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401화 (401/1,214)
  • 401화. 입막음

    “령아…….”

    흑봉요괴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뗐으나, 갑자기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탁한 피가 그녀의 목을 타고 울컥 뿜어져 나와 고화령의 옷자락까지 검게 물들였다. 두 눈의 광채 역시 빠르게 어두워져갔다.

    “어머니!”

    고화령이 재빨리 흑봉요괴를 부축했다.

    “심형, 조금 전 그대의 일격이 실로 강했나보오. 법보에 담긴 용의 기운이 그녀의 생명력 대부분을 끊어 놓았으니 원신이 곧 무너질 거요.”

    육화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안 돼요! 어머니…….”

    육화명의 말을 들은 고화령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이내 작은 병에서 유영단을 하나 꺼내 흑봉요괴의 입속으로 튕겨 넣었다.

    단약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흑봉요괴의 상처는 순식간에 대부분 회복되었다. 다만 두 눈의 광채는 여전히 어두워져갔고, 생명력도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유영단으로도 그녀의 부상만 회복시킬 뿐, 목숨만은 구할 수가 없는 듯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시오. 제발 어머니를……. 흑흑!”

    고화령은 지금까지의 강경했던 모습을 거둬치고, 배꽃이 빗물을 머금은 듯 고운 얼굴에 눈물을 지으며 심협에게 거듭 애원했다.

    하지만 심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육화명이 소매를 더듬더니 금빛 문양이 그려진 자색 부적을 한 장 꺼내 흑봉요괴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혈에 턱 하고 갖다 붙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부적이 환하게 번득이더니 금빛이 한 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금빛 7층 보탑의 허상이 나타나 흑봉요괴의 몸을 뒤덮었다.

    탑의 뾰족한 꼭대기에는 불보명주(佛寶明珠) 한 알이 박혀 있는 듯했는데, 부드러운 금빛을 뿜어내 흑봉요괴의 식해를 억누르고 그녀의 신혼을 진정시켰다.

    “이것은……?”

    심협이 눈앞의 상황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귀부요. 싸우는 동안은 쓸 기회를 찾지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허나 이것은 그녀의 신혼을 얼마간 봉인할 수 있을 뿐, 부적의 영력이 다하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니 물을 것이 있거든 서두르시오.”

    육화명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보탑 허상 안에서 흑봉요괴가 지닌 생명력은 빠르게 소실되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빛이 감돌았다.

    “너희가 말한 조직이 무엇이냐?”

    심협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뜻밖에도 흑봉요괴의 눈 깊은 곳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요족(妖族) 내부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신비한 조직이다. 우린 인간족을 몹시도 혐오해 그들을 죽이고 멸문시켜 인간 일족을 파괴하는 일을 주로 해왔지. 춘추관은 본디 나의 임무였다. 다만 당시 나는 혈독이 재발해 폐관이 필요했기에 령아에게 경험도 쌓게 해줄 겸 이 아이를 속인 것이다.”

    “그 조직의 이름은 무엇이며 기반은 어디에 있지?”

    이번에는 고화령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너희 둘의 목숨이 모두 내 손에 달렸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고 답하라.”

    다시 싸늘해진 심협의 목소리에 흑봉요괴가 대신 답했다.

    “령아는 조직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로 모른다. 그 조직은 너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숨겨져 있다. 대당관부조차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심협이 바라보니 육화명도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조직은 고정된 장소에 머물지 않고, 매번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임시로 소집한다. 구체적인 것은 나도 전혀 몰라.”

    고화령이 덧붙여 말하자 심협이 흑봉요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어떤가? 알고 있는가?”

    “물론 령아보다는 많이 알고 있지. 허나 답을 듣고 싶다면 한 가지를 약조해야 한다.”

    “지금 나와 거래를 할 처지가 아닐 텐데?”

    심협이 손에 든 용각추를 치켜들며 위협하자 흑봉요괴의 눈에 노기가 번득였지만,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게 말한다면 조직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 나야 어차피 죽은 후겠지만, 령아에게 불똥이 튀겠지. 그러니 약속해주었으면 한다. 적어도 이 아이가 대승기에 들어갈 때까지 나를 대신해 보호해주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네가 지금 우리 둘을 죽인다 한들 나는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죽으면 속 시원히 갈 수 있을 테니까.”

    심협은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화령을 놓아주고 힘닿는 데까지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지. 허나 언제까지 보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내 능력 안에서만 지켜주겠다.”

    그러나 고화령은 그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네놈의 보호 따위 필요 없어!”

    흑봉요괴는 고화령을 보며 쓰게 웃더니 더는 강요하지 않고 말했다.

    “그 조직의 이름은…….”

    그녀가 막 말을 이어가려는데 갑자기 심협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몸을 홱 틀면서 체내 법력을 불러일으키며 한 손을 옆으로 휘둘렀다.

    육화명 등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검은 빛이 한 줄기 심협의 소매 아래를 지나쳐 순식간에 진귀부가 응집한 금빛 보탑을 부수고 흑봉요괴의 미간에 박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뒤로 홱 넘어가면서 목소리가 뚝 그쳤다.

    심협의 눈에 격노한 기색이 스쳐 지나더니, 흑봉요 깊은 곳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바위를 향해 돌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용각추에 용 울음소리가 들려오면서 금빛 용 그림자로 변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지만 10여 장을 나아간 용각추는 파르르 떨리며 거의 땅에 처박힐 뻔했다. 반면 바위 쪽에서는 검은 돌풍이 세차게 일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갔다.

    심협은 비록 부상에서 회복되긴 했으나 기운은 쇠한 상태라 멀리 달아나는 돌풍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육화명과 눈을 맞추었을 때, 두 사람의 눈에는 주저하는 기색이 어렸다.

    “어머니!”

    한편, 고화령은 비통함이 가득한 눈으로 흑봉요괴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절규했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무렵, 흑봉요괴의 눈에서는 빛이 완전히 사라졌고, 몸에서는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검은 봉황의 몸으로 돌아갔다. 깃털들은 광택을 잃고 어두워진 상태였다.

    고화령은 천천히 일어나 흑봉요괴의 시신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잠시 후, 흑봉요괴의 몸에 검은 불길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심…… 도우, 그 사람의 생김새를 분명히 보았소?”

    고화령은 불길 옆에 선 채 도망가려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흑봉요괴에게 쏠려 있었기에 아직 심협의 달라진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생김새는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낯이 익은 것으로 보아 구면인 듯하다.”

    심협이 천천히 말했다.

    “그자가 누구요?”

    고화령의 물음에 육화명과 심협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요풍.”

    흑봉요괴의 몸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차츰 사그라들더니 마지막 한 점의 불티마저 완전히 꺼졌고, 봉황의 몸뚱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타다 남은 마지막 재마저 흩어지자, 바닥에는 봉황이 나뭇가지에 누워 있는 듯한 모양의 옥돌 결정체와 황금빛 봉황 깃털 두 가닥이 나타났다.

    고화령은 봉황옥과 금빛 봉황 깃털을 주워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심협과 육화명 모두 이를 보고도 막지 않았다.

    한참 뒤, 고화령은 돌아서서 금빛 깃털들과 봉황옥을 심협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쨌거나 춘추관 일에 가담했으니 책임을 피하지 않겠소. 대신 나를 도와 요풍을 찾아주시오. 내가 어머니의 복수를 하도록 해준다면, 그 뒤에는 마음대로 하시오. 죽이고 싶다면 죽여도 좋소.”

    심협은 봉황옥과 금빛 깃털을 받아 살펴본 뒤 봉황옥을 되돌려주었다.

    “금봉우는 쓸 곳이 있지만, 이 봉황옥은 네 것이다. 그녀의 유품인 셈이지. 나도 줄곧 요풍에 대해 캐보던 차였다. 한데 이제 새롭게 조직의 존재까지 알게 됐으니, 우리가 힘을 합쳐야 될 것 같구나.”

    고화령은 흠칫 놀라 심협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히고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두 손을 내밀어 봉황옥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허나, 너는 우리를 따라 장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관부에서 너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에 결정할 것이야. 앞서 흑봉요괴에게 너의 목숨을 지켜줄 것이라 약조하였으니, 그 점은 안심해도 좋다.”

    심협은 육화명의 전음을 듣고는 또다시 말했다.

    “알겠소. 그리 하겠소.”

    고화령은 봉황옥을 챙기며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그녀는 현치의 시신을 잘 안장하고 산간 평지의 오동나무 아래로 돌아가 잠깐 정리를 했다. 심협과 육화명은 골짜기에 남아 운기조식하며 휴식을 취했다.

    이튿날 새벽, 고화령이 추가된 일행은 흑봉요를 떠나 금산사로 출발했다.

    금선법회는 사흘 연속으로 열리는 터라, 심협 일행이 금산사로 돌아왔을 때는 경내에 무수한 참배객과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서 이미 절 안 광장에 앉을 자리가 없었고, 적잖은 사람들이 절 밖에 자리를 깔고 앉은 상황이었다.

    법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심협 일행은 곧장 금산사로 들어가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진 산비탈에 내려서서 걸었다.

    때마침 강류대사가 강단에 올라 설법을 하는 중이라 낭랑한 설법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고, 금산사에서 한참 떨어져 있던 세 사람도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돌아왔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심형, 어서 들어갑시다.”

    육화명은 한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심협도 조바심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신들은 금산사에 뭘 하러 가는 것이오?”

    고화령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알 것 없다.”

    춘추관을 멸망시킨 조직의 뒤를 캐야 했지만, 심협은 춘추관의 일이 여전히 앙금으로 남았기에 자연히 고화령을 대하는 말투가 시큰둥했다. 이에 고화령은 불쾌해 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입장도 아니었다.

    “얼마 전 장안성의 귀환으로 적잖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은 까닭에 금산사의 강류대사에게 부탁하여 원혼들을 천도하려 하오. 그러니 그대는 스님들에게 발각되어 공연한 사단이 나지 않도록 요기를 잘 감추도록 하시오.”

    옆에 있던 육화명이 끼어들어 당부했다.

    “누구에게 부탁한다고 했소? 강류?”

    고화령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묻자 육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도 강류대사를 아시오? 그럴 법도 하지. 흑봉요는 금하산과 멀지 않고, 강류대사는 그리 명성이 자자하니까.”

    “어쨌든 앞으로 힘을 합쳐야 하니 내 조언 하나 하지. 당신들은 강류에게 부탁해봐요 소용없을 거요.”

    고화령의 뜬금없는 말에 육화명은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그렇소?”

    “그 강류란 자가 하도 유명해서 나도 예전에 어머니의 부상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러 가명을 쓰고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그자의 비밀을 알게 되었소.”

    “무슨 비밀?”

    심협이 불쑥 끼어들어 묻자, 고화령은 그를 힐끔 보고는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었다.

    심협은 조금 쌀쌀맞았던 대꾸를 고화령이 마음에 담아두고 성깔을 부리니 내심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는 육화명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두 분 도우께서는 앞으로 함께 힘을 합쳐야 하니 사소한 일로 성내지 마십시다. 고 도우, 도대체 무슨 비밀을 보았소? 강류대사의 일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하니 부디 가르침을 주시지요.”

    육화명이 두 사람 사이에 서며 고화령에게 예를 갖춰 공수했다.

    그제야 고화령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강류라는 자는 한창 설법을 하고 있으니 아직 보장 안에 있을 테지. 가서 보장을 열어젖히기만 하면 알게 될 것 아니오! 가고 말고는 당신들이 알아서 정하고, 나중에 내 탓이나 하지들 마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입을 꾹 다물고는 돌아서서 한쪽에 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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