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요채(妖寨)
먹구름 속 요물의 기운은 매우 강력했지만, 그가 진즉 기운을 거둔 까닭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았다.
이 검은 요운(妖雲)은 이 산림 안을 대강 한 번 뒤지고는 이내 먼 곳으로 날아가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몇 호흡 만에 저 앞 하늘 끝자락으로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을목선둔을 시전하여 앞으로 수십 리를 전진해 어느 숲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가를 바라보니, 그 검은 구름은 저 앞 하늘 끄트머리에 나타나 있었는데, 여전히 끝부분을 살짝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매우 빨라서 살짝 보이던 끝부분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심협은 다시 을목선둔을 시전해 계속해서 구름을 따라갔다. 그러나 검은 구름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고, 들키지 않도록 그저 멀찍이 떨어져 따라갈 뿐이었다.
이렇게 여러 번 연이어 꿈을 꾸다보니 심협은 꿈속 세계에 대해 대강은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요마들의 동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이 요괴를 바짝 뒤쫓으며 마족의 동태를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 남짓 뒤쫓은 후에야 먹구름이 마침내 속도를 늦추더니 어느 산맥으로 내려갔다.
허공에서 모습을 나타낸 심협은 눈앞의 거무스름한 산맥을 살폈다.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우뚝 솟았고, 바위가 많은 반면 풀과 나무는 매우 적어 황량해보였다.
한편, 산봉우리 위쪽 하늘에는 조각조각 검은 구름들이 쌓여 있어 더없이 음침하고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산을 자세히 살펴보려다가 돌연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이 되었다. 뜻밖에도 앞서 달아났던 마 주인장 역시 이 산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좋아, 일석이조로군.”
심협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번지더니, 체내의 모든 뼈가 한 차례 가벼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곧 그의 외모가 완전히 달라져 둥글둥글한 얼굴의 청년이 되었다. 기운 또한 적잖이 바뀌어 어지간히 가까운 사람도 그가 심협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마 주인장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테지.”
심협은 한 줄기 잔상으로 변하여 산맥 깊숙한 곳으로 날아갔다.
* * *
어두침침한 동굴. 음기가 감돌고 살기가 하늘을 찔렀으며,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가득하여 욕지기가 날 정도였다.
먹구름 한 덩이가 빠르게 날아와 어두운 동굴 안에 들어서더니, 곧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매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요괴로, 깃털은 까맣고 부리는 금빛이었으며, 몸 주위로 검은 안개 같은 요기가 감돌았다. 두 눈은 날카롭고 차가워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매 요괴의 몸 주위에 맴돌던 먹구름이 흩어지자 커다란 물체들이 쿵 소리를 내며 잇달아 떨어졌다. 늑대와 호랑이, 사자, 표범 등 수많은 들짐승이었다.
이 짐승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일종의 미혼 요술에 걸린 것 같았다.
“왜 겨우 이것뿐이냐?”
걸걸한 목소리가 동굴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이미 반년이 넘게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어. 주위 수천 리 숲을 벌써 몇 번이나 긁어모았는지 모른다고! 나는 이번에도 거의 만 리 밖까지 나가서야 겨우 찾아낸 것이다. 적은 것 같거든 다음 번 혈식을 찾을 때는 네가 직접 가라. 나는 이 고생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으니.”
매 요괴의 퉁명스런 대꾸에 걸걸한 목소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담담히 대꾸했다.
“적으면 적은대로 하지. 그 대인께서 이해해주시면 좋겠군.”
“도대체 왜 우리가 인간족을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게지? 인간족의 정혈은 순수해서 이런 잡다한 짐승들의 피보다 훨씬 낫고, 혈제(*血祭: 산 제물을 죽여서 그 피를 바치는 제사)에 더 적당한데 말이야. 그리고 인간들은 개미 떼처럼 많아서 얼마든지 잡아올 수 있다고!”
“그야 모르지. 어쨌든 대인의 분부인데 별 수 있겠나.”
매 요괴의 퉁명스런 불만에 걸걸한 목소리가 탄식하듯 답했다.
“흥! 듣기로 그 대인도 예전에 인간족이었다더니, 분명 그 버러지들에게 자비심을 품고 있는 거겠지. 정말이지 여인네라 마음이 여려 터졌다니까.”
매 요괴는 ‘그 대인’에게 불만이 아주 많은 듯 신랄하게 비웃었다.
‘입 다물어! 대인께서 안에 계시다! 그녀는 치우 대신(大神) 휘하의 총아(寵兒)라고! 그녀에 대해 뒷말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게야?’
걸걸한 목소리가 다급히 전음으로 외치자 매 요괴는 기겁하며 입을 다물고 긴장한 얼굴로 안쪽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든 도망칠 생각으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매 요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얼른 들어오기나 해. 네가 요즘 자주 출타하는 바람에 이미 수련이 많이 지체되었다고.”
걸걸한 목소리의 말에 매 요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 깊숙한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심협이 산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산골짜기에서 거대한 요채(*妖寨: 요괴들의 소굴)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방에 크고 높은 감시탑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탑마다 수많은 작은 요괴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또한 못해도 수만은 되어 보이는 요괴 병사들이 울타리 근처를 순시하거나 진법을 훈련했다.
요채 한가운데에는 10여 개의 거대한 가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요채는 구성이 제법 그럴듯했지만, 감시탑이든 가옥이든 하나같이 조잡한 데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주위에는 법진이나 결계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요채라기보다는 임시 거점 같은데? 이 요괴들이 누군가와 전쟁 중인가?’
심협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광경을 잠시 살피다가 산골짜기 안으로 잠입했다.
요괴 병사들이 많기는 했지만 심협의 경지가 월등한 데다 사월보와 을목선둔의 신묘함이 더해지자 누구도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심협은 겹겹의 수비를 가뿐히 뚫고 지나가 금세 산골짜기 중심의 어느 가옥 옆에 이르렀다.
그는 일단 멈추더니 은밀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겼고, 가옥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 방금 검은 구름이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을 똑똑히 봤으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식을 펼쳐 가옥들을 살폈다. 10여 개의 방에는 응혼기와 출규기 경지의 작은 요괴 몇 마리만 있을 뿐, 대승기나 진선기 요괴는 없었다. 더욱이 마 주인장 역시 보이지 않았다.
심협이 다시 한번 자세히 감지해보려는데,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보게 아우, 우리가 흑랑산(黑狼山)에 온 지도 며칠이나 지났네. 한데 대왕께서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지. 매일같이 군사훈련밖에 하지 않으니 정말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야.”
어느 방 안에서 흑돼지 요괴 하나가 늑대머리 요괴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누가 아니랍니까! 허나 대왕의 분부이시니 우리는 명을 들을 수밖에요. 이 빌어먹을 날들이 얼른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늑대 머리 요괴가 말했다.
‘흑랑산이라……. 이곳은 남첨부주인가보군.’
심협은 현실 세계에서 오계국으로 향하는 동안 여러 지방을 거쳤고, 백소천에게서 곳곳의 지명을 대강 들어 알게 되었는데, 흑랑산은 그중 하나였다.
“이 황폐한 산에서 머무는 것도 지겹지만, 그보다는 매일 이런 변변찮은 음식만 먹으니 환장하겠단 말이지. 큰 대왕께서는 줄곧 폐관 중이시고, 이(二)대왕께서도 막 돌아오셨으니 조만간 폐관에 들어가시겠지. 당분간은 나오지 않으실 게야. 아우님, 그러니 우리 천우국(天佑國)에 가서 인간족의 피를 좀 약탈하면 어떤가?”
돼지 머리 요괴가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히 제안했다.
“저(猪)형, 형님은 살가죽이 거칠고 살집이 두꺼워 혹독한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 아우는 안 됩니다. 조금만 참읍시다.”
늑대 머리 요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들은 심협은 이제 완전히 확신하게 됐다. 천우국은 서역 여러 나라 중 하나이니, 이곳은 남첨부주의 서역 지대가 맞다.
‘저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곳 요채의 우두머리는 폐관 중이로군.’
심협은 신식으로 가옥의 곳곳을 살폈고, 곧 기이한 방을 찾아냈다.
그 방의 바닥에는 땅속 깊은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는데, 칠흑같이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엷은 검은 안개 한 줄기가 통로 깊은 곳에서부터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땅속에 숨겨진 사연이 있는 듯했다. 아마도 그 두 대왕이 이곳에 있을 터.
심협이 신식을 거두고 손을 휘두르자 몸에 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더니 은빛 그림자가 옆에 떠올랐다. 이는 바로 대승기 천병이었다.
“가서 아래쪽을 좀 살펴보아라.”
심협은 손을 들어 천병의 몸에 봉인을 더해 기운의 파동을 봉인했고, 대신 신식을 한 가닥 불어넣으며 담담하게 분부했다.
은빛 천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번쩍 몸을 날려 바닥으로 들어갔다.
천병은 영체(靈體)인 만큼 거침없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 금세 그 통로 안에 이르러 깊은 곳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이 통로는 엄청나게 길어서 천병은 한참을 날아간 뒤에야 끝에 이르렀다.
통로 밑바닥은 거대한 지하 동굴로, 크기가 무려 천 장에 가까웠다. 또한 그 안에는 수많은 회흑색 종유석들이 높이 솟아 있었고, 영기가 매우 짙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음살(陰煞)의 기운이 더 짙었고, 공기 중에는 시뻘건 안개가 가득했다. 모두 동굴의 중심 지역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심협은 천병을 조종해 동굴 중심을 둘러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동굴 한가운데의 바닥에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웅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시뻘건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액체에서는 수많은 기포들이 부글부글 솟았는데, 놀랍게도 강렬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신선한 피였다.
모든 피 웅덩이 옆에는 검붉은 기둥이 하나씩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위에는 법진 같은 부적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또한 10여 개의 피 웅덩이는 하나의 진형(陣形)을 이룬 상태였고, 각 웅덩이들 주위의 법진도 하나로 연결되어 10여 개의 작은 법진이 하나의 큰 법진을 이루었다.
무수한 검붉은 부적 문양이 쉬지 않고 번쩍였고, 법진도 윙윙거리며 운행했다. 이에 피 웅덩이 속의 붉은 선혈이 용솟음치면서 끝없이 피비린내를 풍겼다.
강력한 마기가 피비린내와 한데 뒤섞여 있었고, 그 피 웅덩이마다 여러 마리 요괴들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 요괴들은 하나하나가 최소 대승기 이상으로, 웅덩이 안의 혈기와 마기를 흡수하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큰 피 웅덩이에는 거대한 요괴 두 마리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 마리는 검은 호랑이 요괴로, 사람 몸에 머리는 호랑이였고, 온몸에는 근육이 울끈불끈 솟았으며, 이마에는 금빛 왕(王)자 무늬가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사람의 몸에 매의 머리를 한 대요(大妖)였다.
이 두 마리 요괴는 모두 진선기로, 심협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협을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피 웅덩이 10여 개의 한가운데였다. 그곳에는 자흑색 돌덩이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영롱한 자색 빛을 발하는 것이 지극히 진귀한 보물 같았다.
이 자흑색 돌덩이 위에는 자줏빛 구슬 하나가 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가부좌를 튼 사람이 어렴풋이 비쳤지만, 생김새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혈광이 바닥의 법진 문양을 따라 법진 곳곳의 피 웅덩이에서 몰려와 자흑색 돌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자흑색 돌덩이의 다른 끝으로 뻗어 나가 혈광이 순수하게 변하고 나면 자색 구슬 안으로 흘러들었다. 자줏빛 구슬 표면에 떠오른 핏빛 주문은 이 혈광들을 흡수하는 듯 쉬지 않고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