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91화 (391/1,214)
  • 391화. 주지 스님

    “그뿐만이 아니라네. 저기를 좀 보게.”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광장 다른 편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옆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천을 두른 사람들이 몇 명이나 앉아 있었다.

    “어찌 관이 여기 있단 말입니까?”

    심협이 의외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강류대사님의 설법은 세상 사람들에게 두루 은혜를 베풀 뿐만 아니라 망령까지 천도할 수 있다네. 내 듣기로, 저 관에는 어느 부인이 들어 있다더군. 악독한 시어머니에게 쫓겨났는데 울분을 못 이기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나. 원한이 너무 깊을까 두려운 마음에 가족들이 금산사에 보내어 강류대사님의 천도를 받으려 한다는군. 이런 일이 자주 있다네. 죽기 전에 아무리 큰 원한을 품은 망령이라도 대사님께서는 그들을 천도하실 수 있으니 말이야.”

    노인이 계속해서 뽐내듯 말했다.

    심협이 자세히 보니 관 위에는 과연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원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강류대사라는 자의 재주를 좀 봐야겠어.’

    그때, 광장의 단상에 쳐진 보장 너머에서 목어를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강류대사가 설법을 시작했다.

    “대저 종극은 무위하여 지위를 확립하지만 성인은 그 능력을 이루느니라. 혼명은 대사하여 운이 트이지만 성쇠가 그와 합하여 변하느니라. 그러므로 위험을 알면 서로 미루기가 쉽고 이치에는 내막이 숨겨져 있나니. 굽힘과 폄이 서로 감응하고 수차례 왕래하는 것은…….”

    낭랑한 목소리가 보장 안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온 광장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별다를 것 없다 여기던 심협도 몇 마디 더 듣고는 차츰 진지한 얼굴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류대사의 설법에는 수련에 관한 것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 어떻게 하면 마음을 맑게 하여 자기가 지닌 불성을 깨닫고 고난에서 해탈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불음(佛音)이 귀에 쏙쏙 들어오니 머릿속 신혼의 힘이 평온해지면서 마음은 마치 샘물에 씻긴 듯 투명하게 맑아졌다. 강류대사가 장안으로 가려 하지 않아 생겼던 번뇌도 차츰 사라지면서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잠깐! 다른 사람이 내 기분에 영향을 끼치다니!’

    심협은 이내 뭔가 이상함을 알아채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는 곧 강류가 정신을 미혹시키는 법술 따위를 부린 것이 아니라, 그 의 설법이 마음에 환희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광장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환희가 가득했다.

    설법 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치자, 놀랍게도 근처의 천지영기가 따라 일렁이기 시작하면서 송이송이 금빛 꽃들로 응결되어 흩날렸다. 이 꽃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닿자마자 그들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이런 광경은 당연히 평범한 사람들은 볼 수 없었고, 수련 경지를 지닌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다.

    “혀로 금련(金蓮)을 피워내니, 허공이 눈부시게 빛나는구나! 강류대사의 설법이 이 정도 경지에 도달했을 줄이야!”

    심협은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정한 대가와 고승들이 도를 전하며 보시할 때에만 이런 광경이 나타나는 법이었다.

    “이게…… 우리 눈이 어두웠던 모양이오. 이 강류대사란 분은 정말 득도한 고승이구려!”

    육화명도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심협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 주변의 원기(怨氣)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더니 머지않아 말끔히 사라졌다. 이윽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혼령이 관에서 천천히 솟아올라 멀리 단상을 향해 몸을 굽혀 절을 하고는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심협은 크게 마음이 흔들려 단상 위의 강류대사에게 탄복해 그의 말을 더욱 경청했다.

    강류대사의 설법은 계속되었고, 무려 반나절 가까이 지속된 뒤에야 끝났다.

    강단 아래의 사람들 모두 아직 설법에 심취해 있어서 광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심협도 반쯤 넋이 나가 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한바탕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나니 수확이 적지 않았다. 주로 신혼에 관한 수확이었다.

    심협은 이제 갓 출규기에 들어선 터라, 폐관하며 경지를 탄탄히 다져놓았다고는 해도 아직 신혼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설법을 주의 깊게 듣고 나자 신혼이 완전히 안정되어 적어도 반년동안 고된 수련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보았다.

    한편, 강류대사는 설법이 끝나자 보장 안에서 걸어 나와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절 안으로 향했다.

    금산사의 많은 승려들이 그 뒤를 바삐 따라가 강류의 곁을 빼곡하게 둘러쌌다. 당석 장로도 그 가운데 섞여 잔뜩 아부하는 기색으로 강류에게 뭔가를 떠들어댔다.

    강단 아래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잇달아 강류를 향해 멀찍이 절하며 감사를 표했다.

    “여러 시주님들, 금선법회는 끝이 났으니 향적당(香積堂)에 가셔서 잿밥들 드시지요.”

    승려 하나가 단상으로 올라와 두 손을 합장하며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고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절 안의 어느 편청(*偏廳: 주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으로 향했다.

    “강류대사가 득도한 고승인 이상 절대로 놓칠 수 없소. 심형, 다시 가서 부탁을 해봅시다. 어떻게든 그를 장안으로 모셔서 수륙대회를 주재하게 해야 하오.”

    육화명은 벌떡 일어나 심협을 끌고 강류대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하지만 어디선가 자색 옷의 무승들이 나타나 앞을 막아섰다.

    “두 시주님들, 강류대사님의 설법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 앞은 우리 금산사의 요지라 외부인은 출입을 금하니 두 분은 걸음을 삼가시지요.”

    혜명화상(和尙)이 쌀쌀맞게 말했다.

    “혜명 대사님, 조금 전 밖에서는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허나 우리 두 사람은 소란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라 강류대사께 부탁드릴 일이 있을 뿐입니다.”

    육화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는 강류대사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두 분께서는 나가 주시지요. 대사님께서는 두 분을 만나실 마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혜명의 차가운 목소리에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류라는 자는 어찌하여 자신들을 그토록 경계하고 내쫓으려 한단 말인가?

    “대사님들, 우리가 강류대사께 부탁드리려는 것은 공덕이 한량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그마한 성의이온데 여러분께서 편의를 봐주신다면 나중에 저희 두 사람이 꼭 다시 두둑이 사례하겠습니다.”

    심협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는 선옥 서른 개가 든 작은 꾸러미를 꺼내 혜명화상의 손에 쥐어주었다.

    혜명화상은 선옥이 묵직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눈에 탐심이 돌며 주머니를 받으려 했지만, 손을 뻗다가 말고 그대로 멈췄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일은 강류대사의 분부이니 두 분은 당장 절을 나가십시오.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혜명화상은 있는 힘껏 고개를 도리질하며 정색하고는 말했다.

    다른 무승들은 부채꼴로 심협과 육화명을 둘러싸고는 여차하면 공격이라도 퍼부을 태세를 취했다.

    심협과 육화명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 무승들의 경지는 다들 벽곡기 정도에 불과해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제압할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금산사와 척을 지게 될 테니 강류대사를 청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그때, 노기를 띤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것이냐! 멈추지 못할까!”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이 멀리서 걸어왔는데, 한 사람은 자석장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노승려였다. 이 노승려은 피부가 새까맣고 나무껍질처럼 바싹 말랐으며, 두 손은 마치 닭발처럼 야위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같았다. 한 차례 바람에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심협은 이 노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비쩍 마른 노승은 볼품없는 외모와 달리 체내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온몸의 정수가 몸 가장 깊은 곳에 농축되어 있는 것처럼…….

    현재 심협의 경지와 감별력으로도 노승의 깊이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설마 불문(佛門)의 고선(枯禪)을 수련한 사람인가?’

    그는 예전에 읽었던 어느 고서에서 이런 불문의 선법(禪法)에 대한 기록을 본 기억이 났다. 그 위력은 대단하지만, 수행 조건이 까다로워 변함없는 항심(恒心)과 대단한 의지력을 지닌 자가 아니면 수련할 수가 없었다.

    “주지 스님! 자석장로님!”

    혜명을 비롯한 승려들이 재빨리 두 사람에게 황급히 예를 갖췄다.

    ‘금산사의 주지였군! 어쩐지 심오한 경지를 지녔다 했지.’

    심협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자석장로가 그와 육화명에게 말을 건넸다.

    “심 도우, 육 도우. 이분은 우리 금산사의 주지이신 해석선사(海釋禪師)이십니다.”

    “주지 스님을 뵈옵니다.”

    심협과 육화명은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췄다.

    “두 시주께서는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두 분께서 오신 이유는 이미 자석 사제에게서 들었습니다. 다만, 불법(佛法)은 인연에 따르는 것을 중히 여긴답니다. 모든 것에는 인과(因果)가 있지요. 두 시주께서는 아직 금선의 환생과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무리하게 요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해석선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사님, 그 말씀은……?”

    육화명이 공수하며 입을 열었으나 말끝을 흐렸다.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것은 잘못이거늘…….”

    해석선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형, 이 늙은 주지승이 뭐라는 거요?’

    육화명은 알쏭달쏭한 말을 듣고는 심협에게 물었다.

    심협은 해석선사를 바라보며 잠시 눈빛을 반짝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자석 사제, 두 시주께서는 먼 길을 오셨으니 홀대해서는 아니 되네. 두 분을 향적당에 모시고 가서 잿밥 한 끼 대접하여 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나.”

    해석선사는 자석장로에게 한마디 분부를 남기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해석선사님. 아직 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 인연은 언제쯤 다가옵니까?”

    심협이 불쑥 소리 높여 물었지만, 해석선사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멀어져갔다.

    “두 시주님들, 이 일은 주지 사형께서 돕고자 하셔도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빈승을 따라 오시지요.”

    자석장로는 한숨을 내쉰 뒤, 광장 근처 편청으로 향했다.

    육화명은 일단 절에서 쫓겨나는 것은 면했다는 데 만족하며 일단 식사를 빌미로 시간을 벌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반면 심협은 해석선사의 뒷모습을 심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해석선사의 말에는 다른 뜻이 숨겨진 듯했는데, 더 말하려 하지 않으니 도대체 그 밑바닥에 무슨 생각이 깔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멀어져가던 해석선사가 돌연 손으로 가슴팍을 쓸며 세 번 기침을 하더니, 뒷짐을 진 채 다시 멀어져갔다.

    심협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이내 평온한 얼굴로 자석장로를 따라갔다.

    혜명화상을 비롯한 사람들은 주지의 분부 때문에 감히 더는 심협 일행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강류대사의 명을 받은 것인지, 줄곧 두 사람의 꽁무니를 쫓으며 엄하게 감시했다.

    자석장로는 심협과 육화명을 편청으로 안내해 함께 잿밥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혜명화상 등은 마치 죄인을 감시하는 것처럼 심협과 육화명 주위에 흩어져 눈조차 떼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육화명은 먹는 데에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심협은 무심하게 두 그릇이나 비웠다. 이에 육화명은 속으로 끙끙 앓으며 심협에게 눈을 흘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