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31화 (431/1,214)
  • 431화. 생각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심협은 선아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렸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기억이 날 겁니다.”

    “화호초는 저 때문에 죽었는데, 저는 기억을 조금도 일깨울 수 없습니다. 너무 우둔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현장법사의 환생일까요?”

    선아는 심협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답을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지요. 오직 스스로 이루어내야만 진정한 답인 것입니다.”

    이정의 당부에 심협 역시 자기가 도대체 남다른 사람이 맞는지, 모든 비극을 막아낼 그 사람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기에, 선아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했다.

    지금 그는 답을 알지 못하니 그저 끊임없이 그 답을 완성해가야 했다.

    선아는 심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리사리를 손에 꼭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이후 일행은 적곡성으로 되돌아왔다.

    “한데 그대들은 사람을 구하러 오면서 왜 미치광이 첨과(沾果)까지 데려 왔습니까?”

    기련미가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그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데려온 것입니다.”

    백소천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그가 그대들을 데려왔군요. 어쩐지…… 그는 전에 미치지 않았을 때도 늘 이쪽으로 내달리는 걸 좋아했지요.”

    기련미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미치광이 첨과라……. 그의 이름이 첨과입니까?”

    심협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우습게 볼 사람은 아니랍니다. 사실 그는 예전에 나처럼 한 나라의 왕자였고, 온 서역에서 꽤 명망이 있었지요.”

    기련미의 말에 심협은 깜짝 놀랐다.

    “일국의 왕자가 어찌 이 지경으로 전락했단 말입니까?”

    “그건 말하자면 긴데, 원하신다면 내 들려드리지요. 우리 오계국 북쪽에는 단환국(單桓國)이라는 이웃나라가 있습니다.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도 오손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불법(佛法)이 흥성한 나라로 국왕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부처님을 경건히 모신답니다.”

    기련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기련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심협과 백소천의 안색은 조금씩 어두워졌고, 뒤쪽 비주 한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첨과에 대한 동정심이 절로 생겨났다.

    원래 첨과는 단환국의 왕자로, 어려서부터 사찰에 맡겨져 길러졌기에 심성이 선량하고 불법을 믿고 따랐다. 그는 늙은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순리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이 된 그는 힘써 나라를 다스리며 조세를 가볍게 하고, 사원들을 건설했다. 또한 나라에 은덕을 널리 베풀었고, 큰 뜻을 품었으며, 선한 일을 행하여 덕을 쌓아 깨달음을 얻길 기대했다.

    그는 재위했던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나라의 가장 큰 사원인 공림사(空林寺)에 스스로 몸을 바쳤으며, 여러 차례 대신들에게 높은 값을 받고 저당 잡은 물건을 돌려주기도 했다.

    첨과가 몇 차례 고생한 끝에 나라 안 백성들은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됐고, 이에 따라 그는 민심을 얻게 됐다. 그러나 점차 대신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조정에는 암류가 용솟음쳤다.

    어느 날, 마침내 나라의 군권을 장악한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그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첨과는 원래부터 나랏일에 마음이 없어 고분고분하게 왕의 자리를 양보했다.

    이에 장군도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그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왕비와 두 왕자를 데리고 왕궁을 떠나 평민의 삶을 살게 하였다.

    본디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었던 첨과는 그런 생활에도 만족했고, 왕비 역시 어질고 부덕이 있어 평온하고 안락했으며, 온 가족이 화기애애했다.

    평민이 되었어도 첨과는 여전히 불경을 읽고 예불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고, 살아가면서 변함없이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으며 사람들을 선량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첨과는 자기 집 문밖에서 온몸이 피투성이인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상대가 악명 높은 악당임을 알면서도 하늘은 세상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생각에 그를 구하고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불경과 선(禪)의 이치로 그를 차근차근 인도하여, 그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 악당은 개과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돌봐준 왕비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고, 첨과가 보시하러 나간 틈에 왕비를 욕보이려 했다.

    왕비는 죽어도 이에 따르려 하지 않았고, 결국 두 어린 왕자와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다.

    첨과가 돌아와 보니 악당은 벌써 줄행랑을 쳤고, 모든 것은 이미 늦은 뒤였다.

    처자식의 처참한 시신을 마주한 첨과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통에 휩싸였고, 여러 해 동안 참선하고 예불하여 얻은 깨달음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 못했다. 모든 고통과 후회는 엄청난 분노가 되었고, 그는 악당을 찾아 죽이고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여러 해 동안 고생스레 찾아다닌 끝에 그 악당을 찾아냈을 때, 그자는 이미 고승의 교화를 받아 칼을 내려놓고 불문에 귀의한 뒤였다.

    첨과가 찾아갔을 때, 악당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은 지난날 악업에 시달렸다며, 불경을 읽고 예불을 드린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가 없으니 첨과에게 자신이 해탈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첨과는 칼을 높이 들어 올렸지만, 그 악당이 정말로 잘못을 뉘우쳤음을 알고는 도저히 내리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독하게 마음먹었다.

    ‘이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죽은 처자식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찰의 고승이 그를 만류했다.

    “백정의 칼을 내려놓으면 그 즉시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첨과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그는 비록 손에 칼을 쥐었어도 아직 살업(殺業)에 물들지 않았지만, 악당은 두 손을 합장하고 있으나 두 손이 피범벅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에게 칼을 내려놓으라 하는데, 그가 손에 든 것이 정말 백정의 칼이란 말인가?

    선과 악, 원인과 결과가 한순간 전부 한데 뒤얽혔다.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첨과는 정신이 혼란스러워 하늘을 우러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과(果)인지, 또 백정의 칼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고 외쳐 물었다고 하더군요. 온갖 악을 행한 자가 칼을 내려놓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냐고 말이지요.”

    기련미의 말에 선아가 물었다.

    “고승은 어찌 답하였습니까?”

    “고승은 그저 그에게 고통의 바다는 끝이 없지만 고개를 돌리면 피안(彼岸: 속세의 반대편, 깨달음의 세계)이요, 진실된 마음으로 뉘우쳐 깨닫기만 하면 사나운 범과 악한 교룡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답니다.”

    기련미의 대답에 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답이 너무나 성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결과는요?”

    백소천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결국 첨과는 광기에 빠져 하루아침에 그 사찰의 승려 300여 명을 도살하고, 장도를 절 문 앞에 꽂은 뒤, 사찰의 대문에 붉은 피로 ‘악인이 칼을 내려놓으면 피안으로 건너가 부처가 될 수 있다. 선인은 칼이 없으니 어찌 건너갈 것인가?’라고 쓴 뒤 자취를 감췄지요. 3년이 지나, 그는 이곳 적곡성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정신을 놓더니, 나중에는 이렇게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선인은 어찌 건너가느냐고 묻는답니다.”

    심협 일행은 기련미의 이야기를 다 듣고 탄식했다. 다시 뒤에 있는 첨과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을 띠고 있어도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전혀 이를 모르는 듯했다.

    “아미타불. 한마음으로 예불하는 이가 이런 마장(*魔障: 악마가 수행을 방해하려고 설치한 장애물)에 들어가서는 아니 되는데 말입니다.”

    선아는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아마 마음의 매듭을 풀기가 어려워 이리 정신을 놓은 것일 테지요. 그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백소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선아에게 물었다.

    “심 시주, 그를 역관으로 함께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수행한 불법으로 그를 교화하여 그가 혼돈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싶습니다.”

    선아가 엄숙한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안 될 것 없지요.”

    심협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일행이 적곡성에 돌아와 보니 성 밖에는 이미 수백의 병졸들이 집결해 있었다. 어떤 이는 말을 탔고 어떤 이는 낙타를 탄 것이, 막 기련미를 찾으러 성을 나서려던 참인 것 같았다.

    심협 일행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오자 모든 병졸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며 ‘선사(仙師)님’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다가 기련미가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보고는 더없이 기뻐하며 성으로 빠른 말을 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심협 등은 군사들의 호송 아래 역관으로 돌아왔으나, 미처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큰 무리의 군사들이 뛰어 들어와 역관 전체를 물 샐 틈 없이 에워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몸에는 비단 장포를 입었으며, 머리가 굽슬굽슬하고 눈동자가 짙푸른 건장한 남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당으로 들어왔다.

    기련미는 그 사람을 보자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나는 듯이 달려가 ‘부왕!’ 하고 외치며 폭 안겼다.

    이 사람이 바로 오계국의 국왕 교련미(驕連靡)인 것이다.

    심협이 가만히 둘러보니 교련미 뒤로는 몇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강약이 서로 다른 법력 파동이 전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앞서 성문 쪽에서 마주친 바 있는 임달선사였다.

    용단선사와 보산선사 등도 공손하고 조심스런 표정으로 임달 뒤에 서 있었다.

    한데 일전에 보았던 남루한 차림새와는 달리, 지금 임달선사는 붉은 승포로 갈아입고 앞가슴에는 모양이 불규칙한 흰색 돌구슬을 엮어 만든 염주도 걸고 있었다.

    “여러 선사님들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우리 아들이 무사히 환궁할 수 있었소. 이에 본왕(本王)이 특별히 감사를 표하러 왔소이다.”

    교련미가 아들의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와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예를 표했다.

    심협 일행도 즉시 예를 갖췄다. 오직 미치광이 첨과만이 국왕의 옷차림을 보고는 머리 위의 왕관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웃어댔다.

    호위병들이 노한 표정으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교련미는 엄하게 제지했다. 그는 진즉부터 첨과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듣자하니 선사들께서는 동토의 대당에서 오셨다지요? 이전에 대접이 소홀했었으니 여러분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라오.”

    “아닙니다. 역관으로 안내 받아 휴식을 취하였고,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예우를 갖춘 대접을 받았으니 어찌 대접이 소홀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백소천이 포권하며 답했다.

    “감히 선사께 묻겠소만, 이번에 말썽을 일으켰던 것은 어떤 요물이오? 여러분은 또 어찌 내 아들을 구해 오셨소? 그놈은 처단하였소? 만약 놈이 살아 있다면 임달선사가 분명 그놈을 항복시킬 수 있을 테지.”

    질문을 쏟아낸 교련미가 슬쩍 돌아보자 뒤에 서 있던 임달선사가 반보 앞으로 나와 심협 일행에게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저 평범한 모래 요괴였을 뿐입니다. 이미 처단하였으니 선사님께서 귀찮아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심협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리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소선사께서는 어려 보이시는데 기백이 비범하신 것이 큰 공덕을 입으신 분 같군요. 중원의 어느 선원에서 오셨는지요?”

    임달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선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과찬이십니다. 소승은 금산사에 출가해 있사옵고, 참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미승에 불과합니다.”

    선아가 답례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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