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25화 (425/1,214)
  • 425화. 깨진 거울 조각

    심협은 처소로 돌아온 뒤, 진기(陣旗)를 꺼내 방안 곳곳에 금제를 쳐두었다. 곧 방안에 하얀 빛 장막이 밝혀지면서 바깥과 단절되었다.

    일을 마친 그는 한 손을 뒤집어 물줄기를 불러내 몸을 감싸고는 남겨두었던 이원진수를 꺼내 네다섯 방울을 떨어뜨리고 몸에 발랐다. 이어서 곧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그 속에 담긴 수령(水靈)의 기운을 흡수했다.

    지금은 누런 모래사막이 천 리는 펼쳐진 서역에 있어 물의 영기가 희박했지만, 그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만 출규기에 들어선 뒤로 이원진수의 수련 효과가 훨씬 떨어졌다는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금세 땅거미가 내려 적곡성을 뒤덮었다.

    번화하고 시끌벅적했던 적곡성도 이내 조용해졌고, 성안 곳곳의 등불이 하나둘 꺼지면서 거대한 적곡성이 고요한 어둠 속에 빠져들었지만, 황실과 성련법단사에는 여전히 불빛이 밝았다.

    심협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수련하던 중이었다.

    그때, 미간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번득이더니 곧 머릿속에 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님, 속하 지금 붙잡혔습니다!’

    심협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즉시 수련을 멈췄다.

    ‘뭐라고? 어찌 된 일이냐? 누구에게 붙잡힌 게야?’

    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하면서 심신(心神)으로 귀장과 소통했다.

    ‘좀 전에 화 주인장이 출타하기에 땅속에 잠복한 채 미행하였는데, 도중에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속박당해 꼼짝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다행이라면 부상은 입지 않았습니다.’

    귀장의 해명에 심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화 주인장이 설마 정말로 달아나려 했던 것인가?

    심협은 방문을 가볍게 열더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한 줄기 검은 그림자로 변해 기척 없이 역관을 떠나 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와 귀장의 심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정신을 집중하면 상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심협은 행적이 새어나가게 하지 않으려고 사월보로만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귀장이 있는 곳은 멀지 않아서 반각도 되지 않아 근처에 이르렀다.

    그곳은 성안의 외진 곳으로,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지역인 것 같았다.

    심협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기운을 숨기고 천천히 다가갔다.

    귀장을 속박했다면 상대방의 실력도 만만치 않을 테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가 귀장이 있는 곳에 이르러 보니 다른 수사들은 없었다. 그가 음고(音蠱)를 써서 살펴보았으니 확실할 것이다.

    ‘이곳에는 다른 수사들이 없다. 네가 매복 공격을 당한 것 같지는 않구나.’

    심협의 심신이 귀장과 소통했다.

    ‘허나 저는 아직도 옴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심협은 눈썹을 찌푸리며 신식으로 땅속을 살펴보고는 귀장의 위치를 금방 감지해냈다. 귀장의 몸 주위에는 실오라기 같은 회백색 빛이 떠올라 있었는데, 뒤덮은 범위는 넓지 않아서 반경 3장도 채 되지 않았다.

    땅속에서 뿜어져 나온 것 같은 그 회백색 빛들에는 특이한 점이 별로 없어 보였지만 귀기와는 상극이었다. 그러니 귀장은 이 빛에 뒤덮이자마자 반항할 힘이 모두 사라져 마치 거미줄에 떨어진 날벌레 같은 꼴이 된 것이다.

    ‘이 빛은 대체 뭐지? 어디서 온 것인가?’

    심협은 속으로 놀라며 한 손으로 땅바닥을 철썩 내리쳤다. 그러자 귀장 주위의 진흙 속에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물줄기들이 나타나 곧 커다란 푸른색 손이 되어 귀장의 몸을 움켜쥐었다.

    회백색 빛은 귀장을 가뿐하게 속박한 것과 달리 이 푸른 손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힘껏 잡아당기자 귀장은 회백색 빛 가운데에서 금세 끌려 나왔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회백색 빛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움직임을 회복한 귀장은 땅속에서 솟아나와 심협에게 감사를 표했다.

    심협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 회백색 빛줄기들을 따라 땅속 깊은 곳으로 신식을 뻗었다.

    그는 놀랍게도 응혼기 귀장을 거뜬히 제압해버린 이 빛줄기들이 몹시도 궁금했다.

    20장!

    30장!

    40장!

    심협의 신식은 금세 60장 아래까지 뻗어갔지만, 여전히 회백색 빛만 느껴질 뿐, 그 근원은 찾지 못했다.

    땅속에는 수많은 암석과 광물들이 담겨 있었고, 기운도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땅속 원자(元磁)의 힘도 뒤섞여 신식의 탐색을 크게 방해했다. 이 때문에 심협으로서는 신식을 땅속으로 60장이상 깊이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신혼이 몸을 떠나 지하로 들어가게 하면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지만, 그의 신혼은 귀장과 같은 혼체(魂體)인지라 이 회백색 빛에 닿으면 속박당할 터였다. 그리 되면 자신을 구해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땅을 뚫을 수 있는 둔지부 같은 공법도 알지 못했다.

    한데 잠시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왜 무춘을 잊고 있었지?”

    문득 오랫동안 소환하지 않았던 영총(靈寵) 무춘이 떠올랐다. 무춘이라면 땅으로 파고들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먼저 주위에 금제를 한 층 펼친 다음, 곧바로 결인해 통령술로 무춘을 소환해냈다.

    “심 도우, 어인 일로 나를 찾았소?”

    무춘은 지금까지도 벽곡기 정점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미 출규기인 심협을 마주하니 예전의 오만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경외심이 가득했다.

    “땅속 60장보다 더 아래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그대가 나를 데리고 내려갈 방법이 있겠소?”

    심협이 물었다.

    “60장 아래? 당연히 문제없소. 다만 심 도우도 알다시피, 내게는 둔지부와 같은 신통력이 없소. 그저 땅을 뚫고 구멍을 파는 것을 비교적 잘할 수 있는 몸뚱이를 타고났을 뿐이지. 그래서 나를 따라가면 그대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오.”

    무춘이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괜찮소. 내 안전은 내가 챙기겠소.”

    “그럼 좋소이다.”

    심협이 안심시키자 무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다란 몸뚱이를 비틀어 회백색 빛 바깥으로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금세 사람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검은 땅굴을 파냈다.

    무춘의 꼬리가 말리면서 심협의 몸을 가볍게 휘감고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심협은 결인하고 피수결을 펼쳐 온몸을 보호하면서 주위에 드문드문 떨어져 내리는 흙을 차단했다.

    한편, 귀장도 이를 보고는 곧바로 따라붙었다.

    무춘은 땅을 파는 능력이 상당해서 그들은 곧 20여 장 아래로 잠겨 들었다.

    심협은 신식을 뻗어 옆에 있는 회백색 빛의 근원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자, 회백색 빛들이 이미 매우 응집되어 있어 곧 끝에 도달할 것 같았다.

    무춘은 계속 파고들어 금방 10여 장을 더 들어갔다.

    심협의 신식은 계속해서 회백색 빛들을 탐색한 끝에 마침내 근원지를 찾아냈는데, 놀랍게도 다름 아닌 깨진 회백색 거울에 불과했다. 가닥가닥 회백색 빛이 거울 표면에서 쏘아져 나와 위쪽 진흙을 향해 뻗어 나가고 차츰 퍼지면서 결국에는 회백색 빛기둥을 이룬 것이었다.

    그 거울은 반만 남아 균열이 가득한 상태였고, 위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어 이미 땅속에 수년째 묻혀 있던 것처럼 보였다.

    심협은 무춘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회백색 빛의 근원을 감지해냈으니 처리하기는 쉬워진 터였다.

    그는 손을 뒤집어 진해주를 꺼내 어수지술을 강화하더니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회백색 거울 옆의 진흙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푸른색 손이 불쑥 나타나 이 오래된 거울을 쥐고 조금 힘겹게 위로 날아갔다. 진흙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거울을 가지고 가는 것이 힘에 부쳤던 탓이다.

    다행히 현재 심협의 법력이 두터워 반각 후에는 땅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가까스로 거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심협이 회백색 거울을 손에 쥐었을 때, 거울에서 내비치는 회백색 빛이 때마침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심협의 머릿속에서 신혼이 한 차례 격렬히 진동했다. 심지어 몸도 따라서 떨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심협이 손을 황급히 휘둘러 거울의 방향을 틀고 나서야 떨리던 신혼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심협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섣불리 회백색 거울을 살펴보지 않고 손을 뒤집어 일단 챙겼다.

    무춘을 돌려보낸 그는 1각 후 기척 없이 역관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방안 곳곳에 금제를 치자 푸른 빛의 장막이 금세 다시 펼쳐졌다.

    심협은 그제야 망가진 회백색 거울을 꺼냈다. 거울 면을 아래로 향하게 바닥에 엎어 놓은 뒤,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울에 묻은 진흙은 그가 이미 깨끗이 닦은 터라 회백색 몸체가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거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지만,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보광(寶光)이 비쳐 나와 비범해 보였다.

    심협은 거울을 잠시 훑어보다가 손을 거울 바닥에 대고 법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거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울에서 비쳐 나오는 회백색 빛도 더 밝아지거나 어두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더 많은 법력을 주입해봐도 거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재밌네.”

    심협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손바닥을 거두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손바닥이 거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안색이 변한 심협이 다급히 거울을 떼어내려는데, 거대한 흡입력이 거울 안에서 흘러나와 신식과 법력 일부를 빨아들였고,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심협의 신식은 회백색 공간 안에 있었다.

    “여긴……?”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회백색 공간에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음산한 힘이 가득했고, 아래쪽은 끝없는 수면이었다. 물 역시 회백색을 띤 데다 혼탁했는데, 일전에 보았던 명하와 비슷했다.

    심협은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자 머릿속으로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통령역요 술법을 시전했을 때처럼 신식의 힘이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터였다. 다만 차이는 신식만이 아니라 약간의 법력도 함께 전송됐다는 것이 통령역요술과는 달랐다.

    “어쨌든 우선 여기가 어떤 곳인지 좀 살펴봐야겠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심협은 신식을 움직여 회백색 공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은 몹시 황량하여 생령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한참 돌아다니고도 아무것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심협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 살폈고, 마침내 살아 있는 무언가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귀물(鬼物) 머리를 가진 잿빛 날짐승이었는데, 수면 위를 빠르게 날고 있었다.

    ‘귀금(鬼禽)! 이곳은 십중팔구 유명계인 듯한데 이런 상황에서 통령술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신식의 힘을 귀금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어서 통령역요 술법을 운공하자 곧 신식의 힘에도 무수한 검은 부적 문양이 떠올라 성난 파도처럼 귀금의 머리로 밀려들었다.

    “키야아악!”

    귀금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허공에서 두 날개를 마구 퍼덕이며 수면으로 곧장 곤두박질쳤다.

    ‘진짜로 될 줄이야!’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통령역요술을 멈췄다.

    이 귀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고작 벽곡기에 불과해 실제로 통령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서도 통령역요 술법이 통하는지 시도해본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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