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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27화 (427/1,214)
  • 427화. 왕자의 방문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역관을 떠났고, 이내 화 주인장의 처소에 도착했다.

    “주인님.”

    바닥에 검은 그림자가 번쩍 스치더니 귀장이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날 일전에 귀장을 구해낸 뒤에도 그에게 주인장의 처소를 지키게 했다.

    “화 주인장이 그동안 무슨 꿍꿍이를 부린 건 아니겠지?”

    심협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는 요 며칠 문을 걸어 닫고 법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제 뜰에서 두 줄기 강력한 법력 파동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럼 되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장 조비극을 건곤대에 거두어들인 후 문을 살짝 두드렸다.

    이번에는 화 주인장도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금방 문을 열었다.

    “빨리도 오는구먼. 들어와라.”

    화 주인장은 낮게 피식 웃고는 심협을 마당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는데, 전과 달리 심협에게 더는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화 주인장, 제 법기는 완성되었습니까?”

    심협도 다른 말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화모가 한 말인데 완성하지 못했을 리가 있겠느냐? 가져가거라.”

    화 주인장이 툭 내뱉으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금색과 노란색을 띤 반짝이는 빛줄기가 그의 손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놀라운 법력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심협은 재빨리 두 줄기 빛을 받아 들었다.

    금색 빛줄기에는 금홍색 깃털부채가 있었는데, 바로 오화선이었다. 외관에도 큰 변화가 생겨 전체가 금홍색으로 변했고, 영금(靈禽)의 깃털 일곱 가닥 중 세 가닥이 금봉우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부챗살은 불길처럼 시뻘건 색이었고, 그 위로 수많은 신비로운 영문(靈紋)이 새겨져 있었다.

    법력을 주입하자, 순간 오화선 전체가 엄청난 광채를 내뿜었고, 그 위에서 금홍색 화염이 가닥가닥 솟구쳐 나와 심협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지금의 심협은 마치 상고시대의 화신(火神)처럼 돋보였다.

    심협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오화선에는 그야말로 환골탈태라 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내부의 금제는 16도까지 늘어나서 극품법기의 극한에 도달한 상태였다.

    다섯 줄기의 전혀 다른 화염의 힘이 오화선 안에서 넘실거렸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봉황의 불길로 변해 있었다. 봉황의 불길은 위력이 비록 홍련업화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큰 차이는 아니었고, 다른 네 줄기 화염보다는 훨씬 강력했다.

    오화선 속 화염의 힘은 폭증했지만, 원래 다섯 개의 화염이 서로 균형을 이루던 상태가 깨진 탓에 이상할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화 주인장이 금제까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미쳐 날뛰는 화염의 힘을 모두 제압하여 부채 안에 단단히 가두어 놓았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화 주인장이 다소 거드름을 피우는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내 예전에 운이 좋아 화덕성군이 전수한 건원공화신금(乾元控火神禁)을 본 적이 있는데, 네 부채에 써봤느니라. 네놈 운이라 치자.”

    “화덕성군!”

    꿈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 심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덕성군은 천정의 사람인데 화 주인장이 화덕성군의 비법을 알고 있다니, 이 사람의 내력도 보통이 아니리라!

    “감사합니다, 화 주인장.”

    그는 캐묻지 않고 감사를 표한 뒤, 오화선을 챙겨 넣고 또 다른 노란 빛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안에는 길이가 1장쯤 되는 검노랑 장곤(長棍)이 있었는데, 몸체에서 밝고 순수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곤봉의 몸체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중간의 큰 부분은 노란색이었고, 양쪽으로는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곤봉의 양 끝에는 금빛 둥근 테가 달려 있어, 겉모습이 진해빈철곤과 흡사했다.

    심협이 장곤을 움켜쥐자 강력한 영력 파동이 곤봉 내부에서 솟구쳐 나왔다.

    그의 체내 법력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운행 속도가 즉시 배로 빨라졌고, 검노랑 장곤에서도 빛이 환하게 피어올라 그의 체내 법력과 어렴풋이 공명했다.

    곤봉의 노란 빛이 바닥에 닿자마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근처 대지가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작대기는 말이지, 용궁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귀중한 보물의 정련법으로 연마하여 만든 것이다. 이 곤봉의 주재료가 현귀판이기 때문에 지맥(地脈)과 공명하여 대지의 힘을 빌려 적을 공격할 수 있지.”

    화 주인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용궁의 비밀스런 보물이라고? 십중팔구 정해신침이겠지. 우연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둘 다라고 할 수 있겠군.’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법력을 움직여 곤봉 속의 금제를 느껴보았는데, 순간 다시 표정이 활짝 펴졌다.

    이 검노랑 장곤 안의 금제 역시 16도로 극품법기의 극한에 달해 있었다. 또한 이 16도 금제는 모두 자흑색 빛을 반짝였고, 퍽 강인했으며, 매우 고풍스러웠다. 상고시대의 비법으로 만들었다는 화 주인장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금제들은 수용력이 뛰어나 법력을 주입하자 넘쳐흐르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했다.

    ‘이것은 자심묵정의 효력이로군! 자심묵정과 금제를 완벽하게 융합하다니, 화 주인장의 솜씨는 과연 비범하다! 게다가 금제들이 이토록 질기고 튼튼하니 꿈속의 수련경지를 소환해도 분명 견뎌낼 수 있을 거야!’

    심협은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곤봉을 위로 들어 올려보았다. 한데 곤봉은 유달리 무거워 모든 법력을 동원해야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원숭이 왕의 곤법에 담긴 정수는 제대로 쓰지도 않고 그 형식만을 이용했을 뿐인데도 검노랑 장곤에서는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곤풍(棍風)이 쏘아져 나와 공기를 찢고 온 뜰에 폭풍을 일으키며 바닥에 여러 갈래의 깊은 자국을 냈다.

    “그만! 그만둬, 이 미친놈아! 내 집을 무너뜨릴 참이냐! 작대기를 가지고 놀고 싶거든 밖에 나가서 놀아!”

    화 주인장이 다급하게 펄쩍 뛰자 심협은 키득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좋은 곤봉이군. 네 온몸이 검노랑 색이니 내 너를 현황일기곤(玄黃一氣棍)이라 칭하겠다.”

    그는 곤봉에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다.

    “이름은 네놈 집에 가서 천천히 지으란 말이다! 법기도 다 만들었으니 어서 꺼져!”

    화 주인장이 퉁명스레 그를 내쫓았다.

    “법기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장. 언젠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심협은 현황일기곤을 챙기며 예를 갖췄다.

    “이 법기들로 그 어린 화상을 잘 보호하도록 해라. 그것이 내게 보답하는 길이다.”

    화 주인장은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심협이 물을 틈도 없이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어버렸다.

    심협은 말없이 방을 향해 예를 갖추고는 즉시 역관으로 돌아갔고, 문을 닫은 후 오화선과 현황일기곤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 * *

    이른 아침. 역관 마당에서 아침기도를 올리며 예불을 드리던 선아는 문득 앞뜰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가서 확인해보니 비단 장포를 입은 오계국 소년 하나가 역관 문 밖에서 총총히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심협과 백소천도 기척을 듣고 차례로 방을 나와 마당 밖에 섰다.

    오계국 소년은 머리칼이 곱슬곱슬했고, 콧날은 오똑했으며, 눈은 깊은 데다 눈동자에 짙푸른 빛이 살짝 돌았다.

    소년은 심협 일행을 보자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소년이 다가오기도 전에 두극이 쫓아와서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이곳은 역관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어서 가시지요. 집에 관가 사람이 있다면 가족들과 다시 오십시오.”

    두극은 소년의 옷차림이 평범한 사람들이 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최대한 예를 갖춰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는지 심협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대당에서 오신 손님들이십니까?”

    심협은 그 말에 어쩐지 조금 우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어찌 집주인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란 말인가?

    심협은 두극에게 소년을 역관으로 들여보내게 했다.

    “우리를 찾아온 것이냐?”

    백소천이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물었다.

    “그렇습니다, 귀하신 손님들.”

    소년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대며 예를 갖추었다.

    선아도 손바닥을 세우며 답례했고, 심협과 백소천도 눈을 마주치고는 웃으며 포권했다.

    “얘기해보아라. 너는 누구고, 왜 우리를 찾아 왔느냐?”

    심협이 물었다.

    “나는 그대들의 대당 왕국을 몹시도 동경해 왔습니다. 그대들이 대당에서 온 고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례를 무릅쓰고 달려온 것이지요. 그대들에게 대당의 풍물과 장안성이나 낙양성(洛陽城) 같은 곳의 성황을 듣고 싶습니다.”

    소년은 감격스런 눈으로 간곡히 말했다.

    심협 일행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대당을 흠모해왔던 게로구나. 대당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심협이 다시 물었다.

    “비단상인이 가져온 서책에서 보았는데, 장안성은 성벽 높이가 백 장이나 되고, 성안에는 대안탑이 있어 매년 정월 15일마다 상원절(上元節: 음력 정월대보름, 원소절이라고도 함)을 지내며, 성안에는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화등(*花燈: 음력 정월대보름에 달거나 물에 띄우는 각종 등)을 띄운다고 하더이다. 또한…….”

    소년은 책에서 보았던 모든 내용들을 단숨에 줄줄이 늘어놓았다.

    심협은 그 안에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고 과장된 내용이 많은 것을 알고는 즐거운 듯 웃으며 소년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백소천도 옆에서 거들어주었고, 두 사람 모두 전혀 귀찮은 기색이 없었다.

    대안탑과 성안의 사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선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계국 소년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하다 보니 어느새 반 시진이 지났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가죽옷을 입은 오계국 남자 둘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니 두극에게 영패를 보여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왕자 전하, 어찌 홀로 뛰쳐나오신 것이옵니까? 폐하께서 아신다면 저희 가죽을 벗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백소천과 두 사람은 흠칫 놀라 소년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이 아이가…… 왕자 전하?”

    “아이고, 이런. 부왕(父王)과 수행원들 몰래 도망쳐 나온 것이라, 보아하니 그대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소년은 풀이 팍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성에서 며칠 더 머물 것이니, 국왕 폐하께 알리시고 다른 날 다시 오십시오.”

    선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왕자라는 소년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정말? 내가 그대들 참선을 방해할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새벽에는 아침 햇살을 보며 깨닫고, 저녁에는 꽃구름을 보며 깨닫습니다. 걷는 것도 참선이요, 앉는 것도 참선이며, 시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역시 참선이지요.”

    선아가 손바닥을 세우며 답했다.

    “그렇습니까? 고승께서는 우리나라의 승려들과 조금 다르군요.”

    소년은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곧 작별을 고하고 자신을 찾으러 온 하인들과 떠나갔다.

    한데 역관 입구까지 갔던 소년이 갑자기 다시 뛰어 돌아오더니 말했다.

    “고승들께 이름도 알리지 않았군요. 내 이름은 기련미, 오계국의 삼(三)왕자입니다. 그대들이 왕궁에 손님으로 온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네 이름이 기련미라고?”

    심협은 화들짝 놀라며 거의 경악한 듯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백소천과 선아도 눈이 동그래질 정도였다.

    “네, 그렇습니다. 한데 어찌 그러십니까?”

    삼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듯 물었다.

    물론 심협은 꿈속 세상의 화과산에서 만났던 기련미를 떠올린 것이다. 이제 와서 회상해보니 성년이 된 그의 모습에는 큰 변화가 생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미하게나마 비슷한 윤곽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문득 안색이 조금 변했다. 백소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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