났다. 귀물들이 제멋대로 설치고 다녀 세상의 산과 강줄기의 빛깔이 변했고, 천지건곤이 거꾸로 돌아가 천도 역시도 이미 위태롭게 되었다.

    다행히도 천정과 서천이 전멸한 전투에서 불조와 옥황상제, 태상노군이 힘을 합쳐 마신 치우에게 중상을 입히고 그를 잠시 휴면에 빠지게 한 덕에 비로소 삼계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에 지금 마족들은 도처에서 전쟁을 벌이는 한편 상고 시대 탁록(*涿鹿: 중국의 전설에서 치우와 황제가 전투를 벌인 곳) 전투에 참가했던 더 많은 마족 잔당들을 풀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우를 다시 깨울 방법을 찾았다. 반면 천정과 서천에 남은 대능들도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치우가 깨어나기 전에 마족을 멸망시키고 그를 다시 봉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삼계를 위해 분주히 다니는 대능들이 있단 말입니까?”

    심협이 물었다.

    “이전에 멸세(滅世)의 대전에서 천정과 서천은 심한 타격을 입어 거의 모든 대능들이 목숨을 잃었다네. 오히려 인간 세상에 머물던 지선(地仙)들 무리는 영향을 덜 받았지. 보제조사께서 이번 마겁의 원흉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신 탓에 방촌산이 가장 먼저 마족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더군. 덕분에 오장관 같은 종문들은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고, 큰 화는 피했다는 게지. 지금은 각자의 세력 모두가 잠시 진원대선(鎭元大仙)을 우두머리로 하고 있다네.”

    백의의 노인이 말했다.

    “수많은 수사들이 제 목숨을 보전하려 몸을 사리고 은둔했소. 허나 마족들은 삼계에 멸세의 뜻을 품고 있는 바, 처음에 그들을 따라다니며 함께 전쟁을 벌인 요족들도 그들의 숙청명단에 올라 있기는 매한가지요. 그러니 점점 많은 요족 대능들이 형세를 꿰뚫어보고 은밀하게 저항 대열에 합류했다오.”

    황의의 사내가 말했다.

    “그럼 선배님들은……?”

    심협은 주저하듯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마족은, 인간과 요괴 두 종족에 깊이 침투해 있어서 드러내놓고 연락하려 들면 그들에게 들키고 말지. 그런 의미에서 이곳 천책의 잔경은 정보를 교환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지. 그러니 우리가 바로 각계의 연결고리요.”

    은빛 갑옷의 사내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심협은 마침내 왜 그들의 신분이 절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지 깨달았다. 마족에게 이들의 정체가 알려지면 이를 통해 저항군이 뿌리 뽑힐 수 있고, 그리 되면 삼계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선배님들이 삼계의 미래를 짊어진 분들이셨군요. 이 후배, 감복했습니다.”

    심협이 진심으로 탄복했다.

    “손에 천책 잔편을 쥔 바, 우리 모두 평범하지는 않다네. 각자 사명과 임무를 띠고 있지. 자네는 이런 사정을 가장 늦게 알았으니 남은 천책 잔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잘 지켜내야만 하네. 그것이 앞으로 마족에게 반격할 초석이니.”

    백의의 노인이 당부했다.

    “후배 반드시 온 힘을 다해 천책의 남은 잔편을 보호하여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심협이 진중한 목소리로 답하며 포권했다.

    “자, 일단 그에게 알려줄 수 있는 일은 다 이야기했으니, 이제 다른 중요한 일을 논의하지요.”

    황의의 사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천정의 옛 수하들 쪽은 준비가 어찌 되어 가나?”

    백의의 노인이 물었다.

    “남은 천병과 천장들 대부분 이미 귀속되었지만, 지부(地府) 쪽은 너무 심하게 파괴되어 중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해 용궁은 이전에 공격을 받아 남해, 북해와 서해 모두 이미 멸망하고 남은 병력들은 모두 동해로 달아났는데, 지금은 연락이 닿았습니다.”

    은갑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동해라……. 예전에 그곳도 군사를 대동한 마붕(魔鵬)의 공격을 받지 않았나. 정세가 나머지 삼해 용궁보다 더욱 위급했는데 어찌 마지막에 가서는 그들이 위기를 벗어난 게지?”

    황의의 사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우리 천정의 옛 수하들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는 것이 싫은가?”

    은갑의 사내가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흥! 마붕의 실력은 우리 누구나 잘 알고 있지 않나. 동해 용궁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겐가?”

    이에 황의의 사내도 콧방귀를 뀌며 반문했다.

    “당신네 서천 불국에서 빚어낸 재앙 아닌가?”

    은갑의 사내는 그 말에 더욱 노여워하며 못마땅한 듯 날카롭게 따졌다.

    천정이 함락될 당시 마붕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무수한 천병과 천장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심협은 지금 들은 이야기들을 결합해 이 은갑 사내는 천정 옛 부하들의 세력을 대표하고, 황의의 사내는 서천 불국에서 온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도우, 지금 그런 다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백의 노인의 목소리는 평온해서 감정의 동요 따위 조금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를 수 있었다.

    “저는 그저 고비를 넘긴 동해가 천정 휘하에 있는 동해가 아닐까 염려했을 뿐입니다.”

    황의의 사내가 한층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 안에는 동해 용궁이 살아남기 위해 마족에게 의탁했을까 걱정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네놈이 감히!”

    은갑의 사내가 벌컥 성을 냈다.

    “두 사람은 마음을 좀 가라앉히게나. 늙은이가 들은 정보가 좀 있다네. 마붕은 안 그래도 천정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는데, 아마 탁탑천왕이 임종 무렵에 어떤 여지를 남겨 놓아 결국 마붕을 죽게 만든 게 아닐까 싶네. 이후 동해 내부에서도 한 차례 동란을 겪었다는데, 듣기로는 장공주가 감금당하고 늙은 용왕이 세상을 뜨면서 구태자가 새로운 용왕이 되었다더군.”

    백의의 노인이 손짓으로 두 사내를 진정시키며 천천히 말했다.

    “그리 많은 일이 있었다니…….”

    황의의 사내가 조금 놀란 듯 탄식했고, 은갑의 사내도 이제야 내막을 알게 됐는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심협은 덤덤한 척하며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거친 파도가 일었다. 동해 용궁에게 있어 이 일들은 비밀 중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건만, 이 백의의 노인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심협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을까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노인은 더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심협에 대해서도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용궁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차단한 것인지 아니면 노인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인지 심협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후로 세 사람은 어떤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심협은 귀를 기울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으로 백의의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모였는지 아직 모르겠지?”

    이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좀 있어서 우리는 자주 모일 수는 없다네. 굳이 필요가 없으면 서로 연락하지도 않을 게야. 허나 모임이 필요할 때면 한 사람이 천책의 남은 잔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부름을 받은 뒤에는 반 시진 안에 천책 잔경에 들어와야 하네. 이번에 모임을 청한 사람은 바로 이 늙은이일세.”

    “선배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천책 잔편으로 어찌 초대를 합니까?”

    “자네는 잔편을 얻은 지 아직 얼마 안 되었나보군. 천책의 신묘한 효력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니 말이야. 내 자네의 궁금증을 좀 풀어주도록 하지.”

    백의의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머리 위에 천책의 잔권(殘卷) 허상이 천천히 펼쳐졌다. 그 위에는 천병과 천장을 비롯한 여러 선신(仙神)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다만 이 이름들은 모두 반사된 빛에 가려져 있어서 심협이 아무리 시도해도 분명히 볼 수가 없었다.

    한편, 잔권의 가장 끝자락에는 손자국 같은 세 개의 흔적이 희미한 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뒤이어 은갑의 사내와 황의의 사내도 차례로 같은 행동을 했는데, 그들이 지닌 천책 잔권의 허상에도 똑같은 세 개의 흔적이 찍혀 있었다.

    “혹시 이 흔적이 열쇠입니까?”

    심협이 물었다.

    “그렇소. 서로의 천책에 흔적을 남겨놓기만 하면 이 공간에 들어온 뒤 흔적을 통해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수 있소.”

    은갑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협이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을 움직여 머리 위에 천책의 잔권을 떠올렸다.

    다른 세 사람이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엄지를 누르자, 한 가닥 신념(神念)의 힘이 갈라져 흘러나와 심협의 천책 잔권 위에 낙인을 찍었다.

    심협도 단번에 이 방법을 간파해 마찬가지로 세 사람의 천책 잔권에 낙인을 찍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 천책의 잔경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다네. 그렇다고 우리가 이 안에 무한정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한 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세 시진에 불과하지. 그러니 궁금한 게 있거든 얼른 물어보시게나.”

    백의의 노인이 그렇게 말하자 심협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선배님, 이곳 천책 잔경에서 물물교환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전에 시험 삼아 자신의 순양검배를 꺼내봤지만, 다른 사람과 실물로 맞바꿀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자네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있다네. 여기서 물건을 맞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네만, 법력을 좀 소모해야 하지.”

    백의의 노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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