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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12화 (412/1,214)

412화. 수륙대회

자정이 가까워오자 심협과 백소천 그리고 일부 조정 관리들은 북쪽 성문의 성벽 꼭대기에 서서 멀리 성안을 바라보았다.

성안에는 백성들이 방 바깥으로 나오는 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방 안에는 여전히 점점이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번 재난에 죽은 친척이나 이웃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추모하는 것이었다.

어느 방에선가 종이로 된 공명등 하나가 먼저 유유히 하늘로 떠오르자, 뒤를 이어 각 방시에서 산자들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공명등이 하나둘 날아올랐다.

하얀 등불들은 높이 하늘로 날아올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별들과 멀리서 호응하여, 마치 하늘과 사람이 소통하는 다리가 연결되기라도 한 듯 천천히 성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이 시선을 천천히 내려보니, 성문 근처로 행진하던 승려들이 손에 연화등을 든 채 길 양옆으로 갈라서는 것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 도로에는 자그마한 형상만이 쓸쓸하게 홀로 남아 몸에 가사를 두르고 손에 염주를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염불을 외웠다. 그의 뒤로는 수십만의 망령들이 빽빽하게 떠다니며 그의 발걸음을 따라 성 밖으로 향했다.

수십만의 망령이 한데 모이자, 악한 생각이 없는 평범한 망령일 뿐이라고 해도 응집된 음살의 기운은 놀라울 지경에 이르러,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선아의 몸에서는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은 달빛처럼 부드럽지만 따스한 기운을 띤 채 촛불처럼 망령들의 앞길을 비추었다.

선아가 천천히 장안성 성문을 지나 문동을 나서는 그 순간, 문득 그의 발밑에 빛이 몰려들면서 한 송이 황금연꽃 형상이 나타났다. 이어서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땅 위에 금빛 연꽃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는 정말 불타의 제자인 금선자의 환생처럼 몸에 불광을 띤 채 중생을 구제하였다.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신선과 부처가 영험을 드러냈다고 여겨 잇달아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선아는 수많은 귀신들을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성에서 백 장쯤 떨어진 먼 곳에는 길 양옆에 갑자기 밤안개가 겹겹이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는 송이송이 잎 없는 꽃들이 희미하게 피어나 한들한들 흔들렸다.

심협은 그 꽃송이들이 바로 저승에 피어나는 피안화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선아는 백 장 밖 짙은 안개와 잇닿은 곳까지 다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서 그가 두 손을 합장하자 몸에서 번득이던 빛은 더욱 밝아졌다.

줄곧 그를 따라온 망령들은 앞으로 연이어 둥둥 떠서 날아가며, 강줄기가 나뉘는 것처럼 그의 몸을 돌아 자욱한 안개 속으로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다.

한데 바로 그때, 선아의 앞가슴에 달린 염주에서 갑자기 이상한 빛이 번뜩이며 핏빛 안개가 솟구쳐 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니, 선아와 수많은 귀신들을 집어삼켰다.

“이런!”

심협은 안색이 급변하여 성벽 밖으로 곧장 몸을 날렸다.

그의 발걸음은 성벽을 타고 아래로 곧장 내려가다가, 성벽을 세차게 밟고 높이 뛰어올라 한 마리 맹금류처럼 망령들 속으로 뛰어들어 선아를 향해 스치듯 날아갔다.

주위의 망령들은 핏빛 안개의 영향을 받아 질서정연하던 형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고, 어두운 녹색이었던 많은 망령들의 눈동자가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며 유혼에서 악귀로 돌변했다.

성안에 가득한 생혼(生魂)의 기운을 느낀 이 사령(死靈)들은 순간 굶주린 야수처럼 다시 성문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그들이 지나간 곳마다 역병이 퍼지듯 엄청난 양의 유혼들이 순식간에 악귀로 변해, 한순간 성문 전체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성문 안에 있던 보상사의 승려들은 즉시 법기를 들고 문 밖으로 뛰쳐나왔고, 자석 장로도 몇 사람과 함께 날아와 왕생주와 정심주(靜心呪)를 읊조리며 유혼들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핏빛 안개에 전염된 유혼들은 이런 염불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맹렬히 돌진해오면서 점점 많은 망령들을 악령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보상사의 제자들은 포진하라!”

녹덕선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모든 보상사 승려들이 잇달아 뛰쳐나와 가로로 늘어서서 인간 장벽을 세우고는 성안의 망령들과 앞에서 돌진해오는 악귀들의 가운데를 막아섰다.

이 승려들은 손에 든 목탁 등 법기를 쉬지 않고 두드렸고, 이제 왕생주가 아닌 항마주(降魔呪)를 읊기 시작했다. 모든 소리가 한데 뒤섞여 장엄한 범음이 되었다.

범음의 물결은 약했다가 강해지고 거듭될수록 커지더니, 점차 해일과 같은 기세의 반투명한 음파로 변해 엄습해오는 악귀들에게로 기운차게 밀려갔다.

악귀들은 음파 안으로 뛰어든 순간, 하나하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힌 것처럼 돌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 악귀들은 몹시도 사나워, 돌진이 가로막히자 더더욱 흉악해졌다. 그들은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 충돌했고, 그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이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은 심하게 흔들렸고, 음장법진(音障法陣)을 작동시키던 승려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충돌이 계속되자, 경지가 부족한 이들은 이미 신음하기 시작했고, 입으로 토하기도 했다.

쨍강!

성벽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백소천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와 밀물 같은 악귀 떼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천, 이들 모두 장안 백성의 생혼이다. 잠시 마혈에 오염되어 혼념(魂念)이 불안정하니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된다.”

공도(空度)라는 법명의 나이 지긋한 선사가 즉시 주의를 주었다.

말을 마친 그가 먼저 승려들을 뛰어넘어 손을 휘두르자, 패엽(*貝葉: 옛날 인도에서 불경을 새기던 나뭇잎)불경이 날아가 마치 시화(詩畫)가 그려진 긴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촥 뻗어나가면서 악귀 백여 마리를 한 바퀴 휘감았고, 그 안에서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두루마리 속 악귀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고, 그들의 입과 코에서는 시뻘건 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하나둘 광기가 사그라들면서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패엽불경에 적힌 수많은 옛 범어 글자들이 하나하나 벗겨져 내려와 백성들의 유혼을 대신해 혈기를 흡수하고 반딧불처럼 높이 하늘로 솟아올라 점점이 불티로 타오르며 흩어졌다.

곧이어 녹진선사가 손을 휘두르자, 팔보경당(八寶經幢)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성문 바깥에 떨어졌다. 경당에서는 오색유리의 빛이 뿜어져 나와 비치는 곳마다 모든 악귀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속박됐다.

자석 장로도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몸을 날려 사람들 앞에 내려선 뒤, 악귀들 사이를 헤치며 손에 든 보경으로 미쳐 날뛰는 악귀들을 하나하나 비추었다.

이 보경에서 빛이 떨어질 때마다 악귀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백소천이 검결을 맺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줄줄이 금빛 검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방패처럼 늘어서며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 날개를 가로막고 문을 돌아 성 양편으로 흩어지던 악귀들을 막아냈다.

성안 관부의 수사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잠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귀물 떼의 역습을 막았다.

* * *

한편, 그 무렵 심협은 핏빛 안개가 자욱한 지역으로 단번에 파고들었다. 곧 그의 귓가에는 악마들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눈앞도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한데 뜻밖에도 예상과 달리 귀물 떼는 선아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심협이 다가서자 먹잇감을 본 듯 잇달아 그에게 달려들었다.

심협도 이 망령들이 핏빛 안개의 영향을 받아 이러는 것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일 마음은 없었다. 이에 그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발아래 달빛을 흩뿌리며 사월보를 시전해 망령 귀물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겹겹이 망령들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선아를 발견했을 때,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닥에 가부좌를 튼 채,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선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커다랗고 텅 빈 하얀 형체가 하나 떠 있었다. 몸에는 새하얀 가사를 입었고, 머리에는 오불관에 비로모(*膍盧帽: 승려들이 쓰는 모자)를 쓴, 젊고 준수한 형체였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여 선아와 거리를 두고 눈을 맞추었다.

바로 이 형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몽롱한 빛이 음귀들에게 침식당하지 않도록 선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심협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그 승려의 허상은 몸을 돌려 멀리있는 그에게 손바닥을 세우며 예를 갖추었고, 입으로는 소리 없이 불호를 읊조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그 형상은 갑자기 한 손을 결인하고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사방에 바람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곧 세찬 핏빛 안개가 역으로 몰려와 그 승려 허상의 손 안에서 단단하게 응집되었다. 그리고는 아홉 개의 핏빛 염주알이 되더니 변해 금실에 하나로 묶였다.

승려가 손으로 핏빛 염주를 비벼 굴리자 몸에서 불광의 정기(正氣)를 띤 오색 유리 빛이 번득이더니, 손에 든 염주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한 허깨비로 변해갔다.

모든 빛이 핏빛 염주 속으로 흘러들 때까지 둘은 서로를 소모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핏빛 염주가 사라지는 순간, 사방 천지가 다시 맑아졌다. 앞서 미혹되었던 망령들의 눈에 감돌던 핏빛도 모두 사라져 두 눈이 다시 짙은 녹색으로 되돌아왔다. 다만 그들은 혼력(魂力)을 적잖이 소모한 탓에 모두 멍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미타불…….”

이때, 염불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심협이 문득 돌아보니 선아가 이미 일어서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앞쪽의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가며 계속 왕생주를 읊는 것이 보였다.

왕생주는 다시 장안의 망령들을 저승으로 인도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심협은 선아 곁으로 번쩍 몸을 날려 그와 나란히 서서 알게 모르게 그의 길을 지켜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대한 수륙대회는 축시(丑時: 오전 1시~3시)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 * *

깊은 밤, 처소로 돌아온 심협의 머릿속에는 장안의 밤하늘을 수놓던 수천 개의 등불과 북쪽 성문 밖에서 수많은 망령들이 저승으로 들어가던 장면이 계속 되풀이 되어, 한참이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부들방석 위에 앉아 한참을 좌선하다가 문득 마음이 동해 옥침을 꺼냈다.

손바닥으로 옥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정신을 그 안으로 집중하자 곧 그 안에 떠 있는 천책이 느껴졌다.

우연히 천책을 불러내 적에 맞서고 꿈속의 수련 경지를 현세에 투영하게 된 뒤로, 심협은 줄곧 천책과 소통하려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정이 처음에 말했던 대로라면 천책과의 소통은 온전히 신혼에 달려 있었고, 지금 천책과 소통할 수 없는 것은 신혼의 힘 또는 신념(神念) 파동이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껏 천책을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뿐이었는데,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신혼의 파동 덕분인 듯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심협은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옥침 위에 손을 얹은 뒤,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애써 형상을 갖춘 심신(*心神: 마음과 정신)의 불꽃으로 변하게 하여 옥침 안에 떠 있는 천책을 향해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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