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11화 (411/1,214)
  • 411화. 야담(夜談)

    “심협, 이번에 금산사 여정에서 또 한 번 공로를 세웠으니,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너의 호신 법기가 두 개나 망가졌다니 내가 하나 선물하마. 보상인 셈 치거라.”

    정교금이 말했다.

    “앞서 부탁드린 일만으로 이미 보상해주신 셈입니다. 더는 마음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심협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물건은 이제 내게 큰 쓸모가 없으니 네게 주면 딱 맞겠구나.”

    정교금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팔각 구리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거울은 암청색으로, 청동을 연단해 만든 것 같았다. 표면에는 세로로 일곱 줄기가 돋아 있어 거울 뒷면을 여덟 부분으로 나누었고, 각 부분마다 예스러운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팔현경(八懸鏡)……. 사부님, 심형이 사부님 제자입니까, 아니면 제가 사부님 제자입니까? 이건 좀 너무하십니다!”

    육화명이 입술을 툭 내밀더니 투덜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심협에게는 육화명의 전음이 들려왔다.

    ‘심형, 사부님께서 이번에 정말 큰 밑천을 들이셨소. 팔현경은 왕년에 사부님께서 수행하실 때 지니셨던 법보요. 단순히 방어능력밖에 없지만, 그 위력이 대단하오. 어지간한 대승 초기 수사들이 전력을 다해 가한 일격도 문제없이 막아낼 정도이니 냉큼 받으시오!’

    잠시 망설이던 심협은 육화명의 전음을 듣자마자 안색이 활짝 피며 말했다.

    “선배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교금은 심협의 태도가 이토록 빨리 바뀌는 것에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이 팔현경도 법보에 속하니 내가 이 법보만을 위한 제련 구결을 가르쳐주마. 18도 금제를 제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게다. 나중에 통제하는 데에는 많은 법력이 소모되겠지만, 경지가 높아지면 그런 건 문제되지 않을 게야.”

    말을 마친 그는 심협에게 팔현경을 던져주는 동시에 전음으로 구결을 전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팔현경을 받으며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은 먼저 작별을 고하고 관부 서남쪽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그는 팔현경을 꺼내 정교금이 전수해준 제련 구결대로 제련하기 시작했다.

    이 구결은 오로지 이 법보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제련 속도가 매우 빨랐고, 덕분에 저녁 무렵에는 이미 그 위에 걸린 모든 금제의 제련을 마쳤다.

    그가 손으로 결인하여 팔현경을 향해 휘두르자 곧 법력 한 줄기가 그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팔현경에서 푸른 빛이 파르르 진동하더니 유유히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거울면 위에는 화려한 광채가 번쩍이며 아래쪽으로 밝은 빛을 쏘아 그의 사방에 거울 같은 여덟 줄기 푸른 빛의 장막이 맺혔다.

    각 장막마다 부적 문양이 하나씩 비쳤고, 앞을 향해 강렬한 영력 파동이 전해져왔다.

    심협은 눈을 살짝 빛내며 손의 법결을 다시 바꾸었다. 그러자 체내의 많은 법력이 순간 미친 듯이 솟구쳐 나오면서 머리 위 보경(寶鏡) 앞면에 갑자기 고풍스러운 부적 문양이 떠올랐고, 이내 거울 전체가 금빛을 발했다.

    눈부신 금빛이 내리쬐자 사방을 뒤덮은 여덟 면의 푸른 빛 장막들도 한순간 금색 빛 장막으로 변했다. 뒤이어 그 위의 부적 문양이 제각기 뒤틀리고 변하여 글자에서 형체를 이루더니 여덟 마리의 전설 속 진산이수(*鎭山異獸: 진산은 한 나라나 고을을 지키는 큰 산으로, 진산을 지키는 기이한 짐승을 뜻함)가 되었다.

    이 기이한 짐승들이 나타나자 팔현경 전체의 방어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심협은 육화명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마침내 깨달았다.

    “정말 대단한 보배로구나!”

    심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손을 흔들어 팔현경을 거둬들이고 손목을 빙글 돌리자, 몸 앞에 빛이 번쩍 스치면서 몇 가지 물건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각각 <백귀온신대법>과 호두알만 한 방울 그리고 기이한 짐승의 머리가 새겨진 칠성보갑이었다.

    이 물건들을 잠깐 훑어본 그가 허리춤의 건곤대를 툭 치자 귀무(鬼霧)가 자욱하게 깔리더니 귀장 조비극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심협은 그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두터워졌다. 특히 얼마 전 흑봉요 전투에서는 꽤나 감동하기까지 했다.

    “주인님.”

    조비극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포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비극, 네게 쓸모 있을 만한 물건들이 좀 있다.”

    심협은 손짓으로 그를 일으켜 세운 뒤 말했다.

    그 말에 조비극은 앞에 놓인 물건들을 훑어보고는 순간 얼굴에 한 가닥 희색이 반짝 스쳤다.

    “주인님의 후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했다.

    “기억은 좀 되찾았느냐? 어째 너는 늘 고개를 조아리며 절하는 게, 생전에 군대의 장수가 아니라 산적 패거리였던 것 아니냐?”

    심협은 그가 격식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는 농을 섞어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기억은 되찾지 못했지만 전쟁터에서 싸우던 기억들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군인 출신이겠지요.”

    조비극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이 <백귀온신대법>은 귀수들의 공법인데, 수련할 수 있는지 좀 살펴보거라.”

    심협이 웃으며 말하자 조비극은 짧게 답하고는 사람 가죽으로 만든 귀서를 받아 자세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표정이 상기되더니 이내 그 귀수의 공법을 꽉 붙든 채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떠냐? 네가 수련하기에 적당한 공법이 맞느냐?”

    심협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답을 알면서도 은근히 물었다.

    “이런 공법을 수련하면 곧장 귀선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조비극은 즉시 바닥에 꿇어 엎드려 거듭 감사의 절을 올렸다.

    “나도 이미 읽어본바, 수련 과정이 모질고 사악해보이지만, 수행하는 이가 귀물을 몸에 받아들일 때 함부로 남의 목숨을 탐하지 않고 악귀들만 잡아먹는다면, 그 역시 바른 길을 걷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훗날 겁을 견뎌내고 귀선이 되면 몸속에 깃든 악귀들을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세상을 위해 온갖 귀물들을 천도하는, 공덕이 한량없는 일이다.”

    심협은 진중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속하 반드시 주인님의 가르침을 따라 악귀들만을 목표로 하여 절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반드시 하늘이 내린 날벼락을 맞아 혼백이 산산이 부서지는 말로를 맞을 것입니다.”

    조비극은 손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했다.

    “좋다. 일어나라. 이 소음령(嘯音鈴)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다. 또한, 여기 칠성보갑도 훌륭한 호신 기구다. 모두 너에게 하사하니, 앞으로 근면하게 수행하며 오늘의 맹세를 잊지 않길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릴 것도 없이 내가 너를 벌할 것이다.”

    심협은 손을 휘둘러 방울과 칠성보갑을 귀장 앞으로 보냈다.

    두 법기를 받아 든 조비극은 또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시울을 붉히며 두 손을 포권하고 또다시 거듭 절을 했다.

    그때, 심협은 누군가가 뜰로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비극을 다시 건곤대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상대가 두드리기도 전에 손을 휘둘러 문을 열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 아래, 백소천이 한 손에는 하얀 자기 술병 두 개를 들고 다른 손에는 기름얼룩이 스며든 우피지 꾸러미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 거리낌 없이 문턱을 넘어 곧장 탁자앞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날 찾아오길 기다리다가는 날이 샐 줄 알았지. 아니나 달라? 그러니 내가 좋은 술과 고기를 들고 자네를 찾아와야지 별수 있겠는가?”

    백소천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불평했다.

    그가 우피지 꾸러미를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고기 냄새가 온 방안에 퍼졌다.

    심협은 막 춘추관에 입문한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 한 가닥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어 문을 닫았다.

    “미처 백형을 찾아갈 틈도 없었잖소.”

    심협은 맞은편에 앉아 백소천과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입에 털어넣었다.

    “이곳 장안성의 술은 춘화현보다 낫고 건업성 것도 비할 바가 못 되지. 다만 이 거위구이는 좀 별로란 말이야. 진(鎭)의 홍운루보다 한참 떨어져!”

    백소천이 고기를 한입 덥석 베어물면서 투덜거렸다.

    “화생사에서 백형에게 육식을 허락하지 않았던 거요?”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낀 심협은 웃으며 물었다.

    “절간 안에 있으니 물론 허락하지 않지만, 내 몰래 여기저기 쏘다니던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슬그머니 빠져나오면 그만이지. 배고플 틈도 없었다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소운이 집을 나갔는데, 화생사에 갔던 게요?”

    심협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응, 그놈도 운이 좋아. 절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공색(空色) 사숙의 눈에 들어 그분의 수제자가 되었다네. 나중에 듣고 보니 녀석이 그리 달라진 것이 자네 덕이라지? 정말 뜻밖이었어.”

    백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심협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해.”

    백소천이 잔을 들고 건배하며 말했다.

    “됐소. 또 무슨 고맙다느니 섭섭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면 화를 낼 거요.”

    심협은 잔을 한 번 부딪치고는 짐짓 화를 내는 표정으로 꾸짖었다.

    술잔을 비운 백소천이 물었다.

    “내일 저녁 술시(戌時: 오후 7시~9시)에 수륙대회가 정식으로 거행될 거고, 자정 무렵에는 장안성 북문이 열리면 망령들을 인도하여 성 밖으로 나갈 걸세. 자네도 가보겠는가?”

    “나 또한 이번 장안의 귀환을 몸소 겪은 사람이니, 마땅히 가서 장안 백성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지요.”

    심협은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에 장안성에서 목숨을 잃은 이가 많으니 아주 장관일 걸세.”

    백소천이 비통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인간세상 한바탕 비극이 마침내 막을 내리는 때이니 장관일 만하외다.”

    심협도 그리 대꾸하며 술을 털어 넣었다.

    * * *

    이튿날.

    온 장안성에는 황궁부터 관아까지, 또 고관들의 저택부터 백성들의 가옥까지 모든 거리와 골목마다 하얀 등롱이 걸려 온 성이 소복을 입은 듯했다.

    또 하루 동안 낮 내내 연기와 불 피우는 것을 금하여 성안 어디에서도 밥을 지을 수 없었기에 찬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저녁 술시가 되자, 성안에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각 방시는 미리 문을 닫아 야간 통행금지에 들어갔다. 백성들은 방(坊)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고, 성안의 주요 도로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한편, 황성 앞 광장에는 수백 명의 보상사 승려들이 바닥에 가부좌를 튼 채 사람마다 몸 앞에 연꽃 모양 유등을 밝히고 손에는 목탁을 들고 두드리며 왕생주(往生呪)를 외웠다.

    그중에서도 앳된 모습의 선아는 가장 돋보였다.

    이러한 독경은 꼬박 한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해시(亥時: 밤 9시~11시)가 되어서야 그쪽의 불사(佛事)는 끝이 났고, 승려들은 연화등을 든 채 성안의 주된 길마다 길을 따라 행진하며 곳곳에서 비참하게 죽은 백성들의 넋을 부르기 시작했다.

    점점이 등불이 성 곳곳을 밝히자, 무서운 얼굴을 한 원혼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산산이 흩어질 것을 깨닫고 망연하게 승려들 뒤를 떠다니는 이도 있었고, 슬피 통곡하는 이도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처럼 끊이질 않았다.

    어떤 원혼들은 이미 떠도는 악령이 되어 승려들을 습격하려다가 연화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격퇴당하기도 했다.

    이 연화등은 모두 보상사에서 가져온 장명등(*長明燈: 불상이나 신상 앞에 밤낮으로 켜두는 등불)으로, 안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보태준 등유가 타고 있었다. 악령들은 몇 차례 돌진해 왔지만, 승려들을 다치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등불의 광채에 정화되어 온몸의 검은 살기가 차츰 벗겨지고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부 음살은 기운이 퍽 짙었다. 이를테면 우물과 빙고(氷庫) 근처에는 장명등도 정화할 수 없는 악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결국 관에서 배치한 수사들에게 멸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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