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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24화 (424/1,214)

424화. 절대 우연이 아니야

“가세. 나도 그 화 주인장이라는 이가 몹시 궁금하니 가서 좀 만나보세나.”

백소천이 말했다.

“백형은 견문이 넓으니 함께 가면 당연히 좋지요. 한데 선아 사부님께서는……?”

심협이 선아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그 느낌이 좀 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애초에 소승이 잘못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그 화 주인장이란 사람은 고명한 연기사라고 하니, 소승도 한번 가서 견문을 넓히지요.”

선아가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왔던 길로 걸어갔고, 금세 화 주인장이 사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네놈들이냐? 왜 또 돌아왔어? 앞서 말하지 않았느냐! 선옥 5천 개에서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돼!”

화 주인장은 심협을 흘끗 노려보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흥정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당신 수중에 있는 보천석과 자심묵정을 좀 보고 싶어서 왔소. 품질에 문제가 없고 양만 충분하다면, 선옥 5천 개도 안 될 것 없지요.”

백소천이 심협의 뒤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네놈이 자심묵정을 알아? 허! 드디어 안목 있는 놈을 만났구먼.”

화 주인장은 백소천을 쓱 보고는 손을 뒤집어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당의 옆 작은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반 척 길이의 새카만 정철(精鐵)과 주먹만 한 자색 결정체였다.

백소천은 검은 정철을 좀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시선을 옮겨 자색 결정체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서 올올이 금빛이 피어오르자, 자주색 결정체에도 갑자기 자주색 빛 덩어리가 반짝이더니 백소천 손 위의 금빛을 흡수해 버렸다.

백소천은 놀랍고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심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선옥 5천 개, 내지요. 귀하께서는 될 수 있으면 빨리 연기로를 열고 법기를 연단하시길 바랍니다. 선옥은 우선 절반만 미리 내고, 나머지는 법기가 완성되면 내도록 하겠습니다.”

심협은 현귀판 거울 조각들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있어 봐. 우린 이 두 가지 재료값만 얘기했을 뿐, 연기 비용은 아직 말하지도 않았어. 네놈의 법기는 만들기 아주 어렵다. 거울 조각 속의 현귀판을 추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신경을 써야 하지. 그리고 나한테는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이 남았단 말이다. 시간은 아주 소중한 거라고.”

화 주인장은 조금 전 법기 제련에 반쯤 미쳐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제 장사꾼 같은 미소를 드러냈다.

“그럼 얼마를 원하십니까?”

심협은 속으로 간악한 장사치라고 욕을 하며 물었다.

화 주인장은 말을 하려다가, 안색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심협 뒤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아가 그곳에서 걸어 나와 마당을 살펴보던 참이었다.

“화 주인장, 왜 그러십니까?”

심협과 백소천이 화 주인장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백소천은 긴장한 얼굴로 선아와 화 주인장 사이를 막아섰다.

선아도 화 주인장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맞부딪쳤다.

그 순간, 선아의 얼굴에 갑자기 고통스런 기색이 어리더니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금선대사님!”

백소천은 가슴이 철렁해 황급히 선아의 몸을 부축했다.

화 주인장은 백소천의 외침을 듣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복잡한 표정이 스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심협은 화 주인장의 잇단 표정 변화를 눈여겨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소천은 한 손으로 선아를 부축하며 다른 손으로 법술을 발휘해 연달아 신혼을 다독였다.

잠시 후, 선아는 본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화 주인장과 주위의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한편, 이 무렵 화 주인장 역시 평온을 되찾았고, 조용히 서 있었다.

“금선대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머리가 갑자기 좀 아파서요.”

백소천의 물음에 선아가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대사님께서 괜찮으시면 되었습니다.”

백소천은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화 주인장을 살폈다. 그는 방금 선아의 두통이 화 주인장과 관계있다고 여겼지만, 지금 선아의 상태를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선아 사부님의 몸이 좋지 않으시니 백형이 역관으로 모셔야 할 것 같소.”

“알겠네.”

심협의 말에 백소천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선아와 함께 마당을 떠났다.

선아의 뒷모습을 보는 화 주인장의 눈에 한 가닥 기이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또다시 사라졌다.

“주인장, 마저 얘기하지요. 법기를 만드는 데는 선옥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심협이 화제를 돌렸는데, 화 주인장이 불쑥 되물었다.

“네놈은 아까 그 어린 화상과 동행이냐?”

“그렇소. 우리 모두 중원의 대당에서 왔습니다. 화 주인장께서는 선아 사부님을 아시오?”

심협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내심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 주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두 가지 재료는 본전으로 선옥 천 개만 받겠다. 연기 비용은 신경쓸 것 없고…….”

심협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까까지는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더니, 이제 갑자기 물욕(物欲)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굴다니, 잠깐 사이에 다른 사람이라도 됐단 말인가?

“화 주인장, 선아 대사님을 아십니까?”

그는 상대의 변화가 선아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건 물어 뭐하려고! 그래서, 이 거래 할 게냐 말 게냐?”

화 주인장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차갑게 말했다.

“여기 선옥 천 개입니다.”

심협은 상대의 마음이 바뀔세라 곧바로 선옥 천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열흘 뒤에 물건 찾으러 와!”

화 주인장은 냉랭하게 내뱉고는 거울 조각들과 선옥을 집어든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화 주인장,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 심모에게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심협이 갑자기 말했다.

“또 뭔데?”

화 주인장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귀찮다는 듯 홱 돌아섰다.

심협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오화선을 꺼냈다.

“그런대로 괜찮은 물건이군. 분명 상고시대의 신기(神器) 오화신염선의 모조품이겠지. 허나 안타깝게도 연기사의 솜씨가 조악해 좋은 재료들을 헛되이 낭비했구먼.”

화 주인장은 오화선을 두어 번 훑어보고 눈빛을 약간 빛내더니 곧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 주인장께서는 한눈에 이 부채의 내력을 꿰뚫어보시는군요. 실로 놀랍습니다. 이 오화선의 위력이 확실히 좀 아쉽긴 합디다. 제게 대승기 흑봉요괴의 몸에서 얻은 금봉우 세 개와 봉황화염 한 덩이가 있는데, 주인장께서 그걸로 이 부채의 위력을 끌어올려 주실 수 있는지요?”

심협은 금봉우 세 가닥과 금빛 수정 구슬을 하나 꺼냈다. 구슬 안에는 금빛 화염 한 덩이가 봉인되어 있었는데, 바로 봉황의 불꽃이었다. 흑봉요와의 싸움에서 천책이 그녀의 봉황화염 두 덩이를 거둬들인 것이다. 봉황의 불도 영화(靈火)의 하나로, 그에게 봉인을 당했다.

백군성에서 오화선의 일격이 두 응혼기 화상의 연합에 막히자, 그는 이 부채의 한계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화 주인장은 심협의 손에 들린 금봉우를 보고 순간 눈이 밝아지더니, 금빛 수정 구슬과 오화선까지 건네받았다. 이어서 그가 손가락을 구부리고 가리키자 하얀 빛줄기가 손가락 끝에서 쏘아져 나와 금봉우와 봉황화염을 차례로 건드렸다.

“좋아! 이 깃털들에는 순수한 봉황 혈맥의 힘이 담겨 있고, 봉황화염의 위력도 큰 편이야. 이 부채의 위력을 배로 높이는 건 가능할 게다.”

화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로 높인다고요? 정말입니까?”

오화선의 위력을 3할만 끌어올릴 수 있어도 크게 만족했을 것이기에, 심협은 매우 놀랐다.

“왜? 나를 못 믿느냐?”

화 주인장이 눈을 부라리며 퉁명스레 화를 냈다.

“당연히 아니지요. 그저 좀 놀랐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심모는 열흘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심협은 공수하고 예를 갖춘 뒤 손해와 함께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선배님, 안심하십시오. 화 주인장이 연기술 하나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가 완성할 수 있다고 했으니 분명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손해가 말했다.

“그러길 바라오. 오늘 길 안내를 해주느라 손 도우가 고생이 많았소.”

심협은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며 하얀 비단 수건을 꺼내 손해에게 건넸다.

이것은 그가 누구의 저물법기에서 얻었는지 모를 하품법기였는데, 방어와 속박 두 종류의 효력을 지니고 있어 제법 교묘했다.

손해는 화생사의 외문제자이지만 공격성을 지닌 하품법기 하나 가진 게 전부였기에, 법력으로 비단 수건의 등급을 살펴보고는 감격하여 거듭 감사를 표하고서야 떠났다.

“주인님, 오화선과 현귀판 조각들에 선옥까지 남겨놓으셨는데, 그 화 주인장이란 자가 만일 보물을 들고 달아나면 어찌합니까?”

손해가 떠나자마자 건곤대 안에서 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의 눈에도 한 가닥 망설임이 스쳤다. 화 주인장이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 네가 여기 남아서 그 사람을 감시하거라. 너의 백귀온신대법이 제법 성과를 거두지 않았느냐. 그 공법에는 은닉 신통이 하나 있는데, 효과가 뛰어나다. 이곳은 상당히 외져서 오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 땅속에 숨어 있으면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심협이 잠시 생각해본 후에 말하자 귀장은 곧장 건곤대에서 튀어나와 번쩍하고 땅으로 들어갔다. 금세 땅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며 법술을 시전해 숨었는지 심협이 신식을 펼쳐 땅속을 살펴보아도 귀장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또다시 당부했다.

“오계국은 큰 불국이고 적곡성에는 승려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무쪼록 조심해야 한다. 변고가 생기면 즉시 내게 알리거라.”

‘마음 놓으십시오, 주인님.’

귀장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자 심협은 돌아서서 화 주인장의 작은 집을 잠시 보다가 그곳을 떠났다.

그는 역관으로 즉시 돌아가지 않고 성안 곳곳을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성안을 한 바퀴 또 돌았음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괜한 걱정인가?”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느 길 어귀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휘황찬란한 사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불전과 불탑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어 한눈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원은 장안의 황궁보다도 커보였고, 종소리와 염불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와 절로 엄숙한 느낌을 자아냈다.

바로 성련법단 총단이었다.

심협은 그곳을 잠시 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떠났다.

* * *

성련법단 깊은 곳, 어느 어두컴컴한 대전 안. 흐릿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하얀 빛이 한 덩어리가 떠다녔는데, 그 안에는 어떤 화면이 떠올랐다. 바로 심협이 성련법단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허허!”

흐릿한 그림자는 가볍게 웃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하얀 빛을 흩어버리고 대전의 어둠 속으로 몸을 완전히 숨겼다.

* * *

심협은 더는 돌아다니지 않고 역관으로 돌아갔다.

백소천은 선아 곁을 지키며 교대하자는 말도 없이 심협에게 가서 더 쉬라고 했다.

몸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던 심협은 내심 감격하여 백소천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는 쉬러 가기 전에 뭔가가 떠올랐는지 문득 말을 꺼냈다.

“아까 말이오. 선아와 그 화 주인장 모두 좀 이상했소. 이후에 혹시 선아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 보았소?”

“물었지. 금선대사께서는 두통의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시더군. 그 화 주인장이란 사람에 대한 기억도 떠오르는 게 없다 하셨고……. 오늘 일은 어쩌면 정말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르네.”

백소천이 가볍게 탄식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끝으로 심협 역시 더는 묻지 않고 인사한 뒤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이게 절대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성깔머리가 그리 괴팍한 화 주인장이 선아를 보더니 갑자기 연기 비용을 그렇게나 많이 깎아준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만 상대는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듯했고, 선아도 기억하지 못하니, 이 일은 앞으로 차차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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