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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93화 (393/1,214)
  • 393화. 자유방임

    육화명도 신식으로 한 차례 훑은 뒤 안심하며 따라 들어왔다.

    “두 시주께서는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해석선사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사께서 초대하셨는데 제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심협이 예를 갖추었다.

    “오, 노승이 언제 시주를 초대했던가요?”

    해석선사는 표정이 살짝 흔들리며 말했다.

    “낮에 제가 선사님께 인연이 언제 오느냐고 여쭈었을 때, 선사님께서는 기침을 세 번 하시고는 뒷짐을 지셨습니다. 이는 삼경에 뒷문으로 찾아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심협이 말했다.

    “시주께서는 과연 혜근(*慧根: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혜의 힘)을 지니신 분입니다.”

    해석선사는 심협을 잠시 쳐다보더니 늙은 나무껍질처럼 바싹 마른 얼굴에 한 가닥 미소를 지었다.

    “혜근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주지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야심한 시각에 찾아왔습니다. 강류대사께서는 장안의 수륙대회를 주관하는 것을 이상하리만치 거부하시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심협은 예를 갖추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석선사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일은 수많은 장안 백성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입니다.”

    육화명은 해석선사가 침묵하자 애타는 마음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미타불. 밤은 기니, 두 시주께서 당장 중한 일이 없으시다면 우선 금산사의 옛이야기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해석선사가 한숨을 쉬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귀담아 들어야지요.”

    심협은 해석선사의 물처럼 평온하고 고요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옆의 걸상에 앉았다.

    육화명은 초조하여 옛일 따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심협이 이리 나오자 어쩔 수 없이 옆에 앉았다.

    해석선사는 옛일을 추억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 금산사는 전대 왕조에 세워졌습니다. 원래는 제법 번성하였으나, 세상사 변화무쌍하여 본조의 태조께서 영토를 넓히시면서 온 신주의 대지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지요. 금산사 역시 영향을 받아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습니다.

    가까스로 중건하긴 했지만 이미 쇠락하여 예전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어 조사(祖師)께서 공법에 대한 고서를 몇 권 남기신 까닭에 외적에게 약탈을 당하기도 했지요. 승려들은 대부분 도망쳤고, 오갈 데 없는 노승 몇 명이 남아 겨우 목숨을 연명해나가다가 백여 년 전에야 반전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백여 년 전, 경지가 심오한 행각승(行脚僧) 한 분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날 저녁 절에 갑자기 휘황찬란한 금빛 광채가 나타나 한밤중이 되어서야 흩어졌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경내의 노승들에게 금산사에 불연(*佛緣: 중생이 불교나 부처와 맺은 연)이 깃들었으니, 앞으로 경천동지할 만큼 덕이 높은 고승이 나올 것이라 하시며 이곳에 머물기로 하셨습니다. 노승들은 환영했고, 그 스님께서는 그길로 우리 금산사 항렬에 들어와 호를 법명(法明)으로 고치셨습니다.”

    “법명 장로!”

    해석선사의 말에 심협의 눈빛이 흔들렸다. 육화명에게서 들은 바 있는 이름이었는데, 그 내력을 듣게 된 것이다.

    “원래 계시던 노 방장(*方丈: 주지나 고승을 이르는 말)께서는 주지 자리를 그분께 양보하셨습니다. 이후 법명조사께서는 동문을 대대적으로 도우셨고, 자신이 수련한 불법을 전해주어 이곳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지요. 절 위아래로 그분을 우러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그 어르신은 인연이 없다 하여 제자를 받지 않으셔서 경내의 사람들은 퍽 실망하였습니다.

    한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조사께서는 산 밑에서 금(*琴: 현악기의 총칭)을 타시다가 문득 갓난아기 우는 소리를 들으셨는데, 나무 대야가 산 아래 강에서 떠내려 오더랍니다. 조사께서 그 대야를 기슭으로 끌어올려 보니 그 안에는 갓난아이 하나와 혈서가 놓여 있었고요. 혈서에는 그 아이의 사연이 적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유주(柳州) 장원 진광예(陳光蕊)의 유복자였습니다. 하여 아이의 아명을 강류라 지어주고 정성스레 길러 제자로 거두신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였겠군요.”

    해석선사의 말에 이제 초조함을 어느 정도 걷어낸 육화명이 끼어들었다.

    심협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법사의 이름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대부분은 그가 서역에서 불경을 구해온 일만 알고 있을 뿐, 그 내력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해석선사는 육화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법명 장로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듯이, 현장법사는 훗날 장안에 들어가 태종 황제 폐하께 어제(御弟: 황제의 아우)로 봉해졌다가, 그 뒤 위험을 무릅쓰고 서천으로 가서 일흔두 가지 고난을 겪고 진경을 가져오셨지요. 우리 금산사의 명성은 그제야 세상에 전해졌고, 오늘날의 명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석선사님,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을 좀 끊겠습니다. 현장법사께서 서천에 불경을 가지러 가셨던 시간대로 따져본다면, 선사께서는 그분을 만나 뵌 적이 있겠군요?”

    심협이 갑자기 끼어들어 물었다.

    “제가 절에 들어오던 때에 현장법사께서는 이미 불경을 구하러 서천으로 떠나셨습니다. 그 뒤 금산사로 돌아오셨을 때 잠시 만나 뵌 인연이 있지요. 현장법사께서는 경내 스님들에게 서쪽 영산에 다녀온 경험을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세간에 전해 내려오는 서천취경 이야기는 바로 이곳 금산사에서부터 퍼져 나간 것입니다.”

    해석선사는 심협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현장법사께서 당시 불경을 구해온 경험담을 말씀하실 때, 혹시 손목에 매화 표식이 있는 여인과 서역의 승려를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까?”

    심협은 곧바로 다시 물었다.

    “손목에 매화 표식을 지닌 여인이요? 현장법사께서는 불문에 계신 분이라 여인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서역에는 불국(佛國)이 숱하게 많아 가는 길에 만난 스님들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시주께서는 어떤 스님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해석선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육화명 역시 뜻밖의 질문에 호기심이 생겨 심협을 힐끗 보았다.

    “그들은 분명 몸에 마기를 지녔을 테니, 현장법사께서 불경을 구하시는 과정에서 골칫거리였을 겁니다.”

    심협의 대꾸에 해석선사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몸에 마기가 물든 승려라……. 그런 얘기는 현장법사께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심협은 실망한 기색으로 혀를 찼고,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러 갈 때 환생한 다섯 마혼과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흠…… 마기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현장법사께서 하신 말씀 중, 당시 서역의 오계국(烏鷄國)을 지날 때 그분의 큰 제자가 아주 강한 마기를 느꼈다고 하셨지요.”

    해석선사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움찔거리며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씀하셨습니까? 그 뒤에는 어찌 됐고요?”

    심협은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 듯하여 재빨리 물었다.

    “현장법사께서 그 일을 자세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요괴가 수없이 많았지만, 마기는 거의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강력한 마기에 조금 불안하셨는지, 앞으로 요마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신 정도지요.”

    해석선사의 말에 심협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석선사님,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해 현장법사께서는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신 뒤 곧 행방이 묘연해지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혹시 아십니까? 세상 사람은 그분이 이미 환생했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습니까?”

    육화명도 궁금한 듯 물었다.

    “그건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현장법사께서는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시어 폐하께 보고를 드린 뒤, 곧 금산사로 돌아오셔서 조용히 수행하셨습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라지셨지요. 본 사찰의 승려들도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분이 벌써 환생하셨다는 이야기가 퍼진 걸까요?”

    육화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장법사께서 사라지시고 얼마 뒤에 노승이 주지 자리를 이어 받았는데, 노승은 고선을 수련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을 중히 여긴답니다. 하여 자주 인적이 드문 곳에 가만히 앉아 수행을 하지요. 한번은 산 아래 강가에서 조용히 수행을 하는데 나무 대야 하나가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 오더군요. 그 대야에는 뜻밖에도 강보에 싸인 두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해석선사의 계속된 말에 육화명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기 둘이 또 떠내려 왔단 말입니까?”

    “그 두 아이가 바로 강류와 선아입니다. 그때 강류의 몸에는 염주가 한 꿰미 걸려 있었는데, 저는 현장법사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기에 그 염주가 바로 그분의 염주임을 알아보았지요. 경내 사람들 모두 그가 금선자의 환생이라 여겨 그에게 금선자의 전생시절 속명(俗名)인 강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제야 육화명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된 것이군요. 금선자의 환생이라는 설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로군요.”

    한편, 그때까지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던 심협은 강류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듯 물었다.

    “그 뒤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강류는 조금 나이가 들자 불리를 깊이 깨달아 법회에서 불경을 막힘없이 강론했습니다. 허나 경내의 변경(*辯經: 불교의 교리에 대한 토론)에는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고, 금선자에 대한 일이라면 잘 알지만 행동이나 작태는 전혀 금선대사님 같지 않아 오만하고 포악했지요. 또한 사치와 향락을 즐겨 경내의 휘황찬란한 건물들은 대부분 그가 고치게 한 것입니다.”

    해석선사는 길게 탄식했다.

    “선사께서는 금산사의 주지이신데 어찌하여 강류가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두신 겁니까? 보아하니 경내에 적잖은 승려들이 강류를 따라 하는 것인지 경망하고 거만하여 우쭐거리던데, 이대로 가다가는 금산사에 아주 불리할 것입니다.”

    육화명이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강류는 도법(道法)이 깊고 의기양양한 성정에 금선자가 환생한 신분이니 경내 대부분의 장로들이 그를 추앙하여 어떤 말이든 그대로 따릅니다. 주지인 저로서도 그를 단속할 수 없게 되었지요.”

    해석선사의 자조 섞인 한숨에 육화명은 말문이 막혔다.

    “선사님, 강류대사가 장안에 가려 하지 않는 이유가 그의 성정 때문입니까?”

    심협은 해석선사가 긴 이야기를 하면서도 강류대사의 장안 동행 거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자,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육화명은 해석선사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심협의 말을 듣고서야 퍼뜩 자신들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해석선사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닙니다. 강류가 장안에 가려하지 않는 것은 몇 년 전 금선법회 때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요”

    해석선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심협과 육화명은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금선자라는 대사님을 배출한 우리 금산사에서는 해마다 한 번씩 금선법회를 엽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강류는 불학(佛學)에 자질을 보여 처음으로 금선법회에 참가하였지요. 그 아이의 설법은 정묘하기 이를 데 없어 경내 스님들 모두 탄복해 마지않았습니다. 허나 법회가 끝나갈 무렵, 요마 하나가 경내에 침입했습니다.”

    “요마라니, 어떤 요마 말씀이십니까?”

    심협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한데 그때, 어디선가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금산사에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 했더니, 잡것들이 숨어들어왔구려!”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푸른 빛줄기가 휙 하고 날아들었다. 뜻밖에도 짙푸른 계도(*戒刀: 살생을 제외한 여러 용도로 쓰기 위해 승려들이 지니던 칼)가 창문을 뚫고 단칼에 두 토막을 내버릴 기세로 심협에게 돌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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