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95화 (395/1,214)
  • 395화. 마기에 물들다

    “강류, 그만 되었다!”

    해석선사는 그렇게 일갈하더니 손을 가볍게 한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어두운 금색 빛줄기가 번개처럼 쏘아져 나왔다. 이 빛은 금빛 지팡이로, 자금색 발우와 맞부딪치며 쨍하고 굉음을 발했고, 근처 허공에는 어지러운 파문이 일어났다.

    금색 지팡이 역시 법보인지, 놀랍게도 자금색 발우를 막아냈다.

    자금색 발우 안에서는 빛이 번득이더니, 그 안에서 놀랍게도 강류가 불쑥 솟아나와 땅에 내려섰다.

    “해석 사백(師伯), 저는 줄곧 사백을 주지로 공경했습니다. 한데 지금껏 아무 간섭하지 않으셨으면서 오늘은 왜 이 두 외부인을 위해 저를 막으시는 겁니까?”

    강류가 불만스러운 듯 외쳤다.

    “이 두 분께서 그 일을 알게 되더라도 네게 그리 해로울 게 없을 터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비밀에 부칠 필요가 있겠느냐?”

    해석선사는 손을 흔들어 어두운 금색 지팡이를 불러들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강류가 세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심협은 여기까지 듣고는 마침내 어찌 된 일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강류는 예전에 요마가 침입하면서 몸에 어떤 비밀이 생겼고, 그로 인해 장안에 가기를 꺼리는 것이리라. 게다가 강류는 이 일이 외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 온갖 방법을 짜내 자신과 육화명을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강류대사님. 저는 대사님께서 도대체 왜 장안에 가지 않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장안성의 수많은 원혼들은 천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사님과 제가 내기를 하는 겁니다. 만약 제가 지면 육형과 즉시 이곳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허나 만약 제가 이긴다면, 강류대사께서 장안에 가기 싫은 이유를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심협은 잠시 머리를 굴린 뒤 입을 열었다.

    “내기? 좋소! 어떤 내기요?”

    강류는 뜻밖에도 내기라는 말에 큰 흥미를 보였다.

    “강류대사님의 경지는 깊고 심오한데다, 손에는 자금발우 법보를 쥐고 계시니 방어력이 분명 놀라울 테지요. 대사께서 제자리에서 저의 공격을 세 차례 받아내시는 겁니다. 만약 제가 대사님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한다면 제가 이긴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진 것으로 치지요.”

    “좋소.”

    강류대사는 내기의 규칙을 듣고 전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자금발우는 그의 머리 위에 떠다니며 자금색 빛 한 줄기를 뿌려 그의 몸을 뒤덮었다.

    “됐소. 오시오.”

    강류대사는 별다른 방어수단을 꺼내지 않고, 자신만만한 듯 손짓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심협은 눈에 맑은 빛을 반짝이며 한 손을 결인해 끌어당겼다. 그러자 몸 앞에 불은 빛이 한 줄기 스쳐 지나면서 순양검배가 나타났다.

    ‘심형, 자신 있소?’

    육화명은 잠깐 주저하더니 신식을 전해 물었다.

    ‘마음 놓으시오.’

    심협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두 손을 빠르게 결인했다. 그러자 가닥가닥 푸른 법결이 폭우처럼 순양검배로 녹아들어갔다. 다음 순간, 순양검배에서 붉은 빛이 강하게 피어오르고 그 위로 붉은 연꽃 같은 화염이 무리지어 솟구쳐 나오면서 금세 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잠시 후, 사람 키에 이르는 홍련업화 한 송이가 검배 주위에 떠올라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지만 홍련업화는 열기를 전혀 발산하지 않아 퍽 기이해 보였다.

    “뭐야! 홍련업화잖아!”

    강류가 갑자기 안색이 변해 외쳤다.

    해석선사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고, 주위의 다른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심협은 순양검배를 움직이며 그 안에 담긴 홍련업화를 최대한 동원해 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멈추시오! 이번 내기는 내가 진 셈 칩시다!”

    강류가 돌연 손을 들며 말했다. 홍련업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두려움이 엿보였다.

    이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던 심협도 뜻밖에 강류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자 약간 당황했다.

    어쨌든 강류가 패배를 인정한 것은 좋은 일이었고, 그도 금산사와 의를 상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재빨리 순양검배와 그 안에 담긴 홍련업화를 거두어들였다.

    “잘했소!”

    육화명이 다가와 신이 난 듯 낄낄대며 심협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들 물러가거라.”

    강류는 결인하여 자금색 발우를 거둬들이고는 주위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승려들은 몸을 숙여 예를 갖추고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방금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기 그대들의 법기가 있으니 거둬 가시지요.”

    심협이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가볍게 떨치자 좀 전에 그가 거둬들인 법기들이 나타났다.

    승려들은 각자 자기 법기를 챙긴 뒤, 심협에게도 예를 갖추며 불호를 읊조리고는 물러갔다.

    이 무렵 당석 장로도 돌아왔는데, 심협은 방금 전 인정을 베풀어 그의 복마금신(伏魔金身)만 깨뜨렸을 뿐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당석 장로 역시 자신의 푸른 계도를 불러들이고는 심협을 잠시 들여다본 뒤 발길을 돌렸다.

    곧 그곳에는 심협과 육화명, 강류 그리고 해석선사 네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해석선사는 몸을 일으켜 근처의 승사(*僧舍: 승려들이 머무는 집)로 들어갔다.

    “어차피 다 알려주려던 참이었을 테니 사백께서 마저 말씀하시지요.”

    강류는 방에 들어온 뒤, 침상에 털썩 앉아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 노승이 계속 이야기 하마.”

    해석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 요마는 우리 금산사에 침입해 금선자의 환생을 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강류가 나서서 그를 물리쳤습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강류의 몸 또한 마기에 물들었지요.”

    해석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을 때, 육화명은 화들짝 놀랐다.

    “마기에 물들었다고요?”

    강류를 돌아보는 심협도 무척 놀랐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의심도 깃들어 있었다.

    “왜? 못 믿으시겠소?”

    강류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만 앞섶을 풀어헤치고 맨가슴을 드러냈다. 뽀얀 가슴 한가운데에는 대야만 한 검은 반점이 하나 있었는데, 먹처럼 새카만 것이 마치 검은 먹구름이 뿌리를 내린 것만 같았다.

    검은 반점 가장자리 부분에는 금빛 문양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무수히 많은 자그마한 금빛 부적 문양이 검은 반점을 봉인해둔 것만 같았다.

    검은 반점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따금 꿈틀거리면서 주위의 금빛 봉인에 충격을 가했고, 금빛 봉인과 충돌한 곳에는 자그마한 만(卍)자 부적 문양이 번득였다. 검은 반점은 그때마다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심협이 신식으로 검은 반점을 훑어보니, 확실히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마기가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마기들을 없앨 수 있습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헛소리! 그리 쉽게 없앨 수 있었으면 내가 이리 고뇌하겠소?”

    강류는 퉁명스레 말하며 옷을 고쳐 입었다.

    “이 마기들은 발등에 붙은 구더기처럼 강류의 몸속에 깃들어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금산사의 불력(佛力)을 빌려 잠시 억눌러 놓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강류는 오랜 시간 금산사를 떠나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떠나야 할 때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요.”

    해석선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과 육화명은 이제야 강류가 장안성에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알고는 침음했다.

    “강류의 몸에 마기가 물든 것은 비밀스런 일이라 금산사 전체에서도 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두 분께서는 밖으로 퍼뜨리지 말아주십시오. 자칫하면 강류가 위험해집니다.”

    해석선사가 심협과 육화명에게 당부했다.

    “물론이지요. 마음 놓으십시오. 절대 밖으로 소문내지 않을 것입니다.”

    심협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산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 마기를 억누를 방법은 없습니까?”

    육화명은 달갑지 않은 마음에 꼬치꼬치 캐물었다.

    “우리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해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이 괴이한 마기에는 효과가 미미했지요.”

    해석선사는 또다시 깊이 탄식했다.

    심협은 인상을 찌푸렸다. 장안의 희생된 백성들을 천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강류에게 생사를 제쳐놓고 장안으로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 국사와 정 국공이라면 이 마기를 억누를 방법을 아실지도 몰라. 허나 해석선사와 강류는 바깥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눈치인데…….’

    심협은 머리를 굴려봤지만,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내 최근 경내에 있는 금선자가 남긴 고서들을 연구해보니, 그 안에 마기를 다스리는 데 효과적인 법기 하나가 기록되어 있더군.”

    “오, 무슨 법기이냐?”

    해석선사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혼원산(混元傘)이라는 법기로, 서천 영산에 전해 내려오는 보물입니다. 사악한 마귀를 제압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력을 지녔지요. 다만 그 법기는 만들기가 까다롭고 필요한 재료들도 진귀합니다. 사실 진즉부터 만들어보려 했는데, 아직 주재료 하나가 부족하여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강류의 말에 육화명이 대뜸 끼어들었다.

    “저희 두 사람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 재료가 무엇입니까?”

    심협도 덧붙여 묻자 강류는 잠시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금봉우(金鳳羽)라는 영재요.”

    “금봉우?”

    육화명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심지어 영재에 관한 수많은 고서들을 읽어보았고, 꿈속에서도 여러 곳을 다녀본 덕에 대당 수선계에는 있지도 못한 많은 재료와 보물을 알고 있는 심협으로서도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금봉우는 통틀어 가리키는 말일 뿐이고, 봉황의 핏줄을 품은 영금(*靈禽: 신령한 날짐승)의 깃털이면 다 괜찮소.”

    강류가 말했다.

    “봉황의 핏줄!”

    육화명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심협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봉황은 선금(仙禽)이라 용족보다 훨씬 드물고, 수선계에는 수백 년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봉황의 핏줄을 품은 영금 또한 매우 보기 드물어 찾기가 무척 힘들다. 하물며 수륙대회까지 불과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찾아 나설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영금을 찾을 단서는 내 이미 찾아 놓았소. 금산사 300리 밖에 흑봉요(黑鳳坳)라는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봉황의 혈맥을 품은 흑봉요괴가 한 마리 있소. 그의 머리 위에는 금빛 영우(靈羽) 세 가닥이 있는데, 혼원산을 만들기에 딱 적당하지. 다만 그 요괴는 출규 중기의 경지에 고강하여, 지금껏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소.”

    강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두 사람이 강류대사님 대신 금봉우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리하면 대사께서는 저희와 함께 장안으로 가주시겠습니까?”

    육화명은 잠시 망설이더니 심협을 한 번 보고는 강류에게 제안했다.

    “물론이오. 그대들이 금봉우를 가지고 돌아온다면 혼원산을 만들어 몸속 마기를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강류가 시원스레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약조한 겁니다.”

    육화명이 희색을 드러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때, 심협이 불쑥 물었다.

    “대사님, 수륙대회까지는 닷새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금봉우를 구해 돌아온다 해도 때가 늦지 않겠습니까?”

    “혼원산은 이미 거의 다 만들었소. 금봉우만 끼워 넣으면 되지.”

    “좋습니다. 그럼 당장 출발하여 하루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심협도 걱정을 덜고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약조했다.

    그와 육화명은 곧 강류와 해석선사에게 인사를 하고 이내 금산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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