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명성이 널리 퍼지다
“금산사라…… 설마 당시 현장법사께서 출가해 계시던 그 선림(*禪林: 선종의 사찰)입니까?”
임달선사는 얼굴빛이 미미하게 변하며 놀란 듯 되물었다.
선아는 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어쩐지 소선사께 불광(佛光)이 덮여 있다 했습니다. 알고 보니 금산사의 고승이셨군요. 당시 현장법사께서는 천신만고 끝에 서천 불국으로부터 대승 불경을 구해와 한이 없는 공덕을 쌓으셨지요.
오늘날 소선사께서 선사님의 의발(*衣鉢: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주는 가사와 발우. 전수받은 사상이나 학문을 뜻함)을 이어받아 다시 우리 서역 땅에 오셨으니 하늘의 징조가 응한 것입니다. 때마침 곧 대승법회가 열리니 소선사께서는 꼭 법단에 오르시어 서역 36국의 수십만 승려들을 위해 설법을 베풀어주십시오.”
임달선사는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며 또다시 깊이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이에 선아는 다소 당황한 듯 심협과 백소천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승 재주가 적고 배움이 얕은 데다 불법에도 조예가 깊지 않아 도저히 법단에 올라 설법할 능력이 되질 않습니다.”
“설법을 하고 진리를 논하는 데에는 높고 낮음, 얇고 두터움의 구분이 없습니다. 소선사께서 왕림하시기만 한다면 승려들에게 설법하시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임달선사가 재차 청하니 선아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소승 사양치 않겠습니다.”
“지극한 영광입니다.”
임달선사가 흡족한 듯 미소 짓더니 말을 이었다.
“역관은 아무래도 누추하니, 선사님들께서는 왕궁으로 옮겨 본왕에게 주인의 도리를 다하게 해주시오. 내 아들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오.”
끼어들 틈을 보던 교련미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리오나, 저희는 이미 이곳에 머무는 것이 익숙하옵니다. 또 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면 분명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할 터이니 진심으로 바라지 않사옵니다. 이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심협이 잠시 주저하다가 거절했을 때였다. 첨과가 또다시 광증이 도졌는지,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안 건너가. 안 건너가!”
선아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합장하여 예를 갖추고는 첨과의 손을 이끌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소선사님, 어찌……?”
임달선사가 의아한 듯 말끝을 흐리자 기련미가 끼어들어 대신 답했다.
“선아 사부님께서는 첨과를 교화하시어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첨과는 몸에 물든 인과가 많고도 무겁습니다. 한데 그를 교화하겠다는 뜻을 품으시다니, 소선사께서는 정말 보도자항(*普渡慈航: 천수관음이 천 개의 팔로 중생들을 구제했다는 행적)의 고승이시군요. 빈승의 정성보다 낫습니다.”
임달선사는 어째서인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웃으며 말했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교련미는 무리를 이끌고 역관을 떠났다.
떠나기 전, 기련미는 심협에게 다시 찾아와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과 백소천은 선아의 방 바깥에 이르러 문을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선아의 목소리에 심협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바닥에는 부들방석 두 개가 깔려 있었다. 선아는 왼편에 가부좌를 틀고 있고, 첨과는 오른쪽에 털썩 주저앉아 변덕스레 흔들리는 눈빛으로 방안을 훑는 중이었다.
“심 시주, 백 시주. 제가 청심주(淸心呪)로 그의 지혜가 트이게 할 터이니, 두 분께서는 저를 도와 바깥을 좀 살펴주십시오. 때가 되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제가 부탁드리지 않는 한 들어오셔서는 안 됩니다.”
선아의 정중한 목소리에 심협과 백소천은 눈을 한 번 맞추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반드시 제일 먼저 우리를 부르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서 정교한 세발향로를 하나 꺼내 놓고, 정신을 집중할 때 쓰는 응신단향(凝神檀香) 한 개비에 불을 붙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심협과 백소천은 방에서 나와 문을 닫고 호위하듯 그 앞에 섰다.
이윽고 방안에서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탁소리와 함께 선아가 경문 읊는 소리도 따라서 울려 퍼졌다.
심협과 백소천은 방문을 사이에 둔 채 염불 외우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차츰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는, 무의식적으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방에는 촛불이 켜진 듯 따스한 빛이 비추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안에서 우당탕 하는 굉음이 울렸다.
좌선 중이던 심협과 백소천은 동시에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소천은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열어젖히려 했지만, 심협이 손을 들어 막았다.
가까이 다가가 문 틈새로 안쪽을 살펴보니 바닥에 구리 향로가 나뒹굴었고, 첨과가 마주 앉아 있던 선아에게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목구비가 일그러진 채 광기어린 얼굴로 선아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흉악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반면 선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손에 목탁을 두드리면서 조용히 불경을 읊조렸다. 첨과가 자신을 치고 때리는데도 꼼짝도 않는 것이 마치 불상처럼 굳건해보였다.
첨과는 한바탕 주먹질이며 발길질을 하고도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돌아서서 바닥에 나뒹구는 향로를 집어 들고 선아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심협과 백소천 모두 황급히 저지하려 했으나, 선아가 두 눈을 감은 채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쿵!
둔탁한 굉음이 울렸다.
심협과 백소천이 주저한 그 짧은 순간, 첨과의 손에 들린 향로가 선아의 정수리를 내리친 것이다!
그러나 첨과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손도 미끄러지면서 선아의 머리를 제대로 치지 못했다. 향로는 선아의 눈썹꼬리를 스치고는 뒤편 마룻바닥을 내리쳤다가 다시 튕겨 올라 한쪽 옆에 떨어졌다.
선아의 눈썹 끝에 긁힌 상처가 생겨나 붉은 피가 향이 타고 남은 잿가루에 뒤섞여 그의 반쪽 뺨을 물들였다.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선아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약간 마음이 놓였고, 문을 열려던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다.
첨과는 향로를 던진 뒤 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방 여기저기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넓지 않은 방의 장식품들이 하나하나 쓰러졌고, 침상 휘장도 전부 뜯겨 나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방을 난장판으로 만든 그는 또다시 되돌아와 선아에게 한참이나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대더니, 결국 기진맥진하여 다시 원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차츰 조용해져갔다.
선아의 얼굴에는 멍이 가득했고, 얼굴의 반쪽은 피 얼룩으로 덮여 있었다. 얼굴의 반은 깨끗하나 반은 더럽고, 반은 창백하나 반은 거무스름해, 마치 음양인(陰陽人) 같은 모습이었다.
첨과가 마침내 진정되자, 선아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한 쌍의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빛이 반짝였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눈빛에는 조금의 책망이나 분노도 없었다.
그는 괜찮다는 듯 심협과 백소천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다시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계속해서 경문을 읊조렸다.
심협은 잠시 지켜보다가 첨과가 더 이상 사납게 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조금 안도하며 천천히 눈길을 거두었다. 다만 이번에는 좌선하지 않고 문짝에 가볍게 기댄 채 선아의 경문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 * *
무려 사흘 밤낮이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셋째 날 저녁 무렵, 그간 끊이지 않았던 목탁소리와 선아의 염불소리가 그쳤고, 갑자기 따뜻하고 하얀 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심협과 백소천은 즉시 문틈으로 다가가 안쪽을 자세히 살폈다.
선아는 낯빛이 백짓장처럼 창백했지만, 가슴 부분의 옷자락 안쪽 한가운데에서는 하얀 빛이 비쳐 나와 그의 온몸 위로 흐릿한 빛의 고리를 이루었다.
“부…… 불광!”
백소천이 흠칫 놀랐다.
그때, 선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첨과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홱 들더니 헝클어진 지저분한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고, 두 눈도 예전처럼 생기가 없거나 멍하지 않았다.
그는 부들방석에 꿇어앉아 선아를 향해 세 번 절했다.
“선사님, 제자 이미 더는 선과 악의 논쟁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있어 선사님께 해답을 청합니다.”
첨과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백정의 칼을 내려놓으면 그 즉시 부처가 된다는 말에서 ‘백정의 칼’은 살업의 칼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삼천 번뇌에 얽힌 집착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사대(*四大: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땅, 물, 불, 바람 4대 요소)가 모두 공(空)인데, 무엇을 공이라 합니까?”
“물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집념을 내려놓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선(禪)에 이르는 것이지요.”
선아가 차분히 답했다.
첨과가 이어서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악인도 살업을 내려놓으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지요? 허나 선인은 살업이 없는데 어찌 내려놓으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악인이 손에 든 칼을 내려놓는 것만 보았지, 그가 마음속 칼을 내려놓는 것은 보지 않았지요. 악한 생각이 사라지고 선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저 성불의 시작일 뿐이요, 몸에 악업을 지고 다시 부처님을 모시는 것은 고된 수행의 시작일 뿐입니다. 선인은 이와 반대로 악업이 없지만 과(果)에 대한 집념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으면 이미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선아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첨과는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더니 끝내 탄복했다. 그러더니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첨과가 나간 후, 선아는 몸을 둘러싼 불광이 차츰 사그라들더니 갑자기 피를 내뿜으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심협과 백소천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뛰어 들었다. 한 발 앞선 심협이 선아를 안아 올리고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어떤가?”
백소천이 다급히 물었다.
“다행히 큰 지장은 없소. 다만 육신은 평범하다 보니 사흘 밤낮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데다 여러 일을 겪었으니 내상이 가볍지 않소. 한동안 몸조리를 해야 할 듯하오.”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 *
동토에서 온 선사가 첨과를 교화한 일은 온 적곡성에 날개 돋친 듯 빠르게 퍼져 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첨과의 명성은 바깥에 두루 알려져 있었고 당시 그의 일은 인과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워 임달선사와 같은 고승도 그를 교화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달선사는 선아가 그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문안을 왔지만, 선아는 아직 혼수상태라 만나보지 못했다. 임달선사는 요상 단약 한 병만을 남기고는 떠나가야 했다.
이후 며칠 동안 서역 36국의 수많은 사찰에서 파견한 고승 대덕들이 각지에서 속속 몰려왔고, 인근 성의 백성들도 먼 길을 마다않고 산 넘고 물 건너 적곡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시끌벅적했던 적곡성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어 곳곳이 발 디딜 곳 없이 꽉 찬 것 같았다.
국왕 교련미는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내려 외성(外城)은 물론 외국에서 온 백성들도 도시 밖에 머물게 하여 성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임달선사도 친히 성 밖으로 나가 성안은 좁으니 대승법회는 보다 넓고 탁 트인 서쪽 성문 밖에서 개최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하여 외부인들뿐만 아니라 원래 성안에 살던 백성들도 일찌감치 성 밖에 천막을 치고 법회가 열리기를 기다렸고, 동토에서 왔다는 고승의 참모습을 보고 설법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보름 후, 국왕은 격문을 반포했다. 각국에서 몰려든 인원이 너무 많아 서성문 밖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까닭에, 법회 장소를 다시 서쪽의 광활한 사막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또한 국왕은 넓디넓은 사막에 사면이 백 장이나 되는 나무 법단과 그 위에 36국 고승들이 올라가 설법할 72개의 설법대를 건축할 것을 명했고, 설법대는 하나하나의 높이가 10장에 달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