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천책의 위력
한편, 궁지로 몰아넣은 두 인간 수사에게서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 연이어 터져 나오자 흑봉요괴는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였다고, 갑자기 더욱 짙은 살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반드시 저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협과 육화명 두 사람에게 다가가면서 양손을 동시에 들었다가 내렸다. 금빛 불꽃이 양손 위에 타오르면서 금세 두 자루의 금빛 화염검이 응집되었다.
심협은 하늘을 찌를 듯한 살의에 다소 당황했다. 문득 꿈속에서의 자신이 그리워졌다. 아무리 험난해도 꿈속에서는 늘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현실에서는 일단 죽으면 정말로 끝나는 것이다.
그는 순양검배를 쥔 채 법력을 불어넣어 다시 요천화를 시전하려 했지만, 단전과 법맥의 마지막 한 가닥 법력까지도 모두 소진한 상태라 더는 법술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손으로 허리춤의 건곤대를 어루만지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귀장에게 신식을 전했다.
‘비극, 잠시 후 내가 저 요괴의 주의를 끌 테니, 기회를 틈타 육화명을 데리고 도망쳐라.’
‘주인님, 소장 비록 귀물이기는 하나 생전에 세운 충의의 맹세를 감히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능력을 알아봐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으니, 소장 전사할지언정 도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귀장의 목소리가 심협의 식해 안에 전해져왔다.
‘잘난 체 마라! 저 검은 봉황은 요물이긴 하나 그가 지닌 봉황요화(鳳凰妖火)는 실로 대단하다. 너 같은 음귀에게는 천적에 가깝겠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아직까지도 너를 부르지 않았겠느냐.’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소리를 전했다.
‘하오나…….’
귀장은 뭔가 더 이야기하려 했지만, 흑봉요괴의 공격에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양손을 교차시켜 심협 쪽을 향해 휙 휘두르자, 뜨거운 금빛 화염 두 줄기가 휙 소리와 함께 허공에 거대한 십(十) 자를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심협은 피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귀장을 소환하는 동시에 손을 흔들어 묵갑순을 불러내 푸른 광채로 감싸며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귀장은 어쩔 수 없이 기회를 틈타 육화명의 몸을 끌어안은 채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묵갑순은 10여 장을 날아갔으나, 그 위의 푸른 빛은 심협의 법력이 부족해 조금 어두워졌다. 금빛 화염은 묵갑순에 닿는 순간, 그 위에 뒤덮인 푸른 빛을 단숨에 증발시켜 버렸다.
뒤이어 묵갑순 전체가 금빛 화염에 휩싸이면서 불과 몇 호흡 만에 완전히 녹아내려 망가져 버렸다.
심협은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고, 가까스로 고꾸라지는 것은 면했다.
그의 앞에서는 금빛 화염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앞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심협의 몸은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심협 앞에 문득 눈부신 금빛이 한 줄기 빛나더니 서책의 허상이 불쑥 떠올랐다. 그 표면에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금빛 광선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게, 언뜻 봐도 범상치 않았다.
곧이어 흑봉요 위쪽 하늘에 세찬 우렛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다란 먹구름이 어디선가 몰려와 양쪽 산봉우리에 거의 들러붙을 정도로 하늘을 짓눌렀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은빛 번개가 뱀 떼처럼 어지러이 춤을 추며 골짜기를 온통 하얗게 비췄다.
한편, 먹구름 깊숙한 곳에서도 가느다란 금빛이 새어나왔는데, 마치 천계에서 내려온 선광(仙光) 같았다.
‘천책!’
심협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천책이 스스로 나타났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법력을 운행하여 천책 속으로 보냈다. 이에 천책 허상이 희미하게 번득이더니 무수한 금빛 부적 문양이 그 속에서 약동하며 책이 휘리릭 펼쳐졌다. 그리고 강력하고도 기이한 힘이 그 속에서 솟구쳐 나와 표면에 둘레가 3척쯤 되는 금빛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금빛 화염이 가까워진 순간, 금빛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강력한 흡인력(吸引力)이 전해져왔다. 이 힘은 마치 노룡(老龍)이 물을 빨아들이듯 두 줄기 금빛 화염을 홱 끌어당겨 전부 흡수해버렸다.
심협은 저도 모르게 잠깐 멈춰 섰고, 흑봉요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어렸다.
그녀의 금빛 봉황 요화는 그녀의 금빛 깃털에 담긴 타고난 요화로, 평범한 법보 따위가 쉽게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금빛 서책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 같아 보였는데, 어찌 이런 위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네 이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흑봉요괴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천책 허상이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어쩌면 천병의 신혼도 소환할 수 있을지 몰라.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저 요괴를 상대하는 건 문제도 아니겠어!’
심협은 흑봉요괴의 질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천책과 소통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가 신식을 불어넣어 봐도 천책의 허상에서는 천병들이 지닌 신혼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을 소환할 방법도 없었다.
흑봉요괴는 심협이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는 듯하자 곧장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심협이 갑자기 크게 고함을 질렀다.
“하앗!”
잔뜩 경계하고 있던 흑봉요괴는 흠칫 놀라 일순 돌진하던 기세를 죽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심협을 살폈다.
“이 간 큰 요괴야. 이 보물은 바로 현천보책(玄天寶冊)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여러 요물들만을 제압하지. 그러니 너의 요술이 나를 공격한다 해도 전혀 소용이 없거늘, 감히 분수를 모르고 달려든단 말이냐?”
심협은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성을 내며 말했는데, 그 와중에 슬쩍 단약 한 알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한편, 흑봉요괴는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심협의 허세를 한눈에 꿰뚫어본 것이 분명했다.
“그 귀물이 아까 그놈을 데리고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수작인 게냐? 허나 소용없다. 네놈이 죽기 전에 백 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죽기는 매한가지야.”
흑봉요괴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으나, 심협은 오히려 그 말에 안도하는 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안전할 테니 한시름 놓았군.”
이에 흑봉요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더 말을 섞다가는 계략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없이 곧장 돌진하며 화검(火劍)을 휘둘렀다. 불과 1장에 불과한 두 사람 사이를 가른 화검은 혀처럼 날름거리는 금빛 불길을 내뿜으며 심협의 얼굴을 찔러 들어갔다.
심협은 좀 전에 단약을 복용해 법력을 약간 회복한 터라,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양손을 휘둘러 용각추를 조종해 앞을 막았다.
이 봉황요화는 실로 대단해서 일반 법기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심협은 아직 천책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도 몰랐고 순양검배로 모험을 감행할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용각추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용각추는 금빛을 거세게 발하며 금빛 불길과 맞부딪쳤지만, 둘은 힘 차이로 인해 거듭 밀려났다.
심협은 바짝 긴장한 채 쉬지 않고 신식으로 천책을 재촉해 다시 한번 그 위력을 발휘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금빛 서책 허상은 시종일관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 쓸모없는 허깨비 같았다.
“보아하니 너도 그게 무슨 보물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쓰는 법도 모르면서 함부로 낭비하지 말거라. 하하하!”
흑봉요괴는 심협을 한껏 조롱하고는 다른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화염이 뭉쳐 만들어진 긴 밧줄이 뻗어 나와 금빛 천책 허상을 휘감았다.
한데 놀랍게도 화염 밧줄은 천책 위를 그대로 통과해버렸고, 보고 들은 것이 많은 흑봉요괴조차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봉안(鳳眼)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설마 일부러 바보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지금 심협은 온 힘을 다해 용각추를 작동하여 요화를 막아내는 중이라 천책을 조종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일단 죽이고 보자.”
흑봉요괴는 눈빛을 집중하고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뭔가를 뜯어냈고, 그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금빛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은 것이다.
그 머리카락에서는 부드러운 빛이 반짝이더니 놀랍게도 그대로 길고 가느다란 금빛 깃털이 되었다.
흑봉요괴가 한 손에 금빛 깃털을 쥐고 법력을 주입하자, 깃털에 톱니처럼 날카롭고 미미하게 넘실거리는 광흔이 맺혔고, 뜨거운 화력이 전해져왔다.
“죽어라!”
그녀는 크게 고함을 지르며 깃털을 세차게 휘둘렀다.
깃털은 환하게 빛을 번득였고, 그 위로 몸길이가 1장쯤 되는 금빛 봉황 허상이 응집돼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심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허공에 요란한 굉음이 울렸고, 물결 같은 파문이 금봉황의 몸에서 넘실대며 퍼져 나가 기이한 힘으로 변하더니, 반경 10여 장을 뒤덮었다.
심협은 뜨거운 기운이 얼굴로 훅 달려드는 것을 느끼고는 재빨리 사월보를 시전했지만, 온몸이 보이지 않는 산에 짓눌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번엔 진짜 끝인가……?’
심협은 속으로 길게 탄식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고, 둘째어머니, 아우와 누이, 백소천 그리고 섭채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스쳤으나, 마지막에 이르자 기이하게도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다섯 마혼의 환생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미 봉황의 화염이 가득 비쳐 그의 두 눈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고, 온몸이 화염에 파묻히려던 바로 그때, 그가 아무리 재촉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천책이 느닷없이 환한 금빛을 발했다.
가느다란 금빛 광선의 소용돌이가 나타나 금빛 깃털 위의 봉황 화염을 찢어발겼고, 바람이 구름을 휘감듯 말끔하게 집어삼켜 버렸다. 그 안에 휘감긴 금빛 봉황 깃털도 약간 흔들렸지만, 끝끝내 끌려 들어가진 않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심협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푹!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심협은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명치에는 주먹만 한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고, 심맥(心脈)도 이미 뚫린 것 같았다.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더니 심협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흑봉요괴는 이를 보고 손을 들어 금빛 깃털을 불러들이고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때, 절박한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심협!”
육화명이 깨어난 뒤 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귀장 조비극도 크게 외쳤다.
“주인님!”
이 광경을 보고 흑봉요괴는 크게 웃었다.
“제 발로 돌아오다니! 그것도 좋지. 다함께 사이좋게 저승으로 보내주마!”
그러나 모두의 신경은 온통 심협에게만 쏠려 있어 조금 전 흑봉요괴의 화염 밧줄이 천책 허상을 뚫고 지나간 것과 달리, 심협의 피 몇 방울이 천책 허상에 묻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