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환세술(喚世術)
선홍색 피는 마치 흡수된 것처럼 천책 허상 위에서 점점 흐려지고 줄어들었다.
곧이어 천책 전체가 갑자기 검붉게 변했고, 그 안에서 기이한 힘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붉은 빛이 천책 표면에 응집되었다. 그리고는 붉은 빛기둥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았다.
흑봉요괴와 사람들은 그제야 천책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실체를 지닌 듯한 검붉은 기둥은 하늘 높이 치솟았는데,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기둥이 하늘의 먹구름을 어지러이 휘저어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는 것만 같았다.
이때, 문득 하얀 빛줄기가 빛기둥 깊숙한 곳에서 반짝였는데, 이 빛이 사람 그림자 하나를 감싸고 높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심형?”
육화명은 그 그림자를 본 순간 참지 못하고 놀라서 외쳤다.
귀장 역시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던 흑봉요괴는 이내 분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심협은 여전히 얼굴을 아래로 하고 바닥에 고꾸라져 있어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흥! 감히 눈속임을 하려 들다니!”
흑봉요괴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 손을 세차게 휘두르자, 금빛 화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나와 금빛 찬란한 낫처럼 사람 그림자를 쓸어버렸다.
그러나 사람 그림자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금빛 화염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펑!
사람 그림자에게 금빛 화염이 꽂힌 순간, 굉음과 함께 무수한 금빛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화염이 흩어지자 그림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그러더니 한 걸음 내딛어 단숨에 심협에게 다가가서는 순식간에 그 위로 쓰러졌고, 마치 넋이 육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심협과 한 몸이 되었다.
그 순간, 심협의 온몸에 몽롱한 붉은 빛이 감돌더니 강한 바람에 휘감겼다. 그리고 몸에는 미동도 없이, 바닥에서 마치 튕기듯 일어나 꼿꼿이 섰다.
육화명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심협의 가슴에 난 무시무시한 상처에 실오라기 같은 핏빛 새살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서로 뒤엉키고 합쳐져 빠르게 회복되는 모습을 봤을 때 더욱 커졌다.
한편, 심협은 미약한 생명력도 차츰 강해졌고, 심지어 체내의 기운도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해 출규 초기에서 중기로, 곧장 후기로 돌진했다. 대승기를 단숨에 돌파할 기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와 포개진 그림자는 그와 완전히 뒤섞이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심형…… 설마 심형도 전생의 경지를 불러오는 비술을 지닌 걸까?”
육화명은 의아함을 담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편, 흑봉요괴는 섣불리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심협을 뚫어지게 살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 전혀 상상도 못한 게 분명했다.
“심협이 어찌 저리도 강해졌지?”
한쪽에서 운기조식하며 부상을 치료하던 고화령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심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파동이 불안정해 끓어오르는 수증기처럼 울컥울컥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끊임없이 출규기와 대승기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 광경에 흑봉요괴의 낯빛이 변했다. 그녀는 양손을 몸 앞으로 모으고 금빛 봉황 깃털을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자 그 속에서 갑자기 희미한 혈기가 흘러넘치면서 이윽고 우렁찬 봉황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피처럼 붉은 봉황 허상이 생겨나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꽃이 쉬지 않고 용솟음치며 그 안에서 강력한 영압이 전해졌다.
“봉황읍혈(鳳凰泣血)! 어머니께서 저 방법을 쓰시다니…….”
고화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핏빛 봉황은 다시 날카롭게 울어대며 거대한 불화살처럼 심협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한편, 심협 앞에는 벌써 금빛 용 뿔이 한 토막 떠다니고 있었는데, 가닥가닥 법력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가자 마지막 2도 금제까지 순식간에 제련되었다. 이 용각추 법보가 마침내 모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심협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희미한 사람 그림자와 순식간에 포개졌다. 그의 두 눈에서 맑은 신광(神光)이 뿜어져 나오고, 온몸의 기세 또한 변하여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의 경지는 놀랍게도 단번에 대승기를 뛰어넘어 진선 초기까지 급상승했다.
그는 온몸에서 불꽃처럼 붉은 증기를 내뿜으며 두 손으로 몸 앞에서 느린 듯하지만 빠르게 법인을 맺더니,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용각추에서 눈부신 금빛이 폭발하며 금룡 허상도 따라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 금룡 허상은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사나운 기세로 흑봉요괴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과 봉황의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고, 혈봉(血鳳)과 금룡이 용맹한 기세로 맞부딪쳤다.
꽈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온 하늘에 핏빛이 폭발하여 금빛 광흔과 뒤섞인 채 사방 천지에 흘러넘치면서 온 골짜기를 요란하게 울렸다.
혼란 속에서 금빛 봉황 깃털이 부서져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가 또다시 천천히 내려왔고, 심협이 손 가는 대로 건드리자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반면 용각추는 그대로 꼿꼿이 날아가 번쩍하고 사라졌다.
그 무렵, 흑봉요괴는 명치 부분을 용 그림자에 관통당해 사발만 한 크기의 구멍에서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그 위에는 금룡의 기운이 둥지를 틀고 똬리를 튼 채, 주변의 법력과 혈기를 쉬지 않고 갉아먹어 상처가 아물지 못하게 했다.
흑봉요괴는 가슴의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체내의 모든 법력을 쏟아부어 부상을 회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용의 기운에는 아직도 심협의 강력한 법력이 섞여 있어 결국은 몰아내지 못했다.
“어머니!”
고화령의 처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곧장 다가가 뒤로 축 늘어진 흑봉요괴를 부축했다.
한편, 심협의 몸에서는 한 줄기 빛이 번득이면서 방금 전 흐릿했던 그림자가 한들한들 날아올라 순식간에 천책의 허상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흐릿해진 천책은 맑게 반짝이는 빛이 되어 임랑환 속으로, 그 안의 옥침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흑봉요 상공의 검은 먹구름과 뱀 같은 번개줄기도 하나둘 사라지며 하늘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푸슉!
기묘한 소리가 울리더니, 심협의 몸 전체에 가느다란 상처 수백 개가 빽빽하게 나타나 많은 피를 뿜었고, 일순 심협의 온몸은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힘이 풀린 듯 심협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귀장이 재빨리 달려왔지만, 이미 육화명이 심협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나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를 붙잡은 듯한 느낌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하마터면 손을 놓아버릴 뻔했다.
그는 그제야 아까 심협의 몸에서 솟아났던 붉은 증기는 그의 피가 증발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런데도 심형은 정신을 유지하며 혼절하지 않다니. 이런 의지력은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육화명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육화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협의 손목에 있던 임랑환이 반짝 빛을 발하더니 하얀 도자기 병 하나가 떨어졌다.
육화명은 날렵하게 손을 뻗어 병을 잡아챘다. 이어서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심협의 입을 보고 곧 그 뜻을 깨닫고는 마개를 열고 향기가 짙은 단환을 하나 꺼내 그 입에 넣었다.
유영단이 뱃속에 들어가자 진한 약 기운이 단전에서 소화되어 심협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온몸의 상처들이 곧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고, 피가 멎으면서 새살이 돋았다. 다만 안색은 여전히 너무도 창백하여 허약해 보였다.
한참을 회복한 뒤에야 안색이 조금 호전된 그는 육화명에게 자신을 놓아달라는 손짓을 하고는 천천히 똑바로 섰다.
‘심형, 이것은……?’
육화명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전음으로 물었다.
“괜찮소. 비술을 썼으니 대가를 치른 것뿐.”
심협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역시……. 한데 전생에 그대의 경지는 나보다 훨씬 대단해 보였소. 고생을 적잖이 한 것 같긴 해도 반서(反噬)의 대가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고…….’
육화명은 이를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음으로 이야기했다.
심협이 빌려온 것이 전생의 경지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해 천 년 뒤, 꿈속 세계에서 끌어온 경지였기에 그저 슬쩍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천책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수련 경지가 꿈속 수준에 도달한 시간은 세 호흡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대가로 꿈속에서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30여 년의 수명을 소모해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수명이 부족했기에 상당한 대가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금 전 잠깐의 법력 향상으로 대개박술이 빠르게 운공된 상태에서 유영단의 도움까지 받자 부상은 거의 회복됐다는 것이다. 당장은 그저 법력이 심하게 손실된 후유증을 겪는 정도였다.
심협은 단약의 약효에 기대어 기세를 늦추지 않고 흑봉요괴와 고화령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 손으로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선회하는 용각추를 조종하며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근처까지 다가간 심협이 손바닥으로 휙 떠밀자 용각추가 즉시 날아가 고화령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고화령, 나를 기억하느냐?”
심협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화령은 손으로 흑봉요괴의 앞가슴에 난 상처를 누른 채 눈시울 붉히며 심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춘추관 스승님들과 사형제들의 원혼만은 잊지 마라.”
심협은 차갑게 웃고는 고화령의 미간을 꿰뚫으려 했다.
그때, 흑봉요괴가 돌연 외쳤다.
“멈춰! 이 아이를 죽이지 마라!”
“흥! 나는 춘추관 멸문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심협은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그 일들은…… 모두 내가 시킨 것이다. 춘추관에 잠입했던 것도…… 내가…… 강요한 것이란 말이다.”
흑봉요괴는 피를 토하며 힘겹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심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죽일 테면 죽이라지요. 소녀 오늘 어머니와 함께 황천으로 갈 것입니다.”
고화령이 심협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가만 있거라, 령아야. 이 아이는 부모가 인간족에게 죽임을 당하여 어려서부터 내가 길렀다. 내가 이 아이를 속였다. 춘추관의 사숙조가 부모를 죽인 자라고…… 그래서 춘추관에 잠입하라는 내 말을 들은 것뿐이다.”
흑봉요괴는 자애로운 눈길로 고화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화령은 그 말을 듣고도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뿐,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이를 본 심협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보아하니, 진즉 그게 거짓임을 알고 있었나보군.”
“그렇다. 춘추관에 들어가 조사를 해봤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사숙조는 폐관수련 중이었지.”
고화령은 숨기지 않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분이 네 원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심협의 살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나 고화령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분명 조직 사람이 널 몰아세웠던 거겠지?”
흑봉요괴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들은 그저 어머니의 혈독(血毒)을 억누를 수 있는 영약을 가지고 있다고만 했어요.”
고화령이 고개를 저으며 흑봉요괴에게 답했다.
“그 청혈단(靑血丹)을 그리 구한 게로구나.”
흑봉요괴는 그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심협, 어쨌거나 일은 모두 내가 벌인 것이니 죽이든 갈기갈기 찢어발기든 네 마음대로 해라. 허나…… 어머니만은 놓아다오. 어머니께서는 혈독 때문에 안 그래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굳이 네가 살업을 저질러야 하겠느냐?”
고화령이 부탁했으나, 심협의 입에서는 싸늘한 답변이 돌아왔다.
“너를 춘추관으로 보낸 것은 이 여자인데 어찌 책임이 없다 하겠는가! 그리고…… 좀 전에 말한 조직이란 무엇이냐?”
“흥! 네놈에게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고화령의 눈에 일말의 분노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