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30화 (430/1,214)
  • 430화. 백 년의 기한

    “그때는 이미 봉인의 핵심에 도달해 있었지만 금선자의 몸을 보호하던 보호 덮개도 이미 뚫려 있었어. 나는 담이 작아서 목숨이 아까웠고……. 그때 내가 나서서 그를 대신해 단 한 호흡이라도 시간을 벌어주지 못했지. 그래서 그는 마족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죽음이 가까워 오자 그는 제 목숨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의연하게 봉인을 지켜내 봉인의 강화를 완성했어.”

    화호초의 시선은 차츰 선아의 몸으로 옮겨갔지만, 그 눈길은 꼭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당시 현장의 몸에 가 닿은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금선자는 봉인을 완성했지만, 세 명의 진선기 마장(魔將)이 연합하여 원신과 단전을 자폭시켰고, 결국 산하사직도가 부서져 네 조각으로 나뉘고 말았지. 현장이 임종할 무렵, 현장의 대제자 손오공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의 손에서 산하사직도의 조각들을 건네받았어. 저오능과 사승(*沙僧: 사오정의 별명) 등 세 사람이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본 것은 현장법사의 혼백이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뿐이었지.”

    화호초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선아는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이것이 자신의 전생이며 과거라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주인님과 다른 천왕들께서 구명을 물리치고 돌아오셨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은 뒤였어. 이미 성불하여 득도했음에도 손오공의 사형제 네 사람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주인님을 포함한 네 사람을 공격해 다치게 했지.

    난 그리 흉악한 제천대성을 본 적이 없어. 천궁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심지어 늘 웃는 얼굴이었던 저팔계도 그날은 마신이 강림한 것처럼 온몸에 살기를 띠었지. 관세음보살께서 제때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살계를 범했을 게야.”

    심협은 이야기를 듣고는 회한으로 가득 찬 화호초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 뒤, 지장보살께서도 황급히 달려오셔서는 온힘을 다해 금선자의 잔혼을 구하여 반드시 환생시키겠노라고 손오공과 현장의 제자들에게 약조하셨지. 이에 그들은 주인님과 3대 천왕을 놓아주었고, 분노의 불길을 구명과 마족에게로 돌려 각자의 부족을 이끌고 세상 모든 마족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어.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분명 삼계가 연루되어 창생들이 난리를 겪게 되고, 생명들이 도탄에 빠질 터. 관세음보살께서 허락하지 않았지. 허나 비분강개한 사형제들을 마주하니 관세음보살께서도 하실 말씀을 찾지 못하시고 그들에게 창생대계(蒼生大計)를 위해 잠시만 인내하라고 충고하실 수밖에 없었어.”

    “근 백 년 동안 삼계가 그럭저럭 무사평안 했으니, 보살께서 그들을 달래신 모양이군요.”

    백소천이 끼어들어 말했다.

    “제천대성의 네 사형제가 어디 충고를 들어먹을 사람들이더냐? 허나 노여움을 터뜨리고 나자, 손오공은 현장법사가 임종 전에 당부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결국 백 년 동안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조했지.”

    “그 뒤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이번에는 선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들 넷은 각자 산하사직도 한 조각씩을 가지고 봉신산을 떠났다. 그길로 천정과는 연락이 끊겨서 행방을 아는 이가 없지. 하지만, 떠나기 전에 그들은 말을 남겼어. 사부님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아니면 백 년의 기한이 다 찬 뒤에 자기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지켜보라고 말이야.”

    화호초는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말을 멈췄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백 년 뒤 현장법사께서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들이 마족에게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심협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물었다.

    “제천대성의 성미로는 아마 그럴 게다.”

    화호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또 왜 여기서 기다리셨던 겁니까?”

    심협이 재차 물었다.

    “그해에 주인님과 천왕들께서는 현장법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정의 중벌을 받으셨다. 주인님께서는 내가 그분들과 함께 번개 채찍의 형벌을 당하길 원치 않으셔서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셨지. 하지만 나는 금선자가 환생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올 것이라 믿었다. 그가 남기고 간 물건을 돌려줘야 하니까.”

    화호초의 말에 심협 일행의 귀가 쫑긋 섰다.

    선아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뭔가 중요한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했는데, 아마도 화호초가 가진 물건이 그것일 듯했다.

    화호초는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자, 손목을 가볍게 빙글 돌렸다. 그러자 곧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일곱 색깔의 빛이 번득이더니, 그 가운데 용안(龍眼)만 한 유리구슬이 나타났다.

    이 유리구슬은 반투명했고, 모양이 불규칙했으며, 그 위에서 은은하고 담백한 향기가 흘러 넘쳤다. 또한 표면은 살짝 울퉁불퉁했지만 일곱 색깔 맑은 빛을 반사하며 당당하고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심협 일행은 단지 슥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칠보유리사리(七寶琉璃舍利)!”

    백소천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반적으로 불문에 큰 공덕과 복을 쌓은 고승과 거사(居士)들이 입적하면 화장하고 난 뒤 간혹 사리가 한두 개씩 남곤 했는데,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칠보유리사리는 백만 개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극상품이었다.

    “이것은 현장법사가 입적한 뒤 남긴 사리다. 선아가 이 물건의 비밀을 깊이 깨닫는다면 아마 진리를 깨닫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말을 마친 화호초는 양손으로 그 사리를 받쳐 든 채 선아에게 건넸다.

    선아는 양손으로 사리를 건네받아 조심스럽고 진중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떻습니까? 뭔가 좀 알 것 같습니까?”

    심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것도요.”

    선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리사리를 미간에 가져다 대고 다시 시도해보시지요.”

    백소천의 권유에 따라 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리를 미간에 가져다 댄 뒤,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집중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두 눈을 뜨고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환생하신 몸이니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도 사리를 얻으셨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심협이 조금 낙심한 듯한 선아를 위로했다.

    “훌륭합니다. 물건을 얻었으니 이번에 우리가 서역에 헛걸음 한 것은 아니지요. 기억을 되찾는 일은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장안으로 돌아가서 국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도 되니까요.”

    백소천도 나서서 다독이자 선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사리를 거둬들였다.

    “화 주인장, 당신도 참……. 선아를 만나겠다고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어야만 했습니까? 적곡성에 법술을 쓰시니 우리는 무슨 요물이 성을 습격한 줄 알았습니다.”

    심협은 상황이 정리되어가자 투덜대듯 따졌다.

    “그때는 상황이 긴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먼저 금선자를 데리고 적곡성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목숨이 위험했을 게야.”

    화호초가 어두운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선아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목숨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심협과 백소천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선아 곁에 있으면서 별다른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안에는 일찍이 선아가 금선자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있었다. 그날 내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선아는 지금쯤 이미 그에게 해를 입었을 것이야.”

    “화 주인장께서는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왜 선아를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심협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사람은 신분이 특별해서 나도 오랫동안 뒷조사를 한 뒤에야 그 배경과 행적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었지. 단지 그와 연신…… 조심해!”

    화호초는 말을 하던 중 갑자기 대경실색하며 외쳤고, 동시에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나와 비대한 몸으로 백소천을 밀어내고는 선아의 앞을 막아섰다.

    심협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홱 돌려보니, 거의 투명에 가까운 화살 하나가 소리 없이 날아와 화호초의 소매를 그대로 꿰뚫고 선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투명한 화살의 꽁지깃이 한 차례 바람소리를 냈고, 어느새 화살촉이 화호초의 비대한 몸에 꽂혔다. 화살은 그의 앞가슴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등을 뚫고 나왔고, 여전한 기세로 선아의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아는 화살촉이 자기 미간을 한 치 앞에 두고 멈춰선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살촉은 바들바들 떨렸고, 그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짙은 음살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호화초는 한 손으로 선아의 옆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기 몸을 꿰뚫은 화살의 꼬리부분을 꽉 붙잡은 채, 피를 토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은가?”

    지난 생에 죽음이 두려워 현장을 보호하지 못했던 그가 이번 생에 선아가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또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는가?

    선아의 얼굴에 한 가닥 온기가 전해졌다. 그는 그것이 화호초의 피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손으로 문질러 닦았지만, 손바닥과 눈가는 이미 붉어진 뒤였다.

    심협은 노기 가득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솔개가 먹잇감을 찾는 것처럼 두 눈을 굴려 화살을 쏜 자를 찾으려 했다.

    “저기다!”

    잠시 뒤, 그가 분노에 차 외치며 손을 휘두르자 순양검배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뒤이어 그의 발아래에 달빛이 흩어지더니 온몸이 한 줄기 잔상으로 변해 쏜살같이 검배를 뒤쫓았다.

    ‘백형은 그들을 잘 보호해주시오.’

    막 따라 나서려던 백소천은 심협의 전음을 듣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순양검배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허공에 검호(劍弧)를 그리며 멀리 산등성이 위에 있는 어느 모래언덕에 꼿꼿하게 꽂혔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모래언덕에서는 한바탕 먼지구름이 일었고, 순양검배는 튕겨 날아와 공중에서 곡선을 그리더니 다시 먼지구름 속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동시에 심협도 쏜살처럼 달려와 발밑에 달빛을 흩뿌리며 먼지구름 속으로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

    모래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나자 검은 그림자가 그 사이로 번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온몸은 마치 귀무(鬼霧)에 휩싸인 듯했는데, 심협의 동력으로도 그 용모가 전혀 보이지 않아 상대가 남자라는 것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심협과 얽히고 싶지 않은 듯 옷자락을 한 번 털었다. 그러자 몸 아래에 짙고 검은 안개가 뭉쳐 화살비를 이루더니 폭우가 퍼붓듯이 심협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휘둘러 팔현경을 꺼냈다.

    머리 위에 팔현경의 빛이 내려오자 검은 안개 화살들이 그 위를 두들겼지만, 그 위력은 앞서 선아를 노렸던 화살과는 차이가 컸다.

    심협은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방어막을 거두고 쫓아갔지만, 사내는 이미 검은 구름에 싸인 채 하늘가로 날아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심협은 괴로웠으나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호초는 바닥에 누워 선아의 다리를 베고 있었는데, 두 눈이 생기 없이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화살은 심맥을 관통한 상태였는데, 그 안에 여러 줄기의 검고 짙은 기운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피와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의 생명력을 마지막 한 점까지 빨아들였다.

    심협은 시름에 겨워 탄식하고는 선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왕생주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 모래언덕에서 미치광이의 그림자가 먼지구름을 뚫고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어느새 자신을 모래 속에 파묻은 상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안 건널란다. 안 건널란다! 죽으면 모든 것이 쓸데없고 허망하니, 차라리 죽여! 죽여! 죽여!”

    그의 울부짖음이 심협과 일행을 일깨웠다. 그들은 그제야 기련미가 아직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백소천이 동굴에 들어가 그를 찾으려는데, 소년 하나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불쑥 튀어나왔다. 소년은 백소천과 부딪히자 눈물 콧물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울부짖었다.

    “살려주세요. 요괴가 있어요!”

    기련미는 쉬지 않고 울부짖었고, 백소천은 가까스로 그를 달랬다.

    그들은 화호초 대신 뒷일을 간단히 수습하여 그를 동굴 옆에 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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