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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89화 (389/1,214)
  • 389화. 말 못 할 사연

    “대사께서는 책잡지 말아 주십시오. 제 동료는 언제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길 좋아하니 양해를 구합니다.”

    심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쳇, 누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고…….”

    육화명이 뒤에서 툴툴거렸다.

    “저희는 보장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듣기로는 귀사(貴寺)의 법회에 쓸 것이라 하더군요.”

    심협은 육화명의 불평을 외면하고 보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 경내 휘장이 얼마 전에 망가지긴 했지. 이리 주시오.”

    무승은 심협을 힐끗 보고는 손을 내밀어 가져가려 했다.

    “대사님의 법명이 어찌 되십니까? 귀사 광포당의 자석장로께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심협이 뒤로 살짝 물러서 피하자 자색 옷의 무승은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딜 감히! 이리 가져오지 못하겠느냐!”

    무승은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빛을 피워올리며 다시 재빠르게 보장을 낚아채려 했다.

    금산사는 최근 몇 년 동안 명망이 날로 높아져 엄연히 강주 제일의 수선 문파가 되었다. 거기다 최근 경내의 기풍도 크게 바뀌어 자줏빛 옷의 무승은 문파의 명성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구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심협과 육화명에게서 느껴지는 법력 파동을 무시했다.

    그러나 무승의 손이 보장에 닿기가 무섭게 한 가닥 부드러운 힘이 전해져왔다. 비록 매섭거나 날카로운 힘은 아니었지만, 물결이 일렁이듯 끊임없이 이어져 보장을 낚아채려던 손을 튕겨냈고, 그의 몸을 보호하던 법력까지 꿰뚫었다.

    자색 옷의 무승은 팔뚝이 얼얼해졌고, 몸의 힘이 반쯤 풀려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나게 되자 안색까지 바뀌었다.

    “제가 부탁을 받은지라 함부로 남에게 넘길 수 없으니 대사께서 이해해주시지요.”

    심협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무승은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다시 한 걸음 나섰지만, 스스로도 눈앞의 청년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누가 이리 소란이오?”

    굳게 닫혔던 절의 문이 열리고 황색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뚱뚱한 몸매를 헐렁한 옷으로 덮은 이 승려는 두 귀가 아래로 늘어져 마치 미륵불 같았지만, 눈빛만은 음침하고 차가웠다.

    그를 본 심협과 육화명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출규기 수사로, 그들 두 사람보다 경지가 위인 듯했던 것이다.

    “당석(堂釋) 장로님! 이 두 미친놈들이 강류대사님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고, 법회에 사용할 보장도 잠시 빼앗아갔습니다. 제자가 되찾아 오려했사오나, 저자가 사술을 사용하지 뭡니까! 제가 보기에 이놈들은 분명 절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오늘 법회를 망치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무승이 황급히 거짓으로 고자질을 해대는 모습을 보며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가의 제자 된 몸으로 어찌 이런 거짓 망발을 내뱉는단 말인가?

    “두 분 도우, 혜명(慧明)의 말이 사실이오?”

    당석 장로는 안색을 굳히며 심협과 육화명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석 장로께서 오해를 하셨군요. 금산사의 불명(佛名)은 널리 알려져 천하에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우리가 어찌 감히 귀사의 법회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이 보장을 귀사의 자석장로께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여기 혜명 대사님께 드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장로께서 양해해주시지요.”

    심협은 은근히 목소리를 높여 사과했다. 그러자 주위 참배객들의 이목이 이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두 도우께서 보장을 대신 전해주러 오셨다니, 안으로 드시지요. 혜명, 가서 자석장로를 모셔오너라.”

    당석 장로는 근처 참배객들을 슬쩍 보고는 재빨리 답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심협은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육화명에게 눈짓을 했고, 두 사람은 당석 장로와 혜명을 따라 금산사로 들어섰다.

    사문(寺門) 뒤에는 거대한 광장이 있었는데, 바닥은 하얀 백옥을 깔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이가 사람 키만 한 청동 솥 아홉 개가 각각 개씩 세 줄로 서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짙은 단향이 광장에 엉긴 채 흩어지지 않았다. 그곳은 평소 경전을 강론하고 포교하는 곳인 듯했다.

    이 광장뿐만 아니라 금산사의 다른 곳들도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했는데, 바닥은 하나같이 백옥이나 청옥이었고, 경내 불당의 기둥과 대들보마다 조각과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위기가 여느 사찰들과는 달랐다.

    이런 광경에 심협과 육화명 모두 깜짝 놀랐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자색 옷의 무승은 심협에게 슬쩍 눈을 부라리고는 성큼성큼 절 안으로 걸어갔다.

    “두 분은 어디서 오신 도우들입니까? 금산사에는 무슨 용건으로 오셨지요?”

    자색 옷의 무승이 멀어지자, 당석 장로는 그제야 심협과 육화명을 돌아보면서 물었는데,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냉기가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두 사람은 금산사를 흠모하여 찾아오던 참인데, 그러던 중 산 아래에서 만난 마부의 부탁으로 이 보장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출규기 고수이신데 일개 범부의 물건을 가져다주러 오셨을 리가요?”

    당석 장로의 차가운 목소리에 심협은 웃으며 반박했다.

    “버러지와 가축, 신선, 부처, 범인 모두 중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출규기가 아니라 더한 수사라 해도 마부 대신 보장을 전해주지 못할 건 또 뭐랍니까?”

    “그건…….”

    당석 장로는 말문이 턱 막혔으나, 이내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내뱉었다.

    “두 분은 도대체 뉘시오? 더 이상 억지를 부린다면 빈승도 참지 않을 것이니, 무정하다 원망치 마시오.”

    그는 성미가 불같은지 대번에 성을 냈다. 동시에 그의 발에 금빛이 번쩍 스치더니 밖으로 드러난 발바닥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변했다. 그는 그 상태로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쿠르릉!

    지면이 진동하면서 근처의 건물들도 한 차례 흔들렸다.

    “대사께서는 참으로 신통하시군요. 금산사의 금강복마대법(金剛伏魔大法)은 과연 위력이 놀랍습니다. 한데 대사께서는 뜻이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외부인들에게 늘 이리 주먹을 휘두르시는 겁니까?”

    자신들을 몰아세우는 당석의 태도에 화가 났으나, 육화명은 애써 참아가며 자기 정체는 드러내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심협은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이 뚱뚱한 승려와 싸우게 되면 승부는 둘째 치고 금산사와 사이가 틀어질 터였다.

    이 금산사란 곳은 괴상야릇하여 그는 바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우선 상황을 살핀 후 강류대사를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더 숨겼다가는 정말 일이 틀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그가 막 두 사람을 말리려 할 때였다.

    “아미타불. 당석 사형, 이 두 시주께서는 빈승을 찾아 오셨으니 빈승이 접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불호(佛號)를 읊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장한 체구의 중년 승려가 다가왔다. 한 걸음 뒤에서는 조금 전의 자색 옷 무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자석 사제.”

    중년 승려를 본 당석 장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 중년 승려는 기운이 더없이 깊은 데다 역시나 출규기 수사였다. 키가 크고 마른 데다 낯빛이 누렇게 뜬 것이 폐병을 앓는 듯했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당석 사형, 법회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아 강류대사께서 재촉하셨습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때를 놓칠까 걱정입니다.”

    중년 승려가 목소리를 낮춰 당석 장로에게 말했다.

    “그래, 좋네. 이 두 사람은 사제에게 맡길 테니 알아서 처리하시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야.”

    당석 장로는 한참이나 묵묵히 사제를 노려보다가 콧방귀를 뀌고는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떴다.

    자색 옷의 무승도 재빨리 따라붙었고, 두 사람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를 지켜본 심협과 육화명은 금산사에도 세력 다툼이 있는 듯하여 더욱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석장로님, 저희 둘이 산 아래에서 마부 한 사람을 만났는데, 마차가 망가지는 바람에 이 보장을 가지고 올 수가 없게 되어 저희에게 대신 가져다드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받으시지요.”

    그는 앞으로 나아가 손에 든 보장을 건넸다.

    “두 시주님들, 감사합니다. 마침 보장 때문에 근심하던 차였는데, 다행히 두 분 시주께서 제때 오셨군요.”

    자석장로는 보장을 받아 들어 두어 번 훑어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시주께서 급한 볼일이 없으면 빈승의 방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시면 어떻겠소?”

    “바라던 바입니다.”

    자석장로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청하자 심협은 흔쾌히 답했고, 육화명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절 안쪽으로 들어가 곧 어느 선원(禪院)에 도착했다.

    이 작은 선원은 바깥의 금빛 찬란한 사찰과 전혀 달리 사치스런 느낌은 거의 없었고, 검은 벽돌에 잿빛 기와를 얹어 깔끔하고 단순했다.

    자석장로는 제자 한 명을 불러 보장을 맡긴 뒤, 심협과 육화명을 안내해 방으로 들어갔다.

    “두 도우께서는 경지가 심오하고 기운이 비범하시니 변변찮은 이들은 아닌 듯한데, 함자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 금산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뜨거운 차 석 잔을 직접 우려내고 나서야 자석장로가 물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일개 산수이지요. 이분은 대당관부 정 국공 좌하(座下)의 제자 육화명입니다. 저희가 금산사에 방문하게 된 것은 강류대사를 뵙고자 해서이온데, 앞서 무례를 범하고 말았으니 자석장로께서는 부디 책망치 말아주십시오.”

    심협은 더는 숨기지 않고 두 사람의 신분과 방문 이유를 밝혔다.

    “심 도우와 육 도우셨군요. 한데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강류대사를 뵙고자 하십니까?”

    자석장로는 육화명을 한 번 더 눈여겨보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대당관부 사람인 육화명이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심협이 슬쩍 눈길을 주자 육화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수하며 나섰다.

    “자석장로께서도 얼마 전 장안성에 귀환이 일어났던 것을 아실 테지요?”

    “그 일은 이미 온 천하에 전해졌으니 빈승도 알고 있지요.”

    자석장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 연신단에서 귀물들과 결탁하여 장안에 큰 소란을 벌인 탓에 대당관부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여러 동지들과 전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덕분에 이번 재앙을 막아내긴 했습니다만,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어 원혼들이 남아 떠돌고 있지요. 이에 폐하께서는 장안 백성들을 위해 수륙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셨는데, 이 대회를 주관할 덕망 높은 고승이 필요합니다.

    강류대사께서는 금선자(*金蟬子: 불조여래의 두 번째 제자, 삼장법사의 전생)의 환생이시며 불법이 뛰어나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하여 강류대사께 장안에서 설법을 베푸시고 원혼을 천도하여 주십사 청을 드리기 위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육화명이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백성들을 마음에 품으셨으니 만백성의 큰 행운입니다. 다만, 강류대사…… 그는…….”

    자석장로는 두 손을 합장하며 황제를 찬송했지만, 이내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심협은 자석장로의 이런 표정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류대사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육화명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강류대사는 절을 떠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금산사에서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분이라 대회를 주재한다고 해도 그에게 명령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뭐라 답을 드릴 수는 없으니, 이리 하십시다. 제가 두 분을 강류대사께 모셔다 드릴 터이니 직접 말씀해보시지요.”

    자석장로의 제안에 육화명과 심협은 서로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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