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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16화 (416/1,214)
  • 416화. 성련법단(聖蓮法壇)

    “금선대사님, 우리는 오계국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백소천이 선아에게로 돌아서며 물었다.

    “소승도 모릅니다. 오계국에 오면 뭔가 떠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여전히 아무런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선아는 멋쩍은 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우선 근처를 살피며 오계국 상황을 좀 알아보도록 하지요.”

    심협은 오계국의 황폐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걱정이 돼 제안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선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오계국 변경 부근을 한 차례 둘러보았는데, 이내 규모가 제법 큰 성을 하나 발견했다.

    성문에는 백군성(白郡城)이 새겨져 있었다. 성은 매우 컸고, 밖으로는 커다란 강줄기와 넓은 도로가 여러 갈래 있어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교역의 요충지인 듯했다.

    “성이 제법 커 보이니, 여기서 정보를 알아본다면 분명 수확이 있을 겁니다.”

    성 밖의 은밀한 곳을 찾아 비주에서 내려서며 심협이 말했다.

    선아와 백소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셋은 곧 성문 어귀에 이르렀다.

    백군성의 건축 양식은 중원의 성들과 달리 기세가 매우 호방했다. 성문과 성벽에는 투박한 벽화들이 자주 보였는데, 그 내용도 중원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같이 온갖 사람들이 사악한 짐승과 싸우는 모습이었다.

    백군성 입구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의 차림새도 특이하여 머리에는 전모(*氈帽: 짐승의 털로 짠 직물로 만든 모자)를 썼고, 반신 갑옷을 입었으며, 장창과 곡도(曲刀)를 들고 있었다.

    병사들은 성에 들어가는 모두에게서 두당 은화 한 닢을 징수했다.

    선아는 불문의 사람이라 입성비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심협과 백소천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쇄은(*碎銀: 고대에 화폐로 쓰이던 부스러기 은전) 한 조각을 건넸다.

    서역의 화폐는 금화와 은화였지만, 대당의 무역이 번창하여 당전(唐錢)도 이곳에서 쓸 수 있었다. 사실 무게로만 따지자면 이 쇄은 한 덩이가 적어도 은화 3닢 어치는 되었다.

    “한 사람당 금화 두 닢씩이오. 그대들은 몇 명이오?”

    병사는 은자를 받지 않고 화려한 차림새의 백소천을 두어 번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한 사람당 은화 한 닢씩 아니었소?”

    백소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깟 은전 따위 개의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사기를 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입성비로 얼마를 받을지는 우리 마음이오. 당신들 두 사람은 옷차림이 괴상한 게 다른 나라의 첩자인 듯하니, 옥에 갇히기 싫거든 어서 돈을 내시오!”

    병사들은 백소천이 말대꾸를 하자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다른 병사들은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손에 든 무기를 높이 치켜들어 백소천과 심협을 겨누었다. 그들은 입가에 걸린 탐욕스런 미소로 보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님이 분명했다.

    심협은 날건달 같은 병사들의 소행에 분개했지만, 당장 해야 할 큰 일이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가 막 백소천에게 다가가 설득하려던 참이었다.

    “아미타불. 관원 나리들, 중생이 평등한데 다른 이들은 은자 한 냥만 내고 어찌 우리에게만 금화 두 닢을 내라고 하십니까?”

    선아가 한 발 선수를 쳐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그제야 선아를 의식하고 다들 안색이 달라졌다.

    “대사님께서는 이들과 동행이십니까? 소인이 귀한 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오해가 있었군요! 세 분은 어서 성안으로 드시지요!”

    돈을 뜯어내려던 병사가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즉시 길을 내주었고, 다른 병사들도 진중한 모습으로 선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선아도 그들에게 불례(佛禮)로 답했다. 심협과 백소천은 까닭을 몰랐지만, 번거로운 일을 면할 수 있게 됐으니 안도하며 선아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백군성은 성벽이 높고 면적이 넓어서 제법 번화한 곳일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실상은 달랐다. 길은 좁고 더러웠으며, 양옆의 가옥들은 처마가 낮고 초라해 사람과 가축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또한 상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나마 있는 곳도 무척 낡은 건물들뿐이었다.

    그러나 낡고 허물어져가는 백성들의 집들과는 달리, 성안에는 사원이 수없이 많았다. 법우(法宇: 절, 사찰)가 천 겹으로 둘러싸여 있고, 보상(寶相)들이 장엄하며, 범음(梵音)이 아득히 들리는 데다 향불이 까마득했다.

    선아는 나이가 어렸지만 고승의 차림새에 기백 또한 범상치 않아서 성안 사람들은 이들 일행을 보자 너도나도 길을 비켜주며 공손히 절을 올렸다.

    심협과 백소천은 눈짓을 교환했다. 백군성에서 승려의 지위가 이리도 높으니 성문에서 사기를 치던 병사들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성은 사주지로(*絲綢之路: 실크로드)에 위치한 요충지이니 꽤 번화해야 마땅한데, 어찌 사람들의 생활은 이리도 빈곤하고 불문은 저리도 흥성하단 말인가! 실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백소천이 당황한 듯 혀를 차자,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백 시주 말씀대로 정말 이상합니다.”

    그때, 선아의 손목에 채워진 염주가 냉소했다.

    “이게 뭐 이상할 게 있어! 서역은 국토 대부분이 척박하여 중원보다 풍요롭지 못하다. 물자 교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까 그 병사들의 꼬락서니를 좀 봐라. 중원 어느 상인이 감히 이곳을 찾겠느냐? 아마 남에게 팔려가도 따질 곳이 없을 걸?”

    선아는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불호를 읊조렸다.

    “이곳 사정은 잠시 뒤에 다시 자세히 알아보아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머물 곳을 찾아보지요.”

    “그것도 좋지.”

    심협의 제안에 백소천이 냉큼 동의했다.

    “두 분 시주께서는 머물 곳을 찾으시지요. 소승은 속세를 떠난 몸이니 절에서 하룻밤 묵겠습니다. 내일 여기서 다시 뵙지요.”

    심협은 그제야 승려인 선아가 객잔에서 묵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깨달았다.

    “저희는 대사님의 안전을 소홀히할 수 없으니 이리 하시지요. 제가 대사님과 함께 절에 묵겠습니다. 심형은 성안에 거처를 찾고, 그 참에 오계국 사정도 좀 알아보게.”

    백소천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긴 심협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세 사람이 둘로 나뉜 뒤, 심협은 성안을 한참 뒤진 끝에야 묵을 만한 여관을 찾아낼 수 있었다.

    크지 않은 여관에는 주인장 외에 점원이 둘뿐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의 손님이라서인지, 주인장이 직접 심협을 방까지 안내했다. 이어서 정성스레 차와 저녁식사를 가져다주었는데, 태도는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주인장, 이 심모는 이곳 오계국에 처음 왔소. 대당에 있을 때 들어보니 오계국은 서역에서 제법 큰 나라라고 하더이다. 비단 교역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니 매우 번성해야 마땅하지요. 한데 백군성이 어찌 이리 몰락한 거요?”

    심협이 주인장에게 은전 몇 푼을 쥐어주며 물었다.

    “손님께서는 대당에서 오셨습니까? 어쩐지 훤칠하시더라니! 에휴, 우리 오계국도 예전엔 정말 번화했었답니다. 한데 최근 몇 년간 하늘이 노했는지 자연재해가 이어져왔고, 도적과 요물들이 횡행하여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없게 되었지요. 다른 나라 장사꾼들도 오지 않으니 이렇게 퇴락할 수밖에요.”

    여관 주인장이 길게 탄식했다.

    “요물이 습격했단 말이오?”

    심협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렇다니까요. 요 몇 년 동안 어찌된 일인지 오계국 곳곳에서 수많은 요물들이 난데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성련법단(聖蓮法壇)의 성승(聖僧)들께서 요물들을 제거하려 애쓰셨지만, 그 수가 너무도 많아서 결국 다 죽여 없애지는 못하셨습니다. 성주(聖主)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이 진실하지 않아서 이런 재앙이 내렸나 봅니다.”

    주인장이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성련법단? 그게 무엇이오? 불문의 사찰이오?”

    심협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손님께서는 성련법단을 모르십니까? 소문에 대당에서도 불교가 융성하다던데, 손님께서 이리 견문이 좁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토록 친절했던 주인장은 다소 어두워진 안색으로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심협이 성련법단을 모르는 것이 그에게는 화가 날 일이었던 모양이다.

    심협은 조금 황당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장안과 달리 이곳 건물들은 대부분 불이 꺼졌다.

    심협은 검은 그림자로 변해 창문을 빠져나가 소리 없이 먼 곳으로 향했다.

    밤이 거의 다 지나가고 날이 밝을 무렵에야 그는 방으로 돌아왔는데, 손에는 두꺼운 서책이 몇 권 더 들려 있었다.

    심협은 밤새 성안 곳곳을 한 바퀴 돌면서 백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몇몇 작은 사찰들에서 역사를 기록한 서적을 구해온 것이다.

    그는 책들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신혼의 힘으로 읽으면 충분히 한 눈에 열 줄씩 볼 수 있었기에 금세 다 읽었다.

    그는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계국은 현재 국력이 빈약하고 세태가 험난하여 백성들 모두가 불법(佛法)에 빠져들어 마음의 해탈을 구하고 있었기에 이곳의 불교는 매우 흥성했다.

    성련법단이라는 것은 현재 오계국의 국교로, 백군성 안의 사찰들은 대부분 성련법단의 분사(分寺)였다.

    “성련법단이라…….”

    심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난세에는 백성들의 삶이 어려우니 정신적으로 기댈 곳을 찾는 것이야 안 될 게 없지만, 그가 알아본 바, 성련법단이라는 곳은 어딘가 사악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중원의 화생사, 금산사 등의 불교 종파와는 달리 중생의 평등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자신들이 일반 백성보다 위에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성련법단이 백성들을 위해 요괴들을 없애는 데에도 대가를 받아서, 매번 많은 전을 거둬갔다.

    어떤 책에서는 오계국의 어느 성에 요괴가 출몰하여 성주(城主)가 성련법단의 성승에게 나서주길 청하였더니, 성련법단의 성승은 그간 성이 모아둔 돈의 절반을 요구했다고 한다. 성주는 탐탁지 않았지만, 결국은 절반의 재산을 내놓아 요괴를 제거했다는 기록이었다.

    이렇게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은 대당에서야 강도질이라고 하겠지만, 성련법단에서는 이를 ‘성주님께 공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틈틈이 백성들을 거의 우민화하고 세뇌시켰으며, 결국 해를 거듭할수록 오계국 백성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심협은 오계국 백성들이 이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에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나라의 내정에 끼어들 이유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곳의 마기(魔氣)……?’

    해석선사의 말에 따르면 금선자가 서쪽으로 갈 당시 이 나라에서 엄청난 마기 파동을 느꼈다고 했으니, 분명 작은 일이 아닐 터였다.

    이정의 말에 따르면 치우의 다섯 줄기 마혼이 환생한 시간은 취경인들이 환생한 시간과 거의 비슷하니 마기의 파동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치우는 온갖 궁리를 다 하여 봉인에서 벗어났으니 그가 다섯 마혼을 내보내기 전에 다른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오계국 각지에 요마들이 들끓어 대당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해 꿈속 세계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고, 그 사실이 추측에 확인을 더해주었다.

    심협이 홀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무척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 외침에는 흉악하고 사나운 느낌이 가득하여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아뿔싸, 요마가 나타났어!”

    그는 곧바로 일어나 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뿌옇게 동이 터오기 시작한 때였다.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던 백성들 또한 이 소리에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요마! 또 요마가 나타났어!”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곧장 집으로 돌아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고개도 내밀지 못했다.

    “손님!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요마가 또 왔습니다!”

    때마침 일어나 있던 여관 주인장은 심협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괜찮소.”

    심협은 주인장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이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 검은 점이 하나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커져 거세게 용솟음치는 검은 구름으로 변했다. 이 검은 구름 근처에는 강한 요풍이 일어 모래와 돌이 날아다니는 것이 매우 무시무시해보였다.

    “저건 그 뱀 요괴잖아!”

    여관 주인장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심협에게 신경 쓰지도 못하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게 문을 겹겹이 걸어 잠갔다.

    “뱀 요괴라…….”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 요물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닌 듯했다.

    “선아 쪽은 어찌 되었으려나?”

    문득 궁금해진 그는 한 줄기 붉은 빛으로 변해 어제 잠행할 때 봐두었던, 선아와 백소천이 묵고 있는 사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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