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천책의 잔경(殘境)
한편, 해골머리는 멀어져 가는 심협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저 인간족 녀석이 어떻게 붕(鵬)마왕의 진시천리를 사용한단 말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해골머리에 검은 빛이 번득였고, 그러자 진해빈철곤에 맞아 산산조각 났던 뼈들이 날아와 금세 온전한 뼈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부서진 흔적 따위 없이 검은 해골머리 밑에 연결되었다.
그때, 뒤쪽에서 세 줄기 둔광이 다가왔다. 매 요괴와 검은 호랑이 요괴 그리고 마 주인장이었다.
“존자님! 적은 이미 해결하셨습니까? 어떤 놈이 우리 이야기를 엿들은 것입니까?”
검은 호랑이 요괴가 적의 시체를 찾는 듯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놈은 이미 달아났다.”
검은 해골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뭐라고요!”
두 요괴와 마 주인장은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 합니까? 제가 그자를 쫓아갈까요? 저곳의 비밀은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검은 호랑이 요괴가 물었다.
“됐다. 우리 이야기가 기밀도 아니고, 그자가 엿듣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허나 피 웅덩이는 확실히 남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지. 마침 흑랑산 인근에는 들짐승이 거의 남지 않았으니 이제 거점을 옮기는 게 좋겠구나.”
검은 해골의 말에 검은 호랑이 요괴와 매 요괴는 서로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너희는 물러가고, 마충(馬忠)은 남거라.”
검은 해골의 분부에 두 요괴는 곧장 물러갔고, 마 주인장 혼자 그 자리에 남았다.
“취보당 유적에서 그자와 마주쳤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해보거라.”
검은 해골이 담담하게 말했다.
* * *
심협은 진시천리를 시전해 족히 만 리를 날아가고 나서야 멈춘 뒤 어느 계곡에 내려앉았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곧장 황정경을 운공하여 법력을 회복하며 취보당 유적에서 얻어온 검은 병을 꺼냈다.
좀 전에 일어난 일은 매우 기괴하여 천책의 힘이 아니었다면 봉변을 당했을 터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병은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어서 신식이 차단된 탓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뚜껑을 열어야만 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푸른 부적을 떼어낸 뒤 손을 뒤집어 간이 법진 진반을 한 벌 꺼내 병 주위에 늘어놓고 결인하여 가리켰다. 그러자 진반에서 갑자기 푸른 빛 덮개가 번득이며 병을 뒤덮었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병 속의 검은 기운에 그의 법력이 닿으면 그 법력을 통해 체내로 스며들 터였다. 그러니 법진의 힘으로 가둔 지금은 자신과 연결될 수 없을 것이고, 검은 기운도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심협은 약병을 집어 들어 병마개를 살살 뽑고는 병을 곧바로 바닥에 내려놓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검은 기운 한 자락이 병에서 쏟아져 나와 금세 법진의 푸른 빛 덮개를 뒤덮었다.
이 검은 기운은 빛 덮개 안에서 한바탕 좌충우돌하더니 빛 덮개를 뚫고 나오지도, 그 속으로 녹아들지도 않았다.
심협은 그제야 마음 놓고 빛 덮개 가까이 다가가 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기운에 막혀 있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병 안에는 새카만 단약 한 알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이 검은 기운들은 단약이 뿜어내는 것이었는데, 어떤 단약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심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신식을 한 가닥 나누어 푸른 빛 덮개를 뚫고 병 안으로 조심스레 뻗었다.
신식이 닿자마자 검은 기운이 즉시 녹아들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심협은 즉시 신식을 끊어버렸다. 약간의 손해는 있었지만, 대신 검은 기운의 침입을 제때 차단할 수 있었다.
‘법력만이 아니라 신식에도 스며들 수 있다니, 이 검은 기운은 실로 놀랍군.’
심협은 그 검은 기운을 살펴볼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뇌재는 이 검은 기운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 기운은 뇌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법력에 살짝만 닿아도 상대의 몸에 스며들 수 있으니 잘만 쓰면 매우 유용하겠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금제의 힘을 발동시켜 검은 기운을 병 안으로 밀어 넣고 다시 병마개를 막아 약병을 챙겨 넣었다.
뒤이어 심협은 천책을 꺼내 신식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몸에 스며든 검은 기운을 단숨에 거둬들인 것을 보면 이 책에는 아직 자신이 알아내지 못한 현묘함이 있을 터였다.
한데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천책이 갑자기 세찬 금빛을 발하며 강한 흡입력을 내뿜었다.
심협은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시야가 크게 변하더니 거대한 금빛에 파묻혔다.
* * *
눈앞에서 금빛이 흩어졌고, 두 발이 땅을 딛는 것이 느껴졌으며, 발밑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잔물결이 찰랑였다.
고개를 숙여보니 바닥은 거울처럼 매끈했지만 그림자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곳은 천책 속 그 이상한 금빛 대청 안이었다.
심협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노인의 목소리가 뒤쪽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자네는…… 새로 온 자인가?”
“그쪽은 누구요?”
심협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하지만 아득한 운무만이 눈에 들어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네 번째 사람인가?”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지만, 혼잣말에 가까웠다.
심협은 문득 오싹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는데, 저 앞 수십 장 너머 금빛 안개벽 속에 키가 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하얀 장포는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가 그 어마어마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기운도 새어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심협이 그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였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배님께서는 뉘신지요?”
심협은 망설임 끝에 포권하며 예를 갖추고는 물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상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지만, 말투는 부드러웠고 나무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심협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선배님,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후배는 그저 길을 잃어 이곳에 잘못 들어왔을 뿐이니, 선배님을 귀찮게 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후배는 물러가보겠습니다.”
“허허, 길을 잃었다라……. 재미난 이야기구먼. 허나 걱정 말게나, 도우. 이 늙은이는 꾸짖을 마음은 없었다네. 그러니 자네도 숨기려 애쓰지 말게. 몸에 천책의 파편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곳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었겠지.”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 심협은 재차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 끝에 뭔가를 숨기려 해봐야 소용없으며, 차라리 사실대로 털어놓고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배님께서도 천책의 일부를 얻은 분이셨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천책 때문입니까?”
심협은 고개를 젖히고 상대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겹겹이 금빛 안개가 끼어 있어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 거대한 형체가 옷소매를 가볍게 휘두르자 몸이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금세 심협과 엇비슷한 키의 하얀 옷을 입은 노인으로 변했다.
노인은 눈처럼 새하얀 장포를 입었고 허리에는 주홍색 띠를 둘렀는데, 한 손에는 새하얀 불진을 안고 있었다. 그 위에는 가닥가닥 실오라기들이 수정처럼 맺힌 채 하얀 빛을 발하고 있어 척 보기에도 여간한 보물이 아니었다.
한데 노인의 몸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 보면 앞가슴에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수염만 보일 뿐, 얼굴은 금빛 안개에 덮여 있어 분명히 볼 수가 없었다.
“복생무량천존(*福生無量天尊: 도가의 인사말 중 하나로 상대방을 축원하는 뜻을 담고 있음).”
노인이 한쪽 손바닥을 세우고 불진을 흔들며 심협에게 도가의 방식으로 계수(*稽首: 먼저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린 다음 머리를 손까지 숙이는 인사법)했다.
“도장(道長)을 뵙습니다.”
이를 본 심협도 곧바로 포권하고 몸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도우는 이곳에 처음 온 모양이구먼. 당황할 것 없네. 우리는 이 지역을 천책의 잔경(殘境)이라 부르지. 천책의 잔편(*殘片: 훼손되고 남은 조각)과 서로 연결되고 공명하면서 만들어진 실체 너머의 공간, 허경(虛境)인 셈이야.”
“천책의 잔경이요? 그리고 우리라니…… 다른 사람이 더 있습니까?”
심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보아하니 도우는 천책이 쪼개진 뒤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각각 삼계에 흩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나보군. 그 뒤에 기연에 이끌려 일부 사람들이 속속 천책의 잔편을 얻었다네. 곧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걸세.”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쪽 안개벽에서 갑자기 금빛 안개가 용솟음치더니 키가 백여 장쯤 되는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은빛으로 빛나는 비늘갑옷에 허리에는 사나운 사자모양이 장식된 허리띠를 찼으며, 머리에는 구슬장식 보관(寶冠)을 쓰고 있었다. 발에는 짙푸른 빛깔의 운화(雲靴)를 신은 채였다. 그 몸집은 송백(松柏)처럼 꼿꼿했으며 기세는 마치 큰 산처럼 웅혼했다. 그러나 역시 얼굴은 금빛 안개에 싸여 있었고, 기운도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뒤이어 맞은편 안개벽에서도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키가 백여 장에, 몸에는 금빛 수면탄두연환개(*獸面呑頭連環鎧: 머리를 집어삼킬 듯한 짐승 얼굴이 새겨져진 고리를 연결해 만든 갑옷)를 입었고, 겉에는 밝은 황색 장포를 두른 형체였다. 날실을 벼이삭 무늬로 엮어 만든 허리띠를 찼고, 발에는 새카만 호두화(虎頭靴)를 신어, 앞 사람과 마주 서니 마치 위풍당당한 두 명의 신장(神將)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심협은 이번에 나타난 형체의 얼굴에도 금빛 안개에 덮여 있는 것을 보고는 혹시 자신의 얼굴도 저들에게는 저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나타난 두 형체는 서로 눈을 맞추고는 각자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뒤이어 땅 위의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동시에 엇 하고 외쳤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보통 사람의 크기로 변하더니 곧장 다가왔다.
“도장, 설마 이자가 네 번째 사람입니까?”
조금 더 빨리 다가온 은빛 갑옷의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그렇다네. 여기 도우가 바로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던 네 번째 사람이라네.”
하얀 옷의 노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황의의 사내가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참 기다렸네. 그럼 이제 한 사람만 남았는데, 아직 안 나타났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좀 괴상해서 매우 날카롭고 가늘었고, 심지어 조금 귀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마지막 한 사람의 소식은 이 늙은이가 이미 실마리를 좀 찾았으니 두 도우는 걱정할 것 없네.”
하얀 옷의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잘됐군요. 그럼 우리 지난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할까요?”
심협은 그들의 대화를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아차렸다. 뒤에 온 두 사람은 자신을 끊임없이 살펴보면서도 정작 그 정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