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목숨을 건 한 판
한편, 이 무렵 육화명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 한숨 돌린 뒤, 곧바로 두 손으로 검결을 맺어 흑봉요괴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차고 있던 장검에서 맑은 검명이 울리더니 환한 검광을 발하며 즉시 흑봉요괴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나 흑봉요괴는 장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만 가볍게 떨쳐내 검은색 빛의 방패를 펼쳐 막아냈다. 반면 심협을 뒤쫓던 입속의 불길은 한층 속도를 높였다.
육화명의 장검은 검은색 빛의 방패 속에 꽂히자 그가 아무리 법력을 들이부처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저 방패가 마치 단단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바위라도 되는 듯했다.
심협은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는 우뚝 멈춰 서서 두 손을 바깥쪽으로 밀며 온몸의 법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그러자 용각추에서 금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면서 송곳 전체가 배로 불어나 앞을 막고 검은 불길을 견뎌냈다.
작열하는 불길이 엄청난 고열을 내뿜어 용각추의 금빛을 빠른 속도로 소모시켰고, 송곳은 차츰차츰 불길에 밀려 되돌아왔다.
심협이 더는 막아낼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육화명은 시선을 돌려 상처를 입은 고화령을 바라보며 괴로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미안하오.”
이어서 검결을 맺은 손가락을 옆으로 구부렸다. 그러자 여전히 검은 빛의 방패와 힘겨루기를 하던 장검이 갑자기 칼끝을 돌려 옆에 있던 무방비한 상태의 고화령에게 날아갔다.
흑봉요괴는 곧 이를 알아차리고는 벌컥 성을 내며 봉염(鳳炎)의 불길을 거둬들였고, 육화명의 비검을 덥석 잡아챈 뒤 힘껏 그러쥐었다.
장검에는 육화명의 법력이 대량으로 주입되어 있었던 데다가 맹렬히 돌진하던 터라 흑봉요괴의 손바닥에는 섬뜩한 두 개의 상처가 생겨났다.
하지만 뒤이어 피가 배어나오는 흑봉요괴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금빛 불꽃이 섞인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이 불길은 순식간에 장검 전체를 시뻘겋게 달궜다.
흑봉요괴는 육화명을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쩡!
쟁쟁한 소리와 함께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던 장검이 중간에서 뚝 부러졌다.
육화명은 장검을 오랜 시간 제련하여 서로 통해 있던 터라, 검이 부러지는 순간 가슴과 복부의 수많은 혈자리가 동시에 터져나간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윽!”
그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고, 입과 눈, 코와 귀에서 한 가닥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내상이 상당했다.
흑봉요괴는 육화명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부러진 검의 파편을 끼우더니 집어던졌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면서 부러진 검의 파편이 하늘에 붉은 포물선을 그리며 육화명의 미간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때, 이미 흑봉요괴의 불길에서 벗어난 심협이 달려와 그 앞을 막아섰다.
그의 곁에서 활처럼 굽은 진홍색 호광(弧光)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양검배가 흐릿한 광흔을 남기며 장검의 파편과 거세게 부딪쳤다.
꽝!
두 줄기 붉은 빛이 동시에 흩어지면서 순양검배는 튕겨 날아갔지만, 장검 파편은 여전히 날아들었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용각추를 꺼내 막을 수밖에 없었다.
쨍!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면서 용각추가 격퇴당해 되돌아왔다. 대신 장검의 파편 또한 두 차례 충돌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쇳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심협은 순양검배를 불러들였다. 그는 더 이상 용각추를 작동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온몸의 법력이 빠르게 소모되는 바람에 머리가 조금 띵했으며, 단전은 텅 빈 느낌이었다.
‘심협, 이번에는 우리 모두 온전히 돌아가기 힘들 것 같소. 잠시 뒤 내가 비술을 쓰겠소. 비록 저 여인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테지만, 어쨌든 전세를 비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그대는 기회를 틈타 먼저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살피느라 비술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거요.’
문득 신식을 통한 육화명의 목소리가 심협의 식해에 울려 퍼졌다.
심협은 그가 평소와 달리 심형이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그 가벼운 말투와 달리 상황은 최악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형, 지금이 어느 때인데 허세를 떠는 거요? 그대가 그 비술을 쓰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내 잘 알고 있소. 지난번에 비술을 쓴 영향도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쓸 생각이라면, 이 요부가 그대를 죽일 필요도 없이 염라를 만나게 될 거요.’
심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답했다.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소? 어쨌거나 우리 둘 다 죽을 필요는 없지. 자,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이번에 비술을 쓰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 그대가 잠시 시간을 벌어주시오.’
육화명이 한숨을 쉬며 그리 말하더니 심협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털썩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하얀 옥반을 더듬어 꺼낸 뒤, 양손 가운데 둔 채 깍지를 끼고 체내의 한 가닥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옥반에 부드러운 빛이 번졌다.
심협은 지난번 육화명이 이 비술을 썼을 때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왔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은 뭔가 달랐지만, 이번이 더욱 어려울 것임은 분명했다.
그는 육화명을 뜯어말리려 했지만,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경지가 부족하여 꿈에서처럼 강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책에 빠져 있을 때, 앞에서 또다시 한 가닥 열기가 밀려왔다. 심협이 황급히 정신을 집중해 살펴보니, 파도 같은 검은 불길이 용솟음치며 밀려와 반호(半弧) 형태로 퇴로 대부분을 차단해 버린 상태였다.
심협은 쓰게 웃었다. 지금은 육화명을 대신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퇴로가 있다 하더라도 물러설 방법이 없었다.
“목숨을 거는 수밖에…….”
심협은 결단을 내리고 허리춤에서 법력을 보충해주는 단약을 하나 꺼내 털어 넣은 뒤, 그대로 깨물어 삼키고는 손을 번쩍 들어 휘둘렀다.
허공에서 자그마한 도장 하나가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위에 새겨진 낙관은 끊임없이 노란빛으로 반짝였고, 겹겹이 산악의 허상들이 나타나 하나둘씩 떨어졌다.
쾅! 쾅! 쾅!
산의 허상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큰 진동이 뒤따랐다. 허상은 땅속으로 들어가자, 마치 땅의 기운과 맞닿은 것처럼 뿌리를 내리며 대지에 담긴 흙 속성 영력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는 오악진형인을 이용해 배수의 진을 치는 삼산오악진(三山五嶽陣)으로, 본래 다른 사물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데 쓰는 진으로, 응혼기 이하의 요마들을 제압하는 데 효과가 뛰어나다. 일단 시전하면 진정으로 대지와 연결되는데, 그 상태로 수백 년간 끊임없이 천지의 원기를 흡수하고 해와 달의 정수를 받아들이면, 정말로 산의 뿌리가 자라나 차츰 실체로 변해간다. 그러니 다시는 거둬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위급한 상황인지라 아까워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섯 산봉우리가 잇따라 땅에 떨어지자 산봉우리 허상이 서로 교차하면서 온 흑봉요 골짜기를 가로질러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막아섰다.
심협은 아직 반투명한 상태인 산봉우리들의 허상 너머로 흑봉요괴가 한 걸음 앞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손을 들어 머리 위를 문지르자 손바닥 전체에 금빛 불꽃이 맺혔다.
곧이어 그녀는 팔을 높이 쳐들고 칼을 휘두르듯 크게 내리 그었다.
그녀의 팔뚝 위로 금색 불꽃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가 백여 장에 달하는 금빛을 내뿜었고, 이 금빛은 거대한 칼날로 응집되어 오악의 허상을 거세게 베었다.
쿵!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오악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빛과 그림자가 흔들리며 마치 두부처럼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중악(*中嶽: 오악 중 하나인 숭산의 다른 이름) 산봉우리 아래 자리 잡고 있던 오악진형인에는 지난 교전에서 생긴 균열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이 균열이 순간 산 문양을 따라 뻗어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 버렸다.
진형인이 완전히 부서지자 산악 허상도 따라서 완전히 사라졌고, 온 하늘에 가득한 불길도 거침없이 치솟았다.
심협은 애간장이 타들어갔지만, 그가 지닌 물의 법술로는 이 금빛 화염을 끌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센 화염을 보며, 그는 초조한 마음에 어쩔 도리 없이 손을 휘둘러 순양검배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배의 자루를 잡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때, 꿈속 금탑에서 검을 든 천병과 맞붙었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의 동시에 그 천병의 검초(*劍招: 검술 초식), 요천화(撩天火)가 아른거렸다.
“어디 한번 해보자!”
심협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순양검배를 보검 쥐듯이 꽉 움켜쥔 채, 돌연 비스듬히 올려 베었다. 지금껏 실전에서는커녕 연습으로도 사용해본 적 없는 초식이었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심협은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갑자기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검명이 울려 퍼지면서 눈부신 붉은 검광이 순양검배에서 번쩍였다. 검광은 허공에서 빠른 속도로 폭증하는 반달 모양 검호(劍弧)가 되어 불바다 속으로 날아들었다.
휘융!
광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맹렬히 돌진하던 거센 불바다의 기세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달 형태의 검호가 불바다 사이를 질풍처럼 가르고 지나가자 끝내 높은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바다 사이로 너비가 10장이나 되는 구멍이 생겨났다.
그곳의 불길은 검호에 베이면서 꺼졌고, 까맣게 탄 바닥에는 깊이가 불일정한 시커먼 골짜기가 10장이 넘게 이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흑봉요괴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고, 눈에는 놀란 기색이 절로 스쳐 지났다.
“저자가…… 저자가 정말 심협이 맞단 말인가?”
뒤에서 지켜보던 고화령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춘추관에서 뭇사람의 놀림과 비웃음을 사던 기명제자가 이 정도까지 성장하다니…….
사실 심협 자신도 이 일검(一劍)의 위력이 이토록 강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터라,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육화명의 비술이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보려고 서둘러 돌아보았다.
그가 막 돌아서는 순간, 육화명이 손에 들린 원반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몇 번 깜박이더니, 뙤약볕에 가까운 눈부신 빛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모두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사람 모양의 허상이 떠올라 차츰 아래로 내려앉아 육화명의 몸과 곧 합쳐지려 했다.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됐어!’
심협이 속으로 기뻐하며 앞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상황이 다시 급변했다.
그 사람 형체가 육화명과 포개지는 순간, 그의 단전에서 어지러운 법력 파동이 일어나 식해 속으로 곧장 돌진했다.
두 눈을 꾹 감았던 육화명은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번쩍 뜨더니 붉은 피를 뿜어냈다.
“육형!”
심협은 다급히 다가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육화명을 부축했다. 그 무렵, 육화명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