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전생
“이미 환생한 영혼이 어찌 아직까지 잔혼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공도선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마 처음부터 잔혼이 환생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좀처럼 각성하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이번에 염주에 남아 있던 마혈이 소란을 피우면서 이 잔혼을 깨웠고, 제게도 몇 가지 일들을 알려주었습니다.”
선아의 답에 이번에는 자석 장로가 재빨리 물었다.
“그래, 현장법사께서 뭐라 말씀하셨느냐?”
“별일은 아니고, 어떤 당부였습니다. 전생의 잔혼은 제가 서역에 다녀오기를 바라시더군요. 매우 중요한 물건을 그곳에 두고 오셨다고, 반드시 찾아오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그게 무슨 물건입니까?”
사람들 모두 몹시 궁금한 듯 집중했다.
“무엇인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전생의 잔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직 말해주지 않아서요. 다만 그 물건은 창생(*蒼生: 세상 모든 중생)과 관련이 있어, 저에게 위험을 두려워 말고 반드시 그것을 도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선아가 고개를 저으며 답하자, 이번에는 정교금이 말을 받았다.
“말하지 않은 것은 천기(天機)를 가리고 누군가 이 일을 알아차려 선아를 끌어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그 물건의 중요성을 설명하고도 남지요. 국사께서 사후에 추측해보셨지만, 당시 현장법사께서 장안성을 떠나신 뒤 불경을 구하러 갔던 길을 따라 오계국 근처로 되돌아가셔서는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입적(入寂)하셨다는 것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오계국으로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조사해야겠군요.”
보수선사가 제안했다.
“아니 됩니다. 이 일은 예삿일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우리 중 몇 사람이 직접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석 장로가 보수선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다른 제안을 했다.
“이 일은 저의 전생이 당부한 것이니 당연히 제가 직접 가서 검증해야지요. 다만 길이 험난하니…… 저는 육 시주와 심 시주께서 함께 동행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선아는 심협와 육화명을 돌아보며 청했다. 금산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두 사람에게 상당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분명했다.
육화명은 물론 이견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정교금의 말에 따랐다.
‘국공 대인, 지난번 매화 표식을 가진 사람을 대신 찾아 주십사 부탁드렸던 것에는 진전이 있었는지요?’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전음으로 물었다.
정교금은 잠시 멈칫하더니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다. 호부에서 관리를 배정해 호적을 찾아보게는 하였지만, 단시간에 결과가 나올 수는 없지. 더욱이 호적조차 불분명하니 방문검사도 필요하고 말이야.’
‘아!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실로 많은 품이 들어가는 일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국공대인을 난처하게 해드렸습니다.’
심협이 진중한 목소리로 사죄하자 정교금이 웃으며 답했다.
‘괜찮다. 마침 이 기회를 빌려 경하용왕의 귀환(鬼患)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장안성을 샅샅이 파악하는 것도 좋지.’
정교금의 대답을 들은 심협은 선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공수했다.
“서역으로 가는 일은 문제없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는 이정에게서 환생한 두 마혼 중 하나는 장안에, 또 하나는 서역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장안 쪽을 조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그 사이 서역에 가서 조사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한데 그대들 몇 사람만으로는 위험할 것 같은데요?”
녹덕선사가 다소 걱정스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띌 뿐입니다.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보다야 사람이 좀 적은 게 낫지요. 그리고 녹덕선사께서는 이 젊은이들을 얕보지 마십시오. 전에 장안의 귀환을 해결한 데에는 이들의 공이 컸답니다. 다만 화명은 벼슬을 하는 몸이고, 그가 조사해야 할 일이 뒤에 더 남아서 몸을 뺄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심협 혼자 가는 것은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정교금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 함께 가길 원합니다.”
사람들이 돌아보니, 백소천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포권을 하고 있었다.
심협은 그와 눈을 한 번 맞추었고, 두 사람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가는 것도…… 좋겠지. 소천 사질(師姪)이 함께 간다면 더욱 안전하긴 할 겁니다.”
공도선사는 백소천을 보며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한 차례 상의 끝에 결정을 내렸다.
숭현당을 나오자 육화명이 다가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공무가 있다 보니 그대들과 함께 갈 수 없게 되었소.”
“괜찮소. 그대는 벼슬을 하는 몸이니 공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일이 우선 아니겠소? 염려 마시오.”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요풍의 일에 단서가 조금 생겨서 한동안 떠나지 못하게 된 거요.”
육화명이 좌우를 살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요풍! 그럼 고화령은 어떻게 되는 게요?”
“그녀는 임시로 관적에 들어갔으니 내 부하가 된 셈이오. 요풍을 조사하는 일에도 함께할 거요.”
육화명의 답에 심협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곁에 둬야 한다면 좀 더 경계하는 것이 좋겠구려.”
“마음 놓으시오. 내 알아서 잘할 터이니.”
육화명이 웃으며 말했다.
“참, 장안을 떠날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혹시 인맥이 있다면 단약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소?”
심협이 조심스레 부탁했다.
“안 될 것 없지. 한데 무슨 단약 말이오?”
“상처를 치료하는 유영단과 혈린단(血麟丹)이오.”
심협에게는 천년영유가 아직 좀 남았지만, 수명을 연장하거나 법맥 개척을 돕는 데에는 완전히 쓸모가 없어졌다.
기린혈은 직접 복용할 수 있었지만, 그리되면 핏속 영기가 크게 소모되므로 단약으로 정제하는 것이 나았다. 또한 그래야만 그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 두 단약이라면…… 황가의 연단사가 만들 수 있소. 허나 나의 위신으로는 부족하니 사부님께 청을 드려야겠군. 그러니 이 일은 그분께서 맡으시겠구려. 흐흐흐.”
육화명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사부를 부려먹게 됐다는 게 꽤나 만족스런 듯했다.
“나서야 하는 것은 국공 대인인데도 그대가 냉큼 승낙하는구려.”
심협 또한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핀잔을 줬다.
“사부님께서 그대에게 그리 먼 길을 다녀오라 명하셨으니 그런 일쯤 당연히 해줘야 마땅하지 않겠소? 됐소, 그대는 신경 쓰지 마시오. 이 일은 사부님께 가서 떼를 좀 쓰고 귀찮게 굴면 될 게요.”
육화명은 심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심협은 여전히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영유와 기린혈을 꺼내 전부 넘겨주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 보름이 지났다.
심협 일행은 준비를 마치고 서역으로 출발했다.
세 사람은 하얀 비주(飛舟)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여 구름을 헤치고 달을 지나 꼬박 하루 밤낮을 날아간 뒤에야 대당 변경에 이르렀다.
심협은 비주 위에 가부좌를 튼 채 묵묵히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그의 온몸 위아래로 희미한 붉은 빛이 비쳐 나왔다.
기린혈을 정제해 만든 수명 연장 단약을 이미 다 복용한 뒤였다. 상서로운 짐승답게 기린의 정혈을 정제하여 만든 단약의 효과는 일전에 얻었던 용혈보다도 뛰어나서, 수명이 50여 년 늘어났다.
게다가 기린은 불 계통의 성수(聖獸)로, 용혈을 복용했을 당시 물을 통제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던 것처럼 그는 불의 원력을 다루는 자질도 꽤 많이 증가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뜨면서 탁한 기운을 가볍게 뱉어냈다.
손실된 수명을 모두 회복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어쨌거나 이러한 단약은 속세에서든 수선계에서든 엄청난 행운을 잡은 것과 같다. 그런 단약을 얻은 것 자체가 일종의 기연이었으니 더는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심협 자네 말이야, 어쩐지 못 본 동안 수련 경지가 놀랍도록 발전했더라니, 수련에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는구먼! 내가 사문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벌써 자네에게 멀리 뒤처져 보러 올 낯짝도 없었을 걸세.”
백소천이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백형, 놀리지 마시오. 나는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니 부지런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소. 둔한 새가 먼저 날고, 부지런하면 없는 재간도 메울 수 있다지 않소. 그나저나, 지금 어디쯤 온 거요?”
심협 역시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방금 대당 국경을 지났네.”
심협은 비주 가장자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주는 낮게 날고 있어서 발아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높이 솟은 산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다만 이곳의 산맥은 산세가 험하고 땅속에도 영맥(靈脈)이 없어 영기가 희박했다. 또한 인적이 없고 황량할 뿐만 아니라 새와 짐승도 많지 않아 척박한 불모지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금선대사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실 때 바로 아래의 양계산(兩界山)을 거쳐 대당의 국토를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전해지기로는 대사님의 큰 제자 손오공이 일찍이 이곳에 깔려 있었다가 후에 대사님께 구출되어 서천에 불경을 구하러 가는 내내 대사님을 보호해드렸다지요?”
백소천이 가장 큰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키며 선아에게 말했다. 같은 불문의 일맥(一脈)으로서 백소천은 선아를 매우 존경하여 ‘금선자’라고 상대방을 높여 불렀다.
“여기가 바로 양계산이로군!”
얼이 빠져 있던 심협은 그 말에 백소천이 가리킨 산봉우리를 훑어보았다.
그는 문헌에서 대당의 황제가 서역을 정벌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당시, 국경을 명확히 표시하기 위해 이 산의 이름을 양계산으로 명명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백 시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승 기억이 좀 나는 것도 같습니다. 내려가서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선아는 발아래의 산맥을 조금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물론 안 될 것 없지요.”
백소천은 싱긋 미소 지으면서 손을 휘둘러 비주를 조종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떠나기 전에 선아가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써 도우라는 사문 어른들의 분부를 받았기에 지금 상황을 아주 반가워했다.
심협도 대당 국경 밖의 산수에 관심이 많다 보니 흔쾌히 함께 갔다.
세 사람은 양계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백소천은 사물을 보고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 당시 금선자가 서유취경(西遊取經)했던 기록에 따라 선아를 안내하며 구석구석 자세히 둘러보았지만, 아쉽게도 끝내 성공하지는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뒤이어 백소천은 당시 불경을 구하러 갔던 길을 따라 비주를 조종했지만, 선아는 그 장소들을 보고도 거의 멍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선아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며 가다보니 자연히 일정은 늦어졌고, 그들은 무려 한 달 남짓 지나서야 오계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오계국? 한데 왜 이리 탁한 기운이 짙은 거지?”
비주에 서서 아래쪽 땅을 내려다보며 백소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계국은 눈이 닿는 곳마다 누런 모래와 사막이었다. 공기 중에는 영력이 희박했다. 반면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검은 안개가 그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여서, 그나마 맑았던 하늘마저 어둑어둑해 보였다.
심협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오계국의 상황은 꿈속에서 본 것과 퍽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