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26화 (426/1,214)
  • 426화. 흡혈귀

    심협이 술법을 멈추자, 겁에 질린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던 귀금은 이내 몸을 가누고 열심히 날개를 퍼덕여 먼 곳으로 사라졌다.

    심협의 신식도 귀금의 몸에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고, 잠시 뒤에는 회백색 수역(水域)을 떠나 어느 황량한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는 검은 식물이 무리 지어 촘촘히 자라 있었고, 간혹 나무들도 보였다.

    육지에 이르자 귀물의 수도 늘어, 잠깐 사이에 세 마리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나는 잿빛 해골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시 귀물이었으며, 남은 하나는 유혼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세 귀물 모두 강하지 않았다. 그나마 강시 귀물이 응혼 후기였는데, 물론 통령할 가치는 없었다.

    그가 앞으로 더 가보려는데, 문득 강시 귀물 옆에서 환영이 번쩍 스치더니 검붉은 귀물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귀물은 난데없이 강시의 등을 덮쳤다.

    강시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고, 그 육신은 순식간에 바싹 쪼그라들었다.

    불과 세 호흡이 지났을 때, 강시 귀물의 비명이 그쳤고, 가죽으로 덮인 바짝 마른 뼈대처럼 변한 몸이 쿵 하고 쓰러졌다.

    검붉은 귀물이 강시의 시체에서 훌쩍 뛰어내린 후에야 심협은 녀석의 외모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사람 형체의 귀물이었는데, 머리에는 검은 삿갓 같은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 모자 가장자리에는 핏빛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서 퍽 기괴해 보였다.

    괴상한 모자에서는 검은색 엷은 안개가 뿜어져 나와 기다란 검은 천처럼 귀물의 상반신까지 뒤덮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검은 천 너머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뻘건 두 눈만이 엿보였다.

    길고 흉악한 두 핏빛 손이 천처럼 내려온 삿갓 아래로 뻗어 나왔고, 손가락 끝에서는 서늘한 한광이 번득였다.

    ‘저건 무슨 귀물이지?’

    처음 보는 귀물의 모습과 기세에 심협은 무척 놀랐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이 검붉은 귀물의 기운은 심협 자신보다도 강하여 출규 중기에 도달해 있었다. 방금 순식간에 응혼 후기의 강시 귀물을 죽인 것만 보더라도 전투능력은 분명 상당할 터였다.

    심협은 즉시 신식의 힘을 쏘아 보내 검붉은 귀물의 체내로 집어넣는 동시에 통령역요술을 운공했다. 무수한 검은 부적 문양이 검붉은 귀물의 머릿속으로 주입됐다.

    “크아악! 캬악! 캬아아!

    검붉은 귀물은 영지(靈智)가 트이지 않은 듯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통령역요술을 막아내려 했다.

    허나 강력한 귀물이라 해도 이처럼 영지가 트이지 않은 존재의 두서없는 저항은 뚫기에 더없이 쉬웠기에, 심협은 내심 기뻐했다.

    그는 통령역요술로 영총(靈寵)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능숙했다. 검은 부적 문양들이 회백색 공간으로 스며들어 검붉은 귀물을 압박했다.

    “캬아악!”

    검붉은 귀물은 연신 울부짖으며 통령역요술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또한, 본능적으로 기이하고 음산한 힘을 내뿜어 통령역요술을 통해 심협의 본체에 반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이제 강자 소리를 들어 마땅한 심협은 무명공법을 잠시 운공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켜버렸다.

    동시에 그는 신식과 함께 전송된 법력을 불러 일으켰다.

    멀지 않은 곳의 회백색 수역에서 촤르륵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날아와 번쩍하고 두 줄기 회백색 수인(水刃)이 되어 검붉은 귀물에게로 날아들었다.

    귀물은 이를 감지하고는 두 손으로 즉시 회백색 수인을 잡으려 했지만, 회백색 수인은 순식간에 귀물의 손을 피해 그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검붉은 귀물은 통령역요술을 막아내면서 한편으로는 두 줄기 수인을 상대해야 했다. 더욱이 앞뒤로 적을 맞으니 금방 힘이 바닥나버려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심협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귀물을 거둬들이자 기쁘면서도 놀랐다. 이는 모두 법력이 도와준 덕이었는데, 그 법력은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영총을 통령하는 데에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영총을 굴복시키는 데는 통령역요술보다 이 거울이 훨씬 효율적이겠구나!’

    그는 감탄하며 통령술로 통령 표기를 응집해 귀물의 몸에 녹아들게 했다.

    여기까지 마치자 그의 법력은 소모가 제법 커서, 그는 회백색 공간 속의 법력과 신식을 거둬들이려 했다. 법력이야 그렇다 쳐도 신식을 거둬들이지 못한다면 심협의 신혼이 엄청난 손상을 입을 터였다.

    그때, 신식 위쪽 허공에 파동이 일더니 어디선가 회백색 빛으로 된 문이 하나 나타났다.

    심협은 즉시 신식과 법력을 문 안으로 집어넣었고, 다음 순간 신식과 법력은 현실로 돌아와 그의 몸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손바닥도 회백색 거울에서 떨어져 나왔다.

    “대단한 거울이다! 이렇게 통령을 하다니!”

    심협은 그 낡은 거울을 집어 들며 크게 웃었다.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이 거울이 있는 한 앞으로는 어느 때고 회백색 공간 안에 들어가 그곳의 귀물과 통령할 수 있을 터였다. 처음 명하에 갔을 때 그는 명계의 생령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은 터였다.

    심협은 결인하고 법술을 시전해 금제를 한 층 덧입힘으로써 거울에서 비쳐 나오는 회백색 빛을 차단한 뒤 챙겨 넣었다.

    이어서 그는 단약을 하나 꺼내 먹고는 운기조식하며 정제하여 방금 소모한 법력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결인하여 물줄기를 불러내 소환술을 시전했다.

    물줄기 안에는 곧 검은 물구멍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음침한 검은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솟아 나왔다. 다음 순간, 물구멍에서 검붉은 귀물이 잔상을 드리우며 놀라운 속도로 튀어나왔다.

    이 귀물의 실력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심협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검붉은 귀물은 검은 천 뒤의 시뻘건 두 눈에 여전히 약간의 적개심을 띤 채 심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삿갓 아래로 뻗어 나온 핏빛 손끝에는 얼음장 같은 한광이 번득여 언제라도 그를 찌를 것만 같았다.

    “이름이 있느냐?”

    심협은 눈앞의 검붉은 귀물을 보며 살짝 미소 짓고 물었다.

    “컥컥…….”

    귀물은 기침하는 듯한 소리를 두어 번 낸 것이 전부였다.

    심협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고, 귀물 체내의 통령 표기로도 쓸 만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심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물었으나, 이번에도 검붉은 귀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두어 번 내는 데 그쳤다.

    심협은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이 귀물은 분명 강력하지만, 소통할 수 없다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전투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두 손을 결인하고 검붉은 귀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검붉은 귀물 몸속의 통령 표기가 갑자기 크게 빛을 발했다. 순간 귀물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마치 뭔가에 의해 고정된 것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했고, 검은 천 아래로 번득이던 붉은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새어나왔다.

    심협은 아랑곳 않고 통령술로 상대를 묶어놓은 뒤, 가까이 다가가 손을 검붉은 귀물의 머리에 대고 오래된 듯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검은 안개가 솟아올랐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올챙이 같은 검은 부적 문양이 반짝이며 검붉은 귀물의 머리를 눌렀다.

    검은 안개가 머리로 스며들자 곧 귀물은 시뻘건 눈에 고통스런 기색이 번지더니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고, 몸에는 검고 붉은 두 가지 빛이 한데 뒤엉켜 빠르게 번쩍거렸다.

    1각은 족히 지난 뒤에야 심협은 귀물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지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편, 검붉은 귀물의 몸은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이내 회복하고는 고개를 들어 심협을 보았다. 그의 시뻘건 눈은 좀 전보다 청명한 느낌이 돌았다.

    “주……인님…… 저의…… 영지를 틔워주셔서……감사합니다.”

    검붉은 귀물은 심협에게 포권을 하고는 예를 갖추며 말했다. 발음은 불분명했으나 뜻을 알아듣기에 문제는 없었다.

    “연신비전의 계령술(啓靈術)이 이토록 신묘하다니! 정말 생령의 영지를 틔웠잖아.”

    심협은 놀란 기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방금 검붉은 귀물에게 사용한 것은 연신비전에 기록된 영지를 틔우는 비술로, 무지한 생령의 신지(*神智: 정신과 지력)를 강제적으로 틔울 수 있었다.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한 것이다.

    “네게 이름이 있느냐?”

    심협은 고개를 들고 검붉은 귀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유명계에 속한…… 흡혈귀물 일족으로…… 이름이…… 없습니다.”

    검붉은 귀물이 더듬더듬 답했다.

    “흡혈귀물이라고? 그럼 앞으로 흡혈귀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너는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우리 흡혈귀족은……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자취를…… 감출 수 있고…… 정혈을…… 빨아먹습니다.”

    말을 마친 순간, 흡혈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심협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방 한쪽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던 돌기둥 하나에 구멍이 뻥 뚫렸고, 흡혈귀의 모습이 그 옆에 나타났다.

    심협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흡혈귀가 어떻게 그곳에 나타났는지 그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흡혈귀는 손을 빼내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손끝으로 돌기둥을 긁으며 또다시 다섯 개의 깊은 흔적을 만들어냈다.

    역관 돌기둥에 쓰인 석재는 근처 산맥에서 캐온 것으로, 안에 적동이 함유되어 있어 무척이나 단단했지만, 흡혈귀의 손아귀에 마치 두부처럼 흩어졌다.

    “훌륭하다!”

    심협이 실로 감탄하며 칭찬했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 없어서…… 흡혈능력을 보여드릴…… 수 없지만…… 같은 경지의 생물은…… 대부분…… 다섯 호흡 만에…… 피를 모두 빨아낼 수……있습니다.”

    흡혈귀는 계속해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다섯 호흡 만에 피를 모조리 빨아버릴 수 있다고?”

    심협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는데, 실로 경악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는 아까 이 귀물의 흡혈능력을 보긴 했었지만,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귀물은 속도가 번개같이 빠르고, 기운을 숨길 수 있는 데다, 손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게다가 순식간에 피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능력까지 있다. 이 흡혈귀의 적은 미리 방어법기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쓸모가 큰 귀물이었다.

    “너의 흡혈능력은 내 이미 본 바 있다. 우선 돌아가 쉬거라. 필요할 때 부르도록 하마.”

    이 역관의 처소에는 서역 36국에서 온 수많은 고승들이 묵고 있으니 흡혈귀를 여기 오래 머물게 한다면 위험할 터였다. 그래서 심협은 법술로 물구멍을 열어 그를 돌려보냈다.

    심협은 흡혈귀를 보낸 뒤 현기증이 조금 나는 듯해 머리를 툭툭 쳤다. 계령술은 신식 소모가 매우 커서 며칠은 쉬어야 회복될 터였다.

    가부좌를 튼 채 무명공법을 운공하자 짙푸른 빛깔의 공 모양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 * *

    금세 열흘이 지나, 푸른 빛 덩어리가 서서히 흩어지고 심협이 나타났다. 번쩍 뜬 두 눈이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신식의 힘이 모두 회복된 것이 분명했다.

    이미 화 주인장과 약조한 시간이 되었기에 심협은 방안의 금제를 거두고 일어나서 바깥으로 향했다.

    뜰은 텅 비어 있었다. 백소천과 선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사람을 붙잡고 물어본 뒤에야 심협은 백소천이 선아를 데리고 역관의 다른 승려들을 방문하러 갔음을 알게 되었다.

    ‘선아는 정말이지 겁도 없다니까. 뭐, 백형이 곁에 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