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85화 (385/1,214)
  • 385화. 또 다른 의심

    정교금은 한 뼘에 조금 이르지 못하는 은빛 옥병 하나를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병을 받았다. 옥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무게는 수백 근이라 법력을 운행하고서야 제대로 들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신식을 움직여 병 안을 살펴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에도 이원진수가 가득 들어 있어서 일전에 진강에게서 얻었던 것보다 몇 배는 많았다.

    “국공 대인의 후한 하사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협은 손을 뒤집어 옥병을 챙기고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많은 이원진수가 생겼으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무명공법을 응혼기 정점까지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이후 출규기를 돌파하는 것에도 제법 자신이 있었다. 이미 꿈속에서 출규기를 돌파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분히 강인한 신혼의 힘이라는 것을, 그래야만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 명하 강가에서 연신단의 두 혼수를 흡수하여 신혼의 힘이 3할 이상 증가한 터라 출규기에 충격을 가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이번에 꿈속에서 얻은 무명공법의 후반부에는 출규기 돌파를 도와주는 삼원개태(三元開泰)라는 비법도 있었으니, 돌파 확률을 더 높일 수 있을 터였다.

    “감사는 무슨! 이건 네가 응당 받아야 할 물건인데 지금까지 질질 끌다가 이제야 네게 주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정교금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크게 웃었다.

    “국공 대인께서 농담을 하시는군요. 귀환 때문에 혼란한 와중이니 이리 구해주신 것만 해도 실로 감사합니다.”

    심협은 다시 한번 공손하게 답하며 포권을 했다.

    “국공 대인과 원 국사께서는 아직 하실 이야기가 더 남은 듯하니, 다른 분부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말했다.

    사실 정교금에게 장안의 마혼에 관한 일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하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원천강이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그는 이 사람을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의 경지가 워낙 높기도 하고, 명하 강가에서 마수수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기도 했다.

    “심 소우, 그리 급히 떠나지 말게. 원모가 오늘 국공부에 방문한 것은 국공 대인과 상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우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네.”

    원천강이 불쑥 그렇게 말했을 때, 심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국사 대인께서는 저를 어인 일로 찾으시는지요?”

    “그날 저승의 명하 강가에서 빈도(貧道)가 폐하를 구한 뒤 시전한 부혼비술(附魂秘術)에 시한이 있기에 폐하의 혼백을 모시고 먼저 돌아왔네. 정 국공의 제자 육화명이 말하기를, 경하용왕과 최후까지 싸운 것이 바로 소우라지. 그 악룡은 우리 대당 조정과 원한이 아주 깊다네. 내 이번에 온 것은 그와의 마지막 대전 상황을 다시 한번 상세히 듣기 위함일세.”

    원천강은 심협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심협은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눈빛이 약간 일렁이는 것을 원천강은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심 소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가?”

    원천강의 물음에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풀었다.

    그는 마수수와 교분이 조금 있었지만 생사를 함께할 정도는 아니었고, 앞서 천년영유 일로 약간 껄끄러워지기도 했으니 그녀를 위해 뭘 감추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마수수는 원천강의 화신이 원수성이고 그가 계략을 세워 경하용왕을 음해했다고 했는데, 그 말에 심협은 줄곧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정교금도 자리에 있으니 원천강이 어찌 답하는지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닙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다만 떠올리기 좋은 기억은 아니다보니……. 그날 제가 검을 들고 그 경하용왕을 추격한 뒤…….”

    심협은 그날 경하용왕을 추적했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이 이야기들을 처음 들은 정교금은 표정이 몇 번이고 변한 반면, 원천강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뭔가 매우 곤란한 문제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마수수는 용이 되어 떠났고, 저도 혼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정부에 와 있었습니다. 일의 자초지종은 이러합니다. 터럭만큼도 숨김이 없었으니, 믿지 못하신다면 저승에 증좌를 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협이 공수하며 말을 마치자 원천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세히 말해주어 고맙네, 심 소우.”

    “별말씀을요. 다만 전에 정국공께 당시 경하용왕의 일을 들어보고 그날 저승에서 마수수의 말을 또 들어보니,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 원수성의 정체에 대한 말은 실로 극과 극이었는데,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심협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원천강에게 곧바로 물었다.

    “그래, 당시 원수성의 일은 내 마음속에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정말로 국사의 소행은 아니겠지요?”

    정교금도 고개를 돌려 원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이 원모가 경하용왕과 원한이 좀 있어 일찍이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 동하긴 했으나, 나중에는 사존의 교화를 받아 전부 잊은 지 오래입니다. 더구나 이 원모는 성인군자는 못되어도 스스로에게 물어 행한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외다. 정말로 내가 계략을 꾸며 경하용왕을 해치려 했다면 부인하지 않았을 겁니다.”

    원천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정교금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한편, 심협이 보기에 원천강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이 일은 정말 그와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원수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의 행위와 수법으로 보아 경하용왕과 대당관부를 이간질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마혼인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수성이 누구든 경하용왕을 모해하고 책임을 국사께 덮어씌우려 했으니 선한 자닌 아닌 모양입니다. 허나 경하용왕은 이미 죽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정교금이 조곤조곤 말했다.

    “경하용왕은 죽었지만 마수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경하용왕의 용원을 얻어 이미 용의 몸으로 탈바꿈했고, 연신단 또한 이번 대전에서 겉껍데기만 상했을 뿐이지요. 그러니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천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정교금이 조금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수수와 연신단뿐만 아니라, 그날 저희는 명하 강가에서 회색 사람 그림자를 하나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부(地府)에 있는 육도윤회의 힘으로 경하용왕을 도왔는데, 지부 안 사람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두 선배님께서는 지부에 연락하시어 그자의 내력을 알아보신다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심 소자의 그 말이 일리가 있구나!”

    심협의 제안에 정교금이 즉시 답했고, 원천강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자신의 건의가 두 사람에게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으쓱하지 않고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장안의 귀환은 없앴지만, 배후에는 더욱 은밀한 암류(暗流)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장안에 잠복해 있는 마혼까지 더해져 언제든 다시 거센 파도가 몰아칠 가능성이 있었다.

    “두 선배님께서 제게 다른 용무가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심협은 정교금과 원천강 두 사람이 말없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두 사람에게 공수했다. 돌아가서 최대한 빨리 실력을 끌어올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격변에 대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게나. 지금 성안은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재건을 기다리고 있는 탓에 조용하지 않아 수련에 불편함이 있지. 심 소우, 우리 집에서 마음 놓고 머물도록 해라. 급히 떠날 필요 없다.”

    정교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국공 대인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이 후배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심협은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에게 다시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저 녀석, 국사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심협이 떠난 뒤, 정교금이 원천강에게 물었다.

    “총명하고 행동거지에 정도를 지킬 줄 아니, 실로 괜찮은 젊은이입니다.”

    원천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아니, 누가 그런 걸 물었습니까? 사윗감 고르는 것도 아닌데 무슨……. 나는 그 일에 대해 물은 겁니다.”

    정교금이 퉁명스레 말하자 원천강도 농담을 거두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명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확실히 비슷하기는 하나, 그는 육 현질과 또 달라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좋지요.”

    정교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청(主廳)을 떠난 심협은 곧장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정부를 나와 성안으로 향했다.

    장안성 거리의 광경은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인파는 그전의 3할에도 못 미쳤고, 성안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성 북쪽은 대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 그래도 괜찮았지만, 전쟁터의 한가운데였던 남쪽은 곳곳에 폐허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조정에서는 병사들을 파견해 수습을 도왔고, 백성들도 차례차례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처참하여 거의 집집마다 장례를 치렀고, 거리에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했다.

    눈앞의 참상에 심협은 침울해져 반드시 마겁이 강림하여 온 인계(人界)를 해치는 것을 막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예전에 임시 상점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을 한참 둘러보고 나온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몇 번의 대전을 통해 모은 선옥의 3할을 대량의 재료로 바꾸었다. 법진을 치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었다. 출규기 돌파를 위한 준비이자 정확히는 삼원개태 비술을 위한 준비였다.

    삼원개태는 진급을 돕는 특별한 비법으로, 지금껏 본 수많은 비법과는 달랐다.

    이 비술의 핵심은 삼원대진(三元大陣)을 치는 것이었는데, 삼원대진은 방어법진도 아니고 공격법진도 아닌 온령법진(蘊靈法陣)이었다. 포진(布陣)하는 사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법진 문양이 인체의 경맥과 잇닿아 있었다. 법진으로 바깥에 단전 하나를 본떠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포진하는 사람이 이 법진 안에서 수련하면, 체내 법력이 삼원대진으로 전달되어 저장된다. 적절한 시기에 다시 이 법력들을 자진의 몸으로 거둬들여 체내의 법력과 함께 수련 난관에 충격을 가하는, 놀랍도록 새로운 방법이었다. 실로 정묘해 식견이 풍부한 심협도 처음 이 삼원개태 비술을 봤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삼원대진에 저장할 수 있는 법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출규기 돌파를 보조할 때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재료들을 모두 구한 심협은 서둘러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왔다.

    그는 먼저 황토색 진기(陣旗)와 진반(陣盤)을 꺼내 방 곳곳에 배치했다.

    이 법진은 천리황사진(千里黃沙陣)이라는 것인데, 명하 강가에서 만났던 연신단 흑의 수사의 저물법기에서 얻은, 훌륭한 방어법진이었다. 이 법진은 지맥(地脈)의 힘과 맞닿아 있어 아주 튼튼했고, 출규기 수사의 공격에도 끄떡없었으며, 신식을 차단하는 역할까지 해 일반적으로 동굴 수호 용도로 쓰였다.

    단, 이 법진에도 커다란 단점이 있었다. 바로 충분히 은밀하지 않아서 일단 운행하기 시작하면 황사가 휘몰아쳐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심협은 폐관을 통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으니 이 법진이 사람들 눈에 띄는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는 재빨리 천리황사진을 설치한 뒤, 삼원대진 포진 재료를 꺼내 방 한가운데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삼원대진은 매우 복잡하고 미리 만들어진 포진 기구가 없어서, 심협은 여러 차례 법진을 설치한 경험이 있음에도 하루 밤낮이 걸려서야 설치를 마쳤다.

    이 일들을 마친 심협은 법진 한가운데의 은빛 고리 안에 가부좌를 틀고 진기 하나를 꺼내 가장 바깥에 있는 천리황사진을 가리켰다. 그러자 천리황사진이 곧바로 작동하며 황사 같은 무수한 빛이 솟구쳐 나와 모래폭풍처럼 소용돌이쳤다.

    이 방은 법진의 노란 빛을 전혀 숨기지 못해서 금세 바깥으로 퍼졌고, 몇 호흡 뒤에는 건물 전체가 황사로 뒤덮여 아주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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