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48화 (448/1,214)

448화. 보적(寶籍)

노인이 멈춰 선 곳에는 석상(石像) 일고여덟 개가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심협도 아까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노인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차례 훑어보더니, 어느 작달막한 석상 앞에 이르러서는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더듬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일각(一刻: 약 15분)쯤 지나자,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듯한 철컥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고, 석상과 근처의 바닥까지 천천히 아래로 꺼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통로가 드러났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의 눈이 커졌다.

“과연 여기였어!”

잿빛 옷의 노인은 신이 난 듯 중얼거리고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곧장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통로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심협은 슬그머니 걸어 나와 그 검은 통로 쪽으로 신식을 뻗었다.

하지만 통로 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가득 차 있어서 신식은 들어가자마자 속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협은 통로 쪽으로 다가갔고, 입구에서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걸음을 옮겼다.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심협은 금제의 힘이 맑은 바람처럼 허공에서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금제는 신식만 제한할 뿐 수련 경지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통로에는 먼지가 가득한 계단들이 층층이 땅속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위로 발자국이 저 아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잿빛 옷의 노인의 발자국일 터였다.

심협이 의식을 움직이자 그의 몸이 바닥에서 떠올라 땅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통로로 날아 들어갔다.

통로는 깊지 않아 금세 끝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각각 좌우로 통하는 두 갈래의 긴 복도였다.

두 복도 모두 꽤 길어서 어디로 통하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왼쪽 복도 바닥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어서 잿빛 옷의 노인이 그리로 갔음은 분명해 보였다.

이를 본 심협은 주저 없이 오른쪽 복도를 향해 날아갔다.

그곳은 보물이나 어떤 비술이 숨겨진 은밀한 곳처럼 보였다.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의 수명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복도는 매우 길고 구불구불했으며 통로 양옆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는 약간 실망했다.

한참을 나아가니 앞에 드디어 뭔가가 나타났다. 복도의 끝 좌우에는 각각 두 개의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문에는 자물쇠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가 오른쪽에 있는 돌문을 가볍게 밀어젖히니 문 안쪽에는 제법 커다란 석실이 한 칸 있었고, 석실은 그리 넓지 않아 둘레를 합쳐봐야 겨우 10장에 미치지 못했는데, 그 안에는 나무 진열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병과 단지 등 잡다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약병이었고, 각각의 아래에 화양단(化陽丹), 자삼단(紫參), 혈련단(血蓮丹) 등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나무 진열대 위를 재빨리 훑어보니 고서에서 기록을 보았던 약이 적지 않았고, 모두 쓸모가 많은 영단(靈丹)들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병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거나 너무 오래되어 약효를 잃은 상태였다.

심협은 크게 실망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석실 곳곳을 계속해서 뒤졌다.

하늘은 노력한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던가. 그는 마침내 한쪽 구석에서 검은 옥병을 하나 발견했다.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옥병은 한옥(*寒玉: 맑고 차가운 옥)으로 만들어진 듯했고, 비교적 새것처럼 보였으며, 마개가 단단히 막혀 있었다. 윗면에는 푸른 부적이 한 장 붙어 있어 무언가 소중한 것을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부적은 아직 효력을 잃지 않고 푸른 빛을 희미하게 번득였다.

심협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손에 환한 금빛을 발하여 검은 옥병을 감쌌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에야 그는 푸른 부적을 떼어낸 뒤 조심스레 병마개를 쥐고 있는 힘껏 홱 뽑았다.

뽁 하는 소리와 함께 병마개가 순조로이 뽑혀 나갔다. 한데 병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미처 제대로 보기도 전에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먼저 솟구쳐 나왔다.

심협은 안력(眼力)응 돋우며 손에 금빛을 거세게 내뿜어 검은 기운을 그 안에 꽁꽁 가두었다.

황정경은 방촌산의 진파보전(*鎭派寶典: 한 문파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이 담긴 책)으로, 위력이 엄청났다. 뿐만 아니라 독과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 등에도 강한 억제력이 있어서 이 검은 기운을 가두는 것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한데 그가 내뿜은 금빛이 검은 기운에 닿자, 검은 기운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금빛 안으로 녹아들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심협은 몸속에 뭔가가 녹아든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순간 낯빛이 변해 곧바로 병마개를 다시 막고는 푸른 부적을 병마개 위에 붙였다. 이어서 검은 옥병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몸속을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편한 곳도 없었고, 법력의 운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감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그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볼 때가 아니니 나중에 다시 살펴보자.’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에 검은 옥병을 챙기고는 잠시 석실을 더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몸을 돌려 맞은편 석실로 향했다.

이 석실의 대문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아 가뿐히 열렸다. 내부는 좀 전의 석실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이곳은 침실 같았다. 앞부분에는 홍목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등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으며, 탁자 왼쪽 벽 가까이에는 많은 책들이 놓인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더 안쪽에는 넓고 커다란 돌 침상이 하나 있었고, 돌 침상 왼편에는 높이가 1척쯤 되는 푸른 돌 걸상이 놓여 있었다. 돌 걸상 위에는 서책 몇 권과 청동 촛대 하나가 전부였다.

한편, 돌 침상 위에는 뜻밖에도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싹 말라비틀어진 한 구의 시체였다.

심협은 시체에도 아랑곳 않고 석실 안을 빠르게 뒤져보기 시작했고, 이내 그 서책들까지 들춰보았다.

이 책들은 모두 영재와 영초를 소개해 놓은 고서들로, 방촌산의 고서들 못지않은 것이 무척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심협은 이런 쓸모 있는 고서들을 중요시했기에, 나중에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자 모두 챙겼다.

이어서 그는 시체 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신식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시신을 뒤져볼 수밖에 없었지만, 끝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 시신은 생전에 어떤 신분이었는지, 몸에 저물 법기도 없었고, 법기나 법보 따위도 없이 검은 옷 한 벌이 전부였으며, 그마저 태반은 부식된 상태였다.

심협은 조금 실망하여 시신을 침상에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낙담해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인지, 시신을 내려놓을 때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심협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속으로 자신을 책망하며 시신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그때, 툭 하고 시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하얀 옥간이었다.

이 옥간은 보통 옥간과 사뭇 달라 보였고, 표면에는 변화무쌍한 빛이 어렴풋이 감돌았다.

심협은 몸을 굽혀 옥간을 집어든 뒤, 신식을 넣어보고는 곧 안색이 변했다.

그 옥간은 과연 신기하게도 보통 옥간과 달리 내부가 평범한 옥간보다 백배는 컸다.

옥간 속의 그 거대한 공간에는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는데, 이 글자들은 평범한 약초를 시작으로 수선계의 온갖 영초와 영약에 대한 정보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언급한 영초들은 수만 종이 족히 넘었고, 영초의 산지와 성질, 재배 방법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협은 방촌산에서도, 백가와 장안성에서도 영초에 관한 고서나 서적들을 제법 보았지만, 이 옥간의 내용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옥간의 맨 끝에 각 경지와 용도를 두루 언급해 놓은 30여 가지 단방(*丹方: 단약을 만드는 조제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것은 경지 돌파를 도울 수 있고, 어떤 것은 상처를 치료하고 해독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육신을 강화할 수 있는 단약도 있어 견문을 크게 틔워주었다. 특히 그중 수명을 늘려주는 단약도 세 종류나 있었다. 비록 필요한 재료가 희귀하긴 했지만 천년영유나 용혈에 비하면 구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취보당이 단약을 만드는 데 능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심협은 옥간을 한참 들여다본 뒤 신식을 거두고는 조심스레 잘 챙겼다.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 망가뜨리면 큰일이었다.

그가 석실의 다른 곳을 마저 살펴보려는데, 굳게 닫혔던 대문이 돌연 활짝 열리며 잿빛 옷의 노인이 나타났다.

‘젠장! 옥간을 살펴보는 데 정신이 팔려 바깥 동정에 주의하지 못했어!’

심협은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습격에 대비했다. 한데 뜻밖에도 노인이 이리 말하는 것 아닌가!

“심협? 심협! 당신이군!”

이에 심협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시오? 귀하는 누구십니까?”

그는 몇 차례 꿈속 세계에 들어왔으나 이 노인은 분명 낯설었으니 아마 만난 적이 없을 터였다.

잿빛 옷의 노인은 검은 기운 뒤의 눈을 두어 차례 반짝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밖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잠깐! 가지 마시오!”

심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곧바로 뒤를 쫓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비둔술을 쓰기 좋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신법만을 써서 추격전을 벌였다.

노인의 신법도 상당히 고명하여 마치 영사(靈蛇)가 맹렬히 내달리는 듯해서 심협은 쉽게 따라잡지 못했다.

두 사람은 쫓고 쫓기며 금세 통로를 벗어나 어느새 땅 위로 올라왔다.

그 순간, 잿빛 옷의 노인은 곧 온몸에서 검은 빛을 거세게 내뿜으며 검은 뱀의 형상을 한 둔광으로 변하더니, 놀라운 속도로 달아났다.

하지만 심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손을 뒤집어 육진편을 꺼내더니 철편과 하나가 되어 칠흑같이 검은 긴 무지개로 변하더니 금세 노인을 따라잡았다.

심협은 손을 들어 멀지 않은 곳의 잿빛 옷 노인을 향해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금빛 용의 발이 노인의 둔광 위로 나타나 확 그러쥐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둔광이 찢겨나가면서 용의 발이 노인을 그대로 사로잡았다.

대번에 안색이 변한 노인이 황급히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잿빛 보광(寶光)이 하늘로 솟구치며 커다란 잿빛 번(幡)으로 변했다. 이 번 위에는 잿빛이 반짝였고, 잿빛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잿빛 번은 위력이 제법 강한 보물이라 용의 발이 그러쥐어 봐야 마치 솜뭉치를 쥐는 것처럼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심협은 황정경을 오래 수련한지라 이 용의 발을 다루는 솜씨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잿빛 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옆으로 휘돌아 잿빛 옷의 노인을 붙잡았다.

심협은 그를 해치고 싶지 않아 노인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기운만을 붙잡으려 했다.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찢겨 나가며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이었단 말인가!”

심협은 경악한 듯 외쳤다. 잿빛 옷의 노인은 바로, 당시 마수수를 따라 건업성에 가게를 열었던 마 주인장이었다. 한데 그를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수많은 의혹이 치솟았다.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상대의 경지가 당시에는 연기기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진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