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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39화 (439/1,214)
  • 439화. 다시 허무로 돌아가다

    뇌겁이 계속 떨어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임달은 낮게 외치며 미간에서 혈광을 뿜어냈다. 그러자 발아래의 혈정 연화대가 환하게 빛나며 그 위에 이어진 가닥가닥 핏빛 수정 실들도 잇달아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법단 위에 있던 여러 고승들은 미간이 불타듯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들의 몸을 뒤덮은 공덕의 빛은 차례로 핏빛 수정 실을 따라 흘러 임달의 발아래 혈정 연화대로 모여들었다.

    한순간 혈정 연화대가 강렬한 빛을 뿜더니 연꽃잎의 핏빛을 흐릿한 하얀 빛이 뒤덮었다. 보살의 허상 위로도 하얀 빛이 얇은 비단 선의(*禪衣: 참선을 하는 승려들이 입는 옷)를 한 겹 응집해냈다.

    이 비단 선의 위에 떨어진 벼락은 순간 위력이 크게 줄었고, 놀랍게도 그 옷조차 뚫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임달은 눈에 희색을 띠며 서둘러 승려들의 공덕을 빨아들였다.

    타란 같은 고승들은 본디 공덕이 깊고 두터워 그런대로 버텨낼 수 있었지만, 아직 뿌리가 얕은 선사들은 공덕의 빛이 금세 말끔히 흡수되어 버렸다. 동시에 생명력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본래는 중년의 모습이었던 선사의 얼굴과 몸이 빠르게 말라가더니 눈썹과 수염 역시 하얗게 변하면서 빠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앙상한 해골로 변했다.

    선아는 시각화되어 나타난 공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미간이 화끈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생명력이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심령을 굳건히 지키며 반야심경을 읊조리는 것이 전부였다.

    바로 그때, 그의 앞가슴에 있던 사리가 갑자기 금빛 광채를 발하며 온몸을 감쌌다. 그 짙은 빛이 밝아지는 순간, 마치 태양이 처음 떠오르듯 주위에 있던 모든 고승들의 광채를 가렸다.

    “저것은!”

    타란선사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것이 공덕이란 말인가? 어찌 이리 웅대할 수가……?”

    사람들의 탄성 속에 선아의 뒤에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금선법상이 맺혔다.

    “금선자의 환생! 역시 금선자의 환생이었어! 내 짐작이 맞았군! 네가 있는데 어찌 겁을 겪어내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 크하하하!”

    임달은 이를 보고 오히려 실성할 듯 기뻐했다. 선아의 정체에 대해 이미 짐작한 바가 있었던 그는 성에 있을 때부터 상대에게 손을 대려 했으나, 화호초의 방해로 계획이 어그러져 결국 봉신산까지 쫓아가서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아가 첨과를 교화하는 데 성공하자 그가 금선자의 환생임을 더욱 확신했다. 그리하여 선아가 대승법회에 참가하도록 유인한 것이다.

    “금선자의 환생이 있으니 다른 놈들은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하하하!”

    임달은 손을 휘둘러 다른 설법대의 통제를 아예 거둬버리고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선아를 세게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그 작디작은 몸을 법단에서 끌어와 자신의 앞 허공에 띄워 제압해두었다.

    온몸이 금빛으로 휩싸여 있던 선아는 머릿속에 문득 수많은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표정이 차차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져 갔다.

    임달이 결인하여 끌어당기자, 금빛 공덕 불광이 세차게 흘러나와 그의 발아래 핏빛 연화대를 감싸고 순금 빛깔로 물들였다. 보살의 허상에도 금빛이 맺혀 금빛 가사(袈裟)를 한 겹 입게 되었다.

    이 무량공덕의 비호로, 금빛은 하늘을 향해 거꾸로 치솟아 은빛 벼락과 뒤얽혀 서로를 빠르게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늘 깊숙한 곳의 납빛 구름도 금빛에 소화되어 훨씬 옅어진 것 같았다. 임달을 죽여 없애려던 천도의 뜻도 한풀 꺾인 모양새였다.

    “하늘이 나를 돕는 도다. 크하하!”

    임달은 승기를 잡았다 여겨 저도 모르게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심협은 이런 변고들을 지켜보며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지만, 용단이 한 걸음씩 숨통을 조이며 다가오고 있어 선아를 구원할 수가 없었다.

    “너는 저 어린 화상을 구하려 하지 않았더냐? 내 그가 사존 대신 천겁을 받아 재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해주마! 실로 통쾌하구나! 하하하!”

    용단도 법단 쪽 상황을 보고는 우쭐하여 거들먹거리더니 실제로 더는 공격하지 않고 경건한 자세로 한쪽에 섰다.

    심협은 선아와 용단을 번갈아보며 위험을 무릅쓰고 곧장 선아를 구하러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순간이었고, 심협은 이내 몸을 움직였다. 발아래 달빛을 반짝이며 오른쪽으로 쏜살같이 스쳐지나가 선아가 있는 법단으로 곧장 질주했다.

    이를 본 용단의 눈가에 비웃음이 스쳐 지났다. 그가 기다리던 것이 바로 심협이 이판사판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순간이었다.

    심협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용단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난데없이 심협 앞에 나타나 한 손을 불쑥 내뻗었다. 손바닥 한가운데 피와 살이 갈라지고 무수히 많은 가느다란 검은 수정 실들이 뻗어 나와 천만 개의 쇠바늘처럼 그를 찔러왔다.

    그때, 심협의 머리 위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팔현경이 다시금 빛 장막을 드리워 그를 감싸며 보호했다.

    한데 놀랍게도 검은 수정 실은 이 빛 장막을 그대로 뚫고 심협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심협은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수정 실에 찔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순간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피가 검은 수정 실을 타고 용단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용단은 손에 든 검은 법장을 앞으로 뻗어 심협의 미간을 짚었다. 그러자 심협은 신혼이 심하게 뒤흔들리면서 몸도 몇 차례 흔들리더니 우뚝 멈춰 섰다.

    “심협!”

    백소천이 깜짝 놀라 외치더니 더는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심협 쪽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 무렵에는 조비극도 상대를 물리치고 바짝 뒤쫓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심협의 오른손이 휘황찬란하게 번득였고, 아래로 뒤집힌 손바닥에 납작한 물결 소용돌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분홍빛 요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오더니, 곧이어 거대한 분홍빛 해모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해모충은 나타나자마자 검푸르고 작은 두 눈을 굴리며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짙은 분홍색 안개가 울컥울컥 몰려나와 용단의 머리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용단은 반응이 무척 빨라서 곧장 숨을 멈추고는 즉시 물러나 심협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때, 별안간 한 줄기 붉은 검광이 번쩍이며 그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쏜살같이 날아드는 검광에 용단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고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졌다. 그는 두 손에 가까스로 법력을 모아 검광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지만, 갑자기 검광이 뒤틀리면서 공격이 비껴갔다.

    그는 그제야 조금 전 이미 독에 중독되었으며, 그 독기가 심협에게서 손바닥의 검은 수정 실을 거쳐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이미 한 발 늦은 뒤였다. 붉은 검광이 순식간의 그의 미간을 꿰뚫었고, 홍련업화가 뒤이어 그의 식해 속을 불사르기 시작한 것이다.

    해모충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심협에게 다가와 그의 상처를 쭉 빨아들였다.

    “저 땡중의 음산한 독기가 섞여 있었군. 정말 역겹소.”

    “정말 감사하오.”

    몸이 크게 회복된 심협은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헤헷, 중요한 때에는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무춘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우쭐해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늘에서 갑자기 우렛소리가 울리자 무춘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아이고, 이 망할 곳 같으니라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여긴 왜 이리 건조한 것인가? 어서 이 몸을 돌려보내 주시오.”

    무춘이 목을 움츠리고 허둥대며 말했다.

    “수고했소.”

    심협은 재빨리 손을 휘둘러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

    그때, 백소천과 조비극이 급히 돌아왔고, 세 사람은 동시에 선아가 있는 법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남은 성련법단 선사 셋도 서둘러 돌아와 그들을 다시 가로막았다.

    “우리가 저들을 막을 테니, 자네는 어서 가서 선사님을 구하게.”

    백소천의 당부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달렸고, 이내 광장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때마침 하늘에서 여덟 번째 천뢰(天雷)가 막 형태를 갖추더니 굳센 기백을 띤 채 떨어져 내리려 했다.

    그 무렵, 임달은 여전히 쉬지 않고 선아가 지닌 공덕 불광을 흡수하여 보살 법상을 채우고 있었다.

    선아는 그를 마주본 채 허공에 앉아 있었는데, 몸 바깥은 핏빛 덮개로 뒤덮여 있었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얼굴은 더없이 창백하게 변해진 채였다.

    “선아 사부님!”

    심협이 분노와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외치며 두 손으로 순양검배를 조종하여 임달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안 돼!”

    천겁에 맞서느라 정신이 없던 임달은 얼핏 보고는 벌컥 분노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순양검배에서 전에 없던 가장 강렬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이 검배가 핏빛 빛 덮개를 찌르는 순간, 마치 쌓인 눈이 녹듯 빛 덮개는 빠른 속도로 녹아버렸다.

    핏빛 덮개가 사라지자 선아는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본디 공상(*空相: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텅 빈 상태)이었으니, 다시 허무로 돌아가리라…….”

    그의 눈에 광채가 비치고 몸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던 금색 빛이 빠르게 수축하기 시작하면서 금선자의 허상도 따라서 사라져버렸다.

    지지해주던 선아의 공덕이 사라지자 임달의 보살 허상은 금빛 몸이 떨어져 나가면서 살기가 넘쳤다. 이에 막 떨어져 내리려던 여덟 번째 천둥은 이 변화를 감지하고는 더욱 거센 우렛소리를 발했다. 천둥의 위세도 몇 배로 치솟아 하늘의 먹구름을 흩어버리고 번갯불이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뇌지(雷池)를 드러냈다.

    임달은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고, 그는 더 이상 선아를 붙잡을 겨를이 없어, 다른 고승들의 남은 공덕과 생명으로 이 겁을 견뎌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문득 검은 빛줄기가 천 리 밖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빽빽한 부적 문양을 휘감은 검은 사슬로 변해 그대로 그를 혈정 연화대와 함께 공중에 묶어버렸다.

    “웬 놈이냐?”

    임달은 분노와 당황이 뒤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도 온 힘을 다해 법력을 발산했다. 그의 몸 주위에는 실체화된 붉은 화염이 맺혀 검은 사슬을 맹렬히 태웠다. 그러나 사슬을 단숨에 녹여서 끊지는 못했다.

    그 무렵 마침내 하늘의 위엄이 쏟아져 내려 그를 집어삼켰다.

    꾸르릉! 쾅!

    천둥의 위세는 수백수천 줄기의 벼락이 황막한 대지 위를 마음껏 채찍질하는 듯했다.

    심협은 재빨리 달려가 선아를 구했고, 곤경에서 벗어난 주위의 선사들도 잇달아 서로를 부축하며 도망쳤다.

    이들은 곧장 천여 장 바깥까지 달아난 뒤에야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번갯불 가운데 임달의 몸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고, 온몸에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용솟음쳤으며, 흉악한 귀신의 얼굴들이 그의 몸을 벗어나 망령들처럼 검은 귀무(鬼霧)를 드리운 채 쉬지 않고 맴돌았다.

    “안 돼! 안 된다!”

    임달은 미친 듯이 외쳐댔다. 그러나 주위의 금빛 번개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저승의 귀면들을 사분오열로 쪼개어 완전히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놓았다.

    하늘 위, 뇌지의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떠받치는 경천주(擎天柱) 같은 금빛 번개가 뚫고 내려와 정확히 임달에게 꽂혔다.

    꽈르릉!

    눈부신 금빛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자 금빛 속에서 임달의 몸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동시에 정석(晶石) 같이 검은 용안단환(龍眼丹丸)이 날아왔다.

    금빛 번개 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지를 내리치자, 어마어마한 충격이 아득한 사막에 거대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그러고도 줄어들지 않은 기세가 마치 지맥(地脈)에 곧바로 주입된 듯 한바탕 연쇄 폭발을 불러 일으켰다.

    콰콰쾅! 우르릉!

    사막 아래에서는 갈수록 강력해지는 폭발이 마치 구슬꿰미처럼 사막 깊은 곳을 향해 뻗어나갔다. 지면에는 끊임없이 모래 폭풍이 일어나며 땅이 백여 장이나 갈라져 기다란 협곡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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