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47화 (447/1,214)
  • 447화. 황폐한 유적

    “성승(聖僧)이시여!”

    한 노승이 선아를 보고 얼굴에 동경심을 드러내며 엎드려 절했다.

    이미 선아에게 대단히 탄복했던 다른 서역의 승려들도 잇달아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그 주위에 앉아 함께 경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거대한 금빛이 사람들의 몸에서 치솟아 곧 금색 빛기둥을 이루며 하늘 끝까지 돌진했고, 염불 소리도 자극을 받아 온 사막에 울려 퍼졌다.

    멀리 적곡성 안의 민중들은 이런 불적(佛迹)을 보고 너도나도 성 밖의 금빛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여러 불문의 보살들과 부처의 성스러운 이름을 되뇌었다.

    금색 빛기둥 안, 첨과는 노기가 사라지고 평화로워진 낯빛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 줄기 허상이 그의 시체에서 솟아올랐는데, 이목구비로 보아 바로 첨과였다. 다만 이때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털끝만큼의 원한도 없었고, 그저 복잡한 눈길로 선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선아는 이 모습을 보고 독경을 멈췄다.

    그는 이번에 법술을 시전하면서 소모가 꽤 컸던 듯 피곤한 기색이었다.

    “첨과 시주, 황천까지 길이 멉니다. 이승에서 머물지 말고 일찌감치 윤회의 길에 오르십시오.”

    선아는 아래턱의 땀을 쓱 문질러 닦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첨과는 말없이 잠시 묵묵히 있더니 손을 들어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시체에서 한 줄기 하얀 빛이 나타나더니 옥간(玉簡) 하나가 신혼의 손에 떨어졌다. 첨과가 손가락으로 옥간 위를 짚자 손끝에서 하얀 빛이 반짝였지만, 곧 사라졌다.

    그는 손을 휘둘러 선아에게 옥간을 날렸다.

    환한 금빛이 선아의 손목 위 염주 속에서 쏘아져 나와 하얀 옥간을 떠받치고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아니, 이건! 바닥의 봉인을 수리하는 방법이잖아.”

    염주가 흥분해서 말했다.

    “길 잃은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첨과 시주.”

    선아는 크게 기뻐하며 첨과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첨과는 선아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주변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에 일말의 자책감이 스치더니 돌연 양손을 결인했고, 온몸에 갑자기 눈부신 하얀 빛이 폭발하며 점점 더 밝아졌다.

    “첨과 시주! 안 됩니다!”

    선아가 안색이 크게 변하여 손을 들고 뭔가를 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름이 1장이나 되는 하얀 광륜(光輪)이 떠올라 눈부신 빛을 발하여,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얀 광륜은 확 줄어들더니 또다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이에 하늘이 거의 절반 가까이 점점이 하얀 빛으로 뒤덮여 몹시도 아름다웠다.

    이 하얀빛들은 곧 산산이 흩날려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첨과 시주, 이는 또 무엇 때문이오……?”

    선아가 가볍게 탄식하며 나지막하게 불호를 읊조렸다.

    * * *

    심협은 끝없는 어둠에 빠져들었다. 어둠 속에서는 거대한 힘들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 온몸 마디마디 무한한 고통으로 가득 차 혼절한 상태에서도 육신과 신혼 모두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흐트러진 정신이 천천히 응집되면서 심협이 눈을 떴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 커다란 건물의 천장이었는데, 주위의 들보와 벽 위에는 예스러운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어 제법 내력을 지닌 대전인 듯했다.

    다만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 바깥의 음침한 하늘이 얼핏 보였다.

    “여긴……?”

    심협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대전의 한가운데에는 조각상이 하나 우뚝 서 있었는데, 이미 중간부터 끊어져 몇 조각으로 갈라진 채 바닥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대전 문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으나 아무도 치우지 않아 황량한 광경이었다.

    심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부상을 떠올리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웅혼한 힘의 법력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진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느낀 순간, 깨달았다.

    “또 꿈속에 들어왔구나.”

    그는 손을 들어 손끝에 빛나는 가느다란 금빛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앞서 첨과에 이어 치우의 허상에 맞서느라 너무 오랫동안 꿈속의 경지를 소환했었다. 이전에 두 차례 소환한 것을 합친 것보다 훨씬 길었으니 현실 속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기분이 잠시 가라앉았지만, 곧 활기를 찾았다.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근심해봐야 헛수고다. 중요한 것은 해결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심협의 현실 속 수련 경지는 이제 막 출규기에 도달하여 대승기에 들어서려면 아직 멀었으니 경지를 돌파해 수명을 늘리는 것은 힘들 터. 수명을 늘려주는 보물과 단약을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잠시 잠자코 있더니 몸을 일으켜 대전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별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전 문밖을 나선 뒤에야 그는 자신이 어느 높은 산꼭대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대전 밖에는 길고 긴 백옥 계단이 아래로 완만하게 뻗어 있었고, 산허리 곳곳에는 똑같이 반파된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백옥 계단 위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이곳은 마치 어떤 유적 같았다.

    “또 방촌산 비슷한 곳으로 보내진 것인가?”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래쪽 건물들은 파괴되고 황폐해졌지만, 여전히 선도(仙道)의 기운이 배어나왔다. 속세에 있을 법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어느 수선 종문의 잔해 같았는데, 이런 곳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에 그는 신식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이 유적에는 파괴된 건물들과 평범한 바위, 풀과 나무들만 있을 뿐 보물의 기운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그저 신식으로 대강 살펴보았을 뿐이니, 보물을 찾으려면 더 자세히 탐색해야 할 터였다.

    심협은 우선 대전으로 되돌아가 내부 곳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직접 건물을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반 시진쯤 지난 뒤, 그는 산중턱의 어느 건물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이렇게 오랫동안 찾았음에도 이 파괴된 건물들은 완전히 텅 비어 있어 보물 비슷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냥 빈껍데기만 남은 유적인가?’

    심협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신식을 뻗어 주위를 자세히 감지해보았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마침내 향 한 개가 다 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어느 폭포 근처의 산벽에서 이상한 파동을 감지했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 산벽에서는 한 가닥 금제의 파동이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신식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심협은 그쪽으로 걸어가 손가락을 구부리고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금빛이 한 줄기 손에서 날아가 산벽에 닿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손을 댄 채 눈을 감고서 산벽의 상태를 느끼며 손가락을 천천히 가져가 금빛을 조금씩 그 안에 녹여 넣었다.

    그러자 고요하던 산벽이 마침내 위에 노란 빛이 한 층 떠올랐고, 두툼하고 튼실했던 벽이 투명해지면서 안에 또 다른 별천지가 펼쳐지는 듯했다.

    “과연 뭔가 있구나!”

    심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다섯 손가락에 환한 빛을 발하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금빛 용의 발이 그의 손에서 튀어나가 누르스름한 빛 장막 위를 매섭게 그러쥐었다.

    찌익!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 장막 위로 다섯 줄기의 물결무늬가 떠오르면서 빛 장막 전체가 크게 흐트러졌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견고한 금제로군.”

    심협은 이 금제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손을 뒤집고 진해빈철곤(鎭海鑌鐵棍)을 꺼내 곧장 빛 장막을 내리쳤다. 진해빈철곤은 대충 휘둘러도 용의 발보다 위력이 강했기에, 산봉우리 전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누르스름한 빛 장막이 거울처럼 깨져나갔다.

    흐릿했던 벽이 사라지고 검은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그 안쪽은 어느 산굴로, 하얀 빛줄기가 가닥가닥 새어나왔다. 그러나 조금 굽이져 있어 깊숙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진해빈철곤을 거둬들인 뒤 신식으로 산 동굴 안쪽을 살펴보고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이 깊지 않아서 금세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그곳은 공간이 갑자기 탁 트였는데, 폭이 족히 백 장은 되었고, 약원(*藥園: 약초를 심어 가꾸는 밭)이 지어져 있었다.

    약원 안에는 많은 영초(靈草)와 영과(靈果)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영기가 넘쳐흐르는 것이 모두 보통 물건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이것은 후토지(厚土芝)! 이미 잎이 아홉 개나 돋아났으니 약령(藥齡: 약초의 나이)이 적어도 2천 년은 되었겠어!”

    심협이 잎이 아홉 개 달린 영지(靈芝) 한 그루를 감탄한 듯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약초는 나무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귀중한 보물로, 약령이 2천 년에 이른 후토지라면 진선기 수사에게도 큰 효과가 있을 정도였다.

    그는 흥분을 억누르며 다른 영물(靈物)들을 둘러보았다.

    “용령과(龍靈果)! 몽로화(夢露花)! 현광등(玄光藤)!”

    영초를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그의 눈에는 점점 흥분이 들어찼다.

    이 영초들은 어느 것 하나 진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심지어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것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이토록 많은 데다 하나같이 약령도 높았다.

    ‘진귀한 단약들이 이렇게 많다니, 여기는 혹시 어느 큰 종문의 유적인가?’

    심협은 금방 냉정을 되찾고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그러면서도 손은 어느새 이 영초와 영과들을 모조리 따서 챙기는 중이었다.

    일을 마친 심협은 약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아쉽게도 다른 보물은 없었고, 그는 그곳을 떠나 계속해서 산 아래쪽을 뒤졌다.

    약원을 발견하고부터 운수가 트였는지, 그 뒤로는 이따금 수확이 있었다.

    그는 금세 산기슭 가까이에 있는 어느 높고 커다란 건물 앞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상당히 넓었는데, 50여 동의 궁전과 누각으로 이루어진 사찰 같았다. 과거에는 장관을 이루었겠으나 지금은 태반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다만 이곳의 건물들은 세월이 아니라 싸움으로 인해 무너진 것으로 보였다.

    이 건물군 맨 앞의 한 대전에는 편액 하나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글자는 이미 흐릿해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에서 한 줄기 금빛을 쏘아 편액 위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자 커다란 세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취보당(聚寶堂)! 대당 3대 상회 중 하나인데…… 그렇다면 여기는 대당 경내인가?”

    심협은 그저 신식으로 대강 둘러보았을 뿐,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상태라 편액을 본 후로 몹시도 놀랐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궁전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전 곳곳에는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너무 심하게 파손된 상태라 안쪽을 돌아보아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이에 실망해 막 그곳을 떠나려던 심협은 갑자기 얼굴빛이 살짝 변하더니 근처의 커다란 바위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동시에 기운을 거둬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회색 둔광 한 줄기가 멀리 하늘가에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둔광은 상당히 빨라 눈 깜짝할 사이 근처에 이르렀고, 한 줄기 그림자로 변해 날아 내려왔다.

    잿빛 옷을 입은 상대의 경지는 매우 높아 이미 진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검은 기운으로 한 겹 덮여 있어서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칼로 미루어 노인인 듯했다.

    잿빛 옷의 노인은 이곳에 익숙한 듯, 내려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뒤 심협이 숨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심협은 흠칫 놀랐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상대는 진선 초기 정도인 듯하니, 만약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면 사로잡아 이곳의 상황을 물어볼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잿빛 옷의 노인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대로 지나쳐 백여 장을 더 간 뒤에야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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