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선아(禪兒)
금산사에는 신도가 셀 수 없이 많아 자석장로도 두 사람과 그리 오래 함께 있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그는 인사를 남기고는 소매를 떨치며 떠나갔다.
“자, 두 분 시주께서는 법회도 들으셨고, 이제 밥도 다 드셨으니 가시지요.”
자석장로가 떠나자마자 혜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축객령을 내렸다.
“우린…….”
육화명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조금 더 끌어보려고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한데 심협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허허, 금산사에서 우리를 이리도 반기지 않으니 아무래도 떠나는 게 낫겠소.”
“아니, 심형…….”
육화명은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심협이 신식으로 목소리를 전하고는 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에 육화명은 눈빛이 잠깐 흔들리는 듯하더니 군말 없이 심협을 따라 나섰고, 두 사람은 곧 금산사를 빠져나갔다.
혜명화상 등은 그들이 진짜 떠나는 것을 보고나서야 안도했다.
“심형, 방금 그게 무슨 말이오? 정말 이대로 가는 거요? 돌아가서 사부님과 원 국사님께 어찌 설명하겠소?”
금산사를 벗어나자마자 육화명이 물었다.
“물론 우리는 이대로 가지 않을 거요.”
심협이 고개를 젓자 육화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이미 나왔으니 다시는 우리를 금산사에 들여보내지도 않으려 할 텐데…….”
“그들이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저녁까지 기다렸다 몰래 들어가면 될 일이오.”
심협이 웃으며 답하자 육화명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몰래 들어간다고? 허나 여기는 금산사요. 그대도 봤다시피 저 안에 고수들이 구름 같이 많은데, 심형은 자신이 있소?”
사실 육화명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았지만, 너무 위험해 차마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심협이 입술을 살짝 달싹이며 다시 신식으로 목소리를 전했고, 그제야 육화명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었구려! 알겠소. 그럼 우선 얌전히 떠나는 것이 좋겠구려.”
한편, 법회에 귀를 기울였던 신도들은 아직 모두 떠나지 않았고, 금산사 밖에도 적잖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강류대사의 금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데 그 사람들 틈에서 부드러운 어린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제법이회기요(觀諸法而會其要)하면 변중류이동기원(辯衆流而同其原)이라는 말은, 모든 법들을 살펴보면 그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수많은 강줄기를 분간하다보면 그들의 공통된 근원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뜻입니다.”
심협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선아?”
육화명도 멈춰 서서 가까운 곳에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두 사람은 눈빛을 한 차례 교환하고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군중들 한가운데에는 잿빛 옷을 입은 어린 화상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겨우 열한두 살밖에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눈빛이 유달리 맑고 깨끗하여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뜻이었군요. 선아 소사부(小師父)께서는 불리(佛理)에 대한 이해가 정말로 밝으십니다. 소인이 우둔하여 강류대사께서 쉽고 간단하게 설법해주셨음에도 잘 알아듣지 못해 부끄러웠는데, 선아 소사부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녹색 웃옷을 입은 부인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잿빛 옷의 어린 화상에게 감사의 예를 올렸다.
“시주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우리 불문의 제자들이 설법을 하는 것은 본디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니, 시주께서는 앞으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소승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어린 화상이 합장하며 말했다.
“선아 소사부님, 아까 강류대사께서 마지막으로 강론하신 <삼법도론(三法度論)>에서, ‘구습응어무(垢習凝於無)하고, 형누필어신화(形累畢於神化)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신도가 물었다.
“그 구절의 뜻은, 더러워진 악습이 불생불멸의 본성 속에 사라지고, 몸을 얽어매던 것이 신묘한 변화 속에 끝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잿빛 옷의 어린 화상은 전혀 막힘없이 답했다.
이어서 다른 신도들도 앞다투어 질문을 했다. 이 어린 화상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불리에 대한 깨달음이 지극히 깊었고, 설명 또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워서 질문하는 신도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었다.
‘역시 금산사는 금선자를 가르친 불가의 성지답구나. 강류대사 뿐만 아니라 이 선아라는 어린 화상도 대단해!’
심협은 깊이 감탄했다.
한참 뒤에야 모든 신도가 흩어지고 심협과 육화명만이 남게 됐다.
“두 시주께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난제라도 있으십니까?”
어린 화상이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고는 물었다.
“난제는 없습니다만, 불리에 대한 선아 소사부의 심오한 깨달음에 깊이 탄복하여 걸음을 멈춘 채 귀담아 듣고 있었습니다.”
심협이 예를 갖추고는 웃었다.
“소승은 그저 평범한 승려일 뿐이라, 감히 그런 칭찬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선아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답했다.
“선아 소사부께서는 정말 겸허하고 그야말로 군자다운 풍모이십니다. 제가 듣기로는 강류대사님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던데, 그렇습니까?”
“그러합니다. 소승과 강류는 어려서부터 금산사에서 자랐습니다.”
선아 소화상(小和尙)이 심협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류대사님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그가 왜 장안의 원혼들을 천도하러 가지 않으려 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사실 심협이 이곳에 걸음을 멈춘 이유는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두 분이 그 일을 어찌…… 아, 두 분이 바로 그 장안성에서 오신 두 시주님들이시군요. 장안성에서 목숨을 잃은 백성이 많습니까?”
선아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성안에는 음기가 감돌고 있지요. 얼마나 많은 원혼이 왕생하려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심협이 탄식에 선아는 비통한 표정으로 불호를 읊조렸다.
“선아 소사부께서는 질문에 아직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강류대사는 왜 장안에 가려 하지 않는 겁니까?”
심협이 다시 물었으나, 선아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주저했다.
“그게…….”
“선아 소사부님, 역시 알고 계시군요!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장안성에는 지금 수많은 원혼들이 인간세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천도하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심협은 애원하며 꿇어앉았다.
육화명도 침통한 눈으로 선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저는 강류와 약속을 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두 시주께서 이해해주십시오.”
선아는 고개를 저으며 확고한 투로 말했고, 두 사람은 크게 실망했다.
“부처님께서도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선아 소사부께서는 당신의 신망만이 중요하다 여기십니까? 아니면 장안성의 수많은 원혼을 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십니까?”
심협이 정색하고 물었다.
“그…… 그야 당연히…… 원혼들을 천도하는 게 중요하지요.”
선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허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일의 연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소사부께서 자신의 신용만을 위해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이는 소사부께서 헛된 명성을 탐하는 위선자이자 땡중이요, 진정 자비심이 없음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주계(*酒戒: 술을 금하는 계율)나 훈계(*葷戒: 육식을 금하는 계율)를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잘못입니다.”
육화명은 심협이 이렇게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며 속으로는 웃었지만, 얼굴은 잔뜩 굳은 채로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 그런가요?”
선아의 작은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으나,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고개를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소승 신의를 저버리고 알려드리지요. 사실 강류 그는…….”
바로 그때, 선아의 몸에서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아, 네가 감히 내 비밀을 남에게 알리려는 것이냐! 간덩이가 부었구나!”
그것은 분명 강류대사의 목소리였다.
심협과 육화명은 갑작스런 상황에 안색이 돌변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선아의 가슴팍에서 돌연 노란 빛이 번득이더니, 다음 순간 갑자기 불어나 반경 1장의 광진(光陣)을 이루며 선아의 몸을 감쌌다.
심협과 육화명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선아를 둘러싼 노란 광진이 번득였다. 동시에 광진에 휩싸인 선아의 모습도 번쩍하고 사라져 점점이 노란 잔광만이 남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이건…… 토둔법진(土遁法陣)? 강류대사가 법술도 할 줄이야!”
심협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육화명이 조금 당황한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빌어먹을! 강류대사의 비밀을 알아보다가 들켰으니 아마 우리를 더욱 미워할 거요. 그를 장안으로 모셔가기가 더 어려워지겠소.”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식으로 목소리를 건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생각해봐야 소용없소.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행동합시다. 우선 적당한 곳을 찾아서 쉬다가 저녁에 다시 오지요.’
심협은 산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육화명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산중턱에서 조용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밤이 찾아왔다.
이들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삼경(三更: 밤 12시)이 가까워진 후에야 감았던 눈을 뜨고 금산사로 향했고, 금세 금산사 후문에 이르렀다.
금산사 안은 온통 칠흑 같이 어둡고 텅 비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승려들 모두 이미 침소에 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감히 방심할 수 없었기에 각자 법술로 기운을 숨기고 소리 없이 담을 넘어 절 안으로 들어갔다.
‘해석선사의 처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소?’
육화명이 신식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지만, 괜찮소. 고충에게 그의 냄새를 기억하게 하였으니 대신 찾아줄 것이오.’
심협이 손을 뒤집어 꺼내자 영고는 곧장 공기 중의 냄새를 맡더니, 즉시 나는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심협과 육화명 모두 출규기 수사이니 이미 고수 반열에 든 셈이었다. 덕분에 절 안의 금제를 가볍게 피해 절 안 사람들의 주의를 전혀 끌지 않고 곧 금산사의 비교적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깐!’
육화명이 손을 들어 심협을 제지했다.
‘왜 그러오?’
심협이 영고를 불러 세우며 신식으로 물었다.
‘저 앞에 누군가 넓은 범위에 걸쳐 매우 정교한 금제를 쳐두었소.’
육화명은 어떤 동술(瞳術)을 쓰고 있는지 두 눈동자에 하얀 빛을 어렴풋이 번득이며 낮게 신식을 전했다.
심협은 법력을 눈에 주입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봐서는 보이지 않소. 이 금제는 매우 은밀한 것이 진을 친 자의 경지가 상당한 것 같소. 이걸로 살펴보시오.’
육화명은 하얀 수정 구슬을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구슬을 받아 법력을 주입한 뒤 눈에 가져다 대 채 앞을 보고는 금세 안색이 변했다. 구슬을 통해 살펴보니 허공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가느다란 법진 문양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수많은 하얀 빛들이 그 속에서 마치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처럼 반짝였다.
“해석선사는 더 앞에 있을 텐데…… 설마 영고가 추적에 실패했단 것인가?”
심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뜰에 갑자기 밝은 불빛이 나타났다. 어둠 속이라 유달리 눈에 띄는 이 불빛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심협과 육화명은 표정이 변하여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한데 어쩐 일인지 영고가 갑자기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뜰을 향해 튀어갔다.
심협은 이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곧장 조용히 밝혀진 작은 뜰로 신식을 뻗어 보고는 이내 안색이 풀어지며 숨어 있던 곳에서 걸어 나왔다.
“육형, 숨을 필요 없소. 바로 여기요.”
이어서 그는 뜰 안, 불이 밝혀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허름한 가옥으로, 벽은 이미 얼룩덜룩하게 벗겨졌고, 방 안에도 아무런 장식 없이 한구석에 마른 풀이 깔린 침상 널빤지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해석선사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심협은 밖에서부터 이곳이 누추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다소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