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96화 (396/1,214)
  • 396화. 매복공격

    금하산에서 남쪽으로 300여 리 떨어진 곳. 굽이굽이 길게 이어진 운령(雲嶺)산맥이었다. 산세는 마치 용의 등줄기처럼 굽이쳤고, 곳곳에 골짜기가 연이어 나타났으며, 산간 평지와 골짜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흑봉요는 바로 이 가운데 있었다.

    흑봉요는 금룡욕(金龍峪)과 맞닿아 있었는데, 둘 사이에는 우뚝 솟은 산마루 하나가 가로막고 있어, 예로부터 용과 봉황이 화목하게 우짖는다는 좋은 뜻을 지닌 것과 달리 서로의 풍경은 어우러지지 않았다.

    금룡욕은 남쪽 양지바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푸른 나무가 무성했으며, 날짐승이 날아와 깃들고 신령한 짐승들이 뛰노는 것이 늘 생기가 넘쳤다. 반면 이웃한 흑봉요는 북쪽을 향해 있어 그늘이 졌고, 산간 평지에는 1년 내내 안개가 자욱했으며, 골짜기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자주 일어 사람이나 짐승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각기 청포(靑袍)와 백삼(白衫)을 입은 두 청년이 흑봉요 입구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1년 내내 흩어지지 않는 평지의 안개를 무거운 표정으로 살피고 있었다.

    “심형, 흑봉요괴가 출규 중기의 실력을 지녔다면, 그대와 나의 경지로는 정면으로 맞서서 이기기 힘들 터이니 역시 머리를 쓰는 게 상책일 듯싶소.”

    백삼 차림에 장검을 찬 청년, 육화명의 말에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청호의 청년,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머리를 쓴다는 게…… 무슨 뜻이오?”

    “내게 원 국사께서 주신 진귀부가 하나 있는데, 정수리 백회혈 자리에 내리꽂으면 잠시 동안 원신을 봉인하여 통제를 잃게 할 수 있소. 그리 되면 손쉽게 금봉우를 빼앗아 올 수 있을 거요.”

    육화명의 설명에 심협이 싱긋 웃었다.

    “그렇소? 출규 중기 요괴의 백회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적을 붙이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지 않소?”

    “그야 뭐……. 어쨌거나 그 귀신을 물리치는 것보다야 쉽지 않겠소?”

    육화명이 어쩔 도리 있냐는 듯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긴 하지. 그럼 그리 합시다. 골짜기에 들어가면 내 어떻게든 흑봉요괴를 붙잡아 둘 테니, 부적을 붙이는 건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심협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동의하자 육화명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산간 안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골짜기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 안의 자욱한 안개가 두 사람이 몰고 들어온 바람에 밀려 요동치기 시작했고, 양쪽 절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빛이 반짝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평지 깊숙한 곳에는 그리 넓지 않지만 옥처럼 푸른 작은 호수 하나가 있었다. 호숫가에는 푸른 풀이 무성했고, 그 사이로 높이가 수십 장에 달하는 거대하고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었다. 그 위로 빽빽하게 우거진 가지에는 청옥처럼 푸르고 생기 넘치는 나뭇잎이 가득했다.

    그 오동나무의 가장 큰 가지에는 거대한 몸집의 봉황신조 한 마리가 누워 있었는데, 그 머리 위에 선명한 금빛 깃털 세 가닥이 자란 것을 빼면 온몸의 깃털은 까마귀처럼 검었다. 이 세 가닥 깃털의 긴 꼬리부분은 나무줄기에서 땅까지 드리웠고, 그 위의 은은한 광택이 주변 경물들과 어우러져 눈길을 끌었다.

    흑봉신조는 머리를 나뭇가지에 기댄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마치 나른해하는 사람 같았다.

    그때 나무줄기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감히 가지에 내려앉지는 못하고 허공에 뜬 채 떨어지지 않으려 부단히 날갯짓을 해댔다. 기이하게도 이 까마귀의 두 눈은 엷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뒤, 흑봉신조가 두 눈을 뜨고 까마귀에게 눈을 슬쩍 흘겼다. 그 눈빛에는 일말의 살기가 스쳐 지났다.

    까마귀는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균형을 잃고 아래로 곤두박질 칠 뻔했다.

    하지만 이내 흑봉신조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까마귀는 그제야 죄를 사면받기라도 한 것처럼 안도하며 날아갔다.

    흑봉신조는 멀리 평지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몸에는 시커먼 빛이 번뜩였고, 온몸의 깃털이 빠르게 움츠러들면서 눈부신 빛 속에서 차츰 신조의 자태를 벗었다.

    곧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매혹적인 몸태를 지닌 검은 치마의 여인이 나타났다. 살짝 야위어 보이는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더할 수 없이 정교했지만, 표정이 더없이 차가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주었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겼나요?”

    가장 큰 가지에 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검은 치마의 여인으로 변한 흑봉요괴가 고개를 숙여 보니, 나무 아래에 자줏빛 긴 치마를 입은 자색 머리칼의 어린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가냘프고 아리따운 몸매에 등 뒤에는 뼈로 이루어진 듯한 날개 한 쌍이 달려 있었다.

    만약 심협이 이 여인을 보았더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고화령이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란다. 도아(渡鴉)가 소식을 전해 왔는데, 천지 분간 못 하는 쥐새끼 두 마리가 골짜기로 몰래 기어들어왔다는구나.”

    흑봉요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건성으로 말했다.

    “흥! 분수를 모르는 작자들이로군요. 어머니께서 아무런 폐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감히 찾아와 괴롭히다니, 제가 가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줄게요!”

    고화령은 눈에 노기를 띠며 씩씩댔다.

    “넌 이제 막 출관(出關)했으니 작은 일로 근심하지 말거라. 벌써 현치(玄雉)를 보냈단다.”

    흑봉요괴는 따스한 눈길로 고화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이곳에 자리 잡으신 지 오래라 일찍이 명성이 알려졌으니, 평범한 사람은 분명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대담하게도 고작 두 놈이 찾아온 걸 보면 필시 뭔가 준비해왔겠지요. 현치 혼자서는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 제가 가서 돕는 게 좋을 거예요. 때마침 오랜 폐관의 성과도 확인인해보고 말이지요. 어떠세요?”

    고화령이 조르듯 말하자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흑봉요괴도 고개를 끄였다.

    “좋다. 그럼 가보거라. 단, 명심해라. 결코 무리해서는 안 된다.”

    “알아서 적당히 할 터이니 어머니께서는 마음 놓으셔요. 호호호!”

    고화령은 간드러지게 웃고는 즉시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갔다.

    이를 본 흑봉요괴도 엷은 미소를 띠었는데,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어쨌거나 이곳 흑봉요는 자신의 근거지인 만큼 모든 것이 통제 아래 있으니 설령 뜻밖의 일이 좀 일어난다 해도 큰일은 없을 터였다.

    한편, 심협과 육화명은 골짜기 안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주위의 나무들과 절벽 위의 까마귀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까마귀들은 마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 같소.”

    심협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남의 영역이고 우리는 객에 불과하니 주인에게 들키지 않을 도리가 어디 있겠소?”

    육화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렇긴 하오만, 자칫 잘못…….”

    심협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고 결인해 한쪽 옆의 산벽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몇 줄기의 물화살이 응결되어 순식간에 짙은 안개들을 가르고 산벽 아래쪽 관목 덤불로 날아들었다.

    콰쾅!

    짧은 폭발음이 들리더니 검은 빛줄기가 관목 덤불에서 나타나 세 줄기 물화살을 흩어버렸다. 동시에 그 안에서 인영이 하나 튀어나와 심협과 육화명에게로 달려들었다.

    자세히 보니 간편한 검은색 옷차림의 사내였다.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손에는 새카만 단검 두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매우 날렵해 발끝으로 땅바닥을 찍고 마치 저공비행을 하는 것처럼 돌진해왔다.

    코앞까지 달려들었을 때, 사내가 양손을 교차했다. 그러자 두 자루 검은 단검이 서로를 긁으며 날카롭고 쟁쟁한 소리를 냈고, 곧이어 반달 모양의 검은 광인(光刃) 두 줄기가 튀어나와 각각 심협과 육화명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은 사월보를 시전하여 발아래에 달빛이 흩뿌려질 무렵 이미 피해 있었다.

    육화명은 등 뒤의 장검을 뽑아 광인들을 그대로 막아냈다.

    채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새카만 빛은 육화명의 장검에 잘려나갔지만, 둘로 갈라져 허공에서 방향을 틀더니 서로 엇갈리며 다시 육화명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육화명은 흠칫하더니 재빨리 몸을 낮춰 피하려 했다.

    그 순간, 마치 이를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사내가 몸을 낮추며 쫓아와 단검들을 가위처럼 교차하여 육화명의 목덜미를 찔러들었다.

    육화명은 순간 피할 공간이 없어 곧 머리가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한 줄기 검광이 스치듯 날아와 육화명의 목에 바싹 다가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엇갈린 검은 단검 사이를 통과한 뒤, 뒤에 있던 사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사내는 순간 망설였으나, 육화명의 목을 벨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기이한 자세로 몸을 뒤로 꺾어 순양검배를 피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숨 돌린 육화명이 장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사내는 쌍검을 엇갈려 막았지만, 육화명의 검과 맞부딪히자 붕 떠서 날아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신식을 퍼뜨렸지만, 상대의 기운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심협은 즉시 순양검배를 불러들인 뒤, 육화명과 등을 맞대고 서서 주위를 경계하며 살폈다.

    “이놈의 경지는 기껏해야 응혼 후기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오. 다만 그 신법(身法)과 법기가 기이하고, 이 안개에 몸을 숨길 수도 있으니 방심할 수 없소.”

    육화명이 입을 열었다.

    심협도 동의하고는 말없이 손목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오색 깃털 부채가 생겨났다.

    그때, 저 앞의 안개에서 작은 기척이 들려오더니 짙은 안개가 요동쳤다.

    심협은 움츠러든 눈으로 오화선을 틀어 그쪽으로 휘둘렀다.

    휘리릭!

    한 차례 바람이 크게 일더니, 오화선에 붉은 빛이 반짝이며 작열하는 화염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안개에 폭이 3척쯤 되는 구멍이 뚫리면서 굉음이 울렸다.

    ‘맞았다!’

    심협은 재빨리 쫓아갔고, 육화명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등을 맞댄 채 서로의 뒤를 지켰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바닥에는 온몸이 새카맣게 탄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려는 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까마귀가 갑자기 홰를 치며 날아올라 날카로운 부리로 심협의 눈을 쪼으려 들었다.

    까마귀가 심협의 얼굴로 날아드는 찰나, 한 줄기 검광이 번쩍 스쳐 지나면서 까마귀를 단숨에 동강내버렸다.

    한데 까마귀 시체가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또다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막 물러나려는데, 반대편에서도 또 날갯짓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뒤이어 사방에서 날갯짓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줄줄이 검은 그림자들이 짙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며 심협과 육화명에게 달려들었다.

    심협은 눈빛을 집중하고 손목을 수차례 흔들자 오화선에서 빛살이 끊임없이 번쩍이며 불덩어리가 사방으로 날아가 까마귀들을 하나하나 떨어뜨렸다.

    한데 이 까마귀들은 분명 이미 숨통이 끊어졌음에도 땅에 떨어졌다가 다시 날아들어 교묘한 각도에서 날카로운 부리로 그들에게 최후의 공격을 퍼부었다.

    까마귀 떼의 공격이 갈수록 촘촘해지자 오화선만으로는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육화명도 검결을 맺어 사방으로 검광을 날리면서 끝없이 밀려드는 이 공격을 한순간에 막아냈다.

    “이 성가신 놈들, 어째 다 죽이진 못할 것 같구려.”

    육화명이 답답한 듯 혀를 찼다.

    “이대로는 우리의 법력이 먼저 떨어지고 말 거요.”

    심협 또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대꾸했다.

    이어서 그의 체내 법력이 빠른 속도로 솟구치더니 오화선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그 위에 달린 요금(妖禽)의 깃털들이 제각기 빛을 발하며 미친 듯이 이글거리는 힘을 뿜어냈다.

    “공격!”

    심협이 낮게 외치며 하늘로 내던지자 오화선은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뒤이어 심협이 한 손으로 결인하여 가리키자 허공에 뜬 채 움직이지 않던 깃털부채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빛이 번쩍였다. 덩이덩이 화염 공들이 마치 배꽃 위에 폭우처럼 쏟아져 내려 순식간에 까마귀들을 덮쳤다.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모든 까마귀는 몸에 불길이 솟구치며 하나둘 땅으로 떨어져 잿더미로 변했다.

    “심형,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서 왜 진작 쓰지 않은 거요?”

    육화명은 상황이 정리되자 기뻐하면서도 투덜거리자 심협은 그에게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가 막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