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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79화 (379/1,214)
  • 379화. 천지간에 규칙을 세우다

    그 무렵, 하늘 높이 날아간 우융왕은 괴로움과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다른 요왕들을 향해 손짓했다.

    교룡의 머리에 사람 몸을 한 백발 남자가 먼저 나섰다. 그는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끝이 세 갈래로 나뉘고 날이 양쪽에 선 칼)를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푸른 빛줄기가 칼 위로 흘러나와 물살 소용돌이로 변해 손오공에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원숭이 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곧장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소용돌이 안에서 금빛 한 줄기가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바깥을 감쌌던 푸른 물살이 눈 깜짝할 새 흩어지고 손오공이 불쑥 튀어나와 교마왕(蛟魔王)을 향해 헤헤거리며 웃었다.

    교마왕은 그 모습을 보고도 화를 낼 정신도 없어 재빨리 무기를 휘둘러 근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융요왕과는 달리 이 교마왕의 몸 아래에는 시종일관 푸른 빛이 떠다녔는데, 땅 위에 서 있든 공중을 날아다닐 때든 몸이 얼음처럼 미끄러져 더없이 빨랐고, 몸놀림도 민첩했다.

    그의 손에 들린 삼첨양인도 또한 빠르고 맹렬해 칼 그림자가 빽빽하게 이어졌고, 새하얀 도광이 춤추듯 흩날려 하늘 가득 눈이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만약 심협이 저 안에 뒤덮였다면 피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오공은 역시 손오공이었다. 그는 발아래 달그림자를 연달아 번쩍이면서 손에 든 곤봉을 신기(神技)에 가깝게 휘둘러 매번 교마왕의 빈틈을 정확히 노리는 것이 여유가 넘쳤다.

    교마왕이 점점 밀리는 것을 본 우융왕이 급히 아래로 내려와 금갑원왕(*金甲猿王: 금빛 갑옷을 입은 원숭이 왕)에게 협공을 퍼부었다.

    심협은 이제 전세가 역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오공은 싸울수록 용맹해졌고, 그의 곤법은 극도로 정묘해서 둘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가며 점점 우세를 점해갔다.

    “세상에 저토록 정묘한 곤법이 있다니…….”

    심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넋을 놓고 지켜봤다.

    심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해빈철곤을 꺼내 절벽 위에서 손오공의 동작을 따라 휘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작이 다소 뻣뻣했지만, 불과 몇 합(合)만에 진해빈철곤은 그의 두 손 안에서 휙휙 바람소리를 냈고, 동작도 제법 절도가 생겨났다.

    하지만 심협은 지금 자신이 그저 동작만을 따라 하고 겉모습을 흉내낸 것에 불과함을, 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까마득히 멀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교마왕과 우융요왕뿐 아니라 세 번째 요왕도 끼어들어 원숭이 왕과 싸우고 있었다. 이 요왕은 키가 1장이 넘었고, 몸은 인간과 같았지만 서슬 퍼런 얼굴에 날카로운 이를 지닌 사나운 사자의 머리가 달렸으며, 버들부채처럼 커다란 손에는 금사대환도(金絲大環刀: 칼등에 커다란 금고리가 달린 칼)를 쥐고 있었다.

    세 요왕은 원숭이 왕을 가운데 놓고 둘러싼 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한순간 칼의 빛과 그림자가 번쩍번쩍 뒤엉켜 눈에 다 담기도 힘들 정도였다.

    심협은 그 싸움에 푹 빠져들었고, 마음과 생각까지 어느새 그림 속으로 녹아들면서 그저 겉모습만 따라하던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심협은 수정벽 안으로 들어가 금갑원왕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원숭이 왕의 동작 하나하나가 그의 몸짓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그저 겉모양만 비슷했지만, 이 순간 외형에서 정신으로, 정신에서 다시 외형으로, 곤법의 정수가 심협의 신혼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는 마침내 이 발천난봉(潑天亂棒)이라는 곤법의 참뜻을 온전히 깨달았다.

    수정벽 화면에서는 원숭이 왕의 모습이 갑자기 팽이처럼 팽그르르 회전하며 솟구쳐 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금고봉도 커다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빙빙 돌면서 무수한 곤봉 그림자가 휘몰아쳐 사방을 뒤덮었다.

    삽시간에 우융요왕과 교마왕, 사타요왕(獅駝妖王)의 맹렬한 공세가 일제히 흩어졌고, 그들의 몸도 온 하늘을 뒤덮은 곤봉 그림자에 밀려났다.

    세 사람은 땅으로 훌쩍 내려선 뒤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금갑원왕을 향해 포권을 했다.

    손오공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돈 뒤, 땅으로 천천히 내려와 곤봉을 거둬들이려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려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 가닥 생기가 돌았고 표정에는 호전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그때, 높은 하늘에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고, 산봉우리를 거의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요붕(妖鵬)이 날갯짓하며 아래를 향해 입을 쩍 벌리는 것이 포효를 내지르는 듯했다.

    심협은 그 요붕을 보자마자 조금 전 그림 속에 빠져들었던 느낌에서 깨어났다. 분명 낯이 익었다. 예전 동쪽 바닷가에서 자신과 오홍을 집어삼켰던 곤붕과 매우 비슷했던 것이다.

    그는 요붕을 자세히 관찰했는데, 두 날개 아래에 좌우로 각각 금빛과 은빛 깃털이 보였다. 그 길이와 모양, 빛깔과 광택은 놀랍게도 그가 주운 것과 똑같았다.

    “설마…… 진짜로 같은 놈인가?”

    심협이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수정벽 안 하늘의 거대한 요붕은 이미 몸을 말아 온몸의 시커먼 빛을 거둬들이고 검은 대창(大氅)을 입은 훤칠한 남자로 변해 하늘하늘 날아 내려왔다.

    앞의 세 요왕들과 달리, 그는 인간의 몸으로 변할 때 요족의 특징을 전혀 남기지 않아 평범한 사람과 똑같아 보였다.

    심협은 그가 대창 아래로 은빛 갑옷을 입은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 위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갑옷 아래 상반신은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드러난 피부는 푸른 빛이 돌 정도로 창백했고, 그 위로 툭 불거져 나온 혈관들이 티 없이 새하얀 얼굴과 어우러져 기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요붕도 손오공을 향해 턱을 치켜들고 몇 마디를 내뱉고는 그와 겨루려는 듯했다. 하지만 손오공은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금고봉을 치켜든 채 발을 굴러 요붕을 향해 돌진했다.

    손오공의 발밑에 달빛이 부서지고 사월보가 갑자기 발동되어 몸이 가까워지던 순간, 그는 한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한 가닥 부적 문양이 나타났는데, 그 중심에는 정(定)자가 적혀 있었다. 손오공은 그 손바닥으로 요붕의 머리를 내리쳤다.

    요붕은 이 손바닥 한가운데의 정신부(定身符)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에 휘감겨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꼿꼿이 멈춰 섰다.

    손오공은 금고봉을 앞으로 내밀어 상대의 턱밑을 받치고 있었다.

    “저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심협이 뭔가 이상하다여기는 순간, 요붕이 씨익 웃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심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로서는 요붕이 어떻게 벗어났는지 한동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오공은 마치 예측한 것처럼 거침없이 하늘로 뛰어올라 허공 어딘가를 향해 금고봉을 불쑥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곤봉 그림자가 마치 산줄기처럼 땅 위에 우뚝 솟았다.

    금고봉이 지나가는 곳마다 강력한 기운이 하늘로 솟구쳐 머리 위 하늘의 엷은 구름을 찢어버렸다.

    뒤이어 요붕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 손으로 허공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방천화극(方天畵戟)이 한 자루 나타났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려 손오공에게 달려들었다.

    말로는 길었지만, 두 사람이 맞붙은 이후 실제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가 되어서야 한 사람은 몸 아래에 달그림자가 뒤따르고, 한 사람은 온몸에 푸른 빛을 휘감은 채 떨어졌다 가까워지며 제대로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도 빨라서 심협은 온 정신을 집중해야 그들의 동작을 가까스로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손오공은 금고봉을 쉬지 않고 휘두르며 발천난봉을 물 흐르듯 시전했다. 겹겹이 곤봉 그림자가 그의 빠른 움직임에 따라 갈라져 천지간의 강한 기운을 요동치게 했지만, 뜻밖에도 한데 엉겨 흩어지지 않았다.

    요붕이 장극을 다루는 솜씨도 더할 나위 없이 정묘했다. 그의 방천화극은 금고봉만큼 힘차고 묵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극의 몸과 금고봉이 연이어 맞부딪칠 때마다 가볍고 날렵하게 일격을 가했으며,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겨낼 기세로 적절하게 손오공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냈다.

    두 사람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미 백여 합을 겨루었다. 심협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지켜보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번 금고봉의 일격은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내지른 듯 서로 간에 아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곤봉 그림자가 남긴 흔적이 점점 많아지면서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였던 커다란 그물망이 서서히 나타난 것이다.

    “묘하구나! 내 아까 발천난봉의 정묘함을 완전히 깨달은 줄 알았거늘, 하늘 밖에 하늘이 또 있는 법! 제천대성은 역시 범상치 않았어. 곤법으로 진법을 만들어 천지간에 규칙을 세우다니!”

    심협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오공이 다시 한번 곤봉을 내리치자, 순간 허공에 잔물결이 일어나더니 공봉 그림자를 타고 뻗어나가 허공에 남아 있던 모든 곤봉 그림자의 흔적들을 연결했다. 그 순간 금빛 진법이 나타났고, 모든 곤봉 그림자가 한가운데로 모여들어 종횡으로 교차되면서 새 둥지처럼 요붕을 그 안에 가두었다.

    곤붕 그림자 위로 환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보이지 않는 위압이 사방에서 밀려나왔다. 요붕은 몸 주변의 공간을 완전히 봉쇄당하여 더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됐다. 또한 그의 장극이 제아무리 날쌔고 교묘하다 해도 감히 금고봉과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오공은 이 모습을 보고 금고봉을 어깨 위에 척 걸쳐 멘 채 한 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씩 웃고는,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 요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심협도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할 무렵, 요붕의 두 팔에서 금빛과 은빛, 두 줄기 광채가 빛났고, 곧이어 기이한 법력 파동이 팔뚝의 빛에서 흩어져 나왔다.

    그는 방천화극을 쥐고 잇던 손을 갑자기 풀고, 양손으로 동시에 이상한 법력을 하나 맺었다. 그러자 두 팔의 금빛과 은빛이 순간 폭발적으로 불어나면서 무수히 많은 금색과 은색 실이 되어 그의 온몸을 휘감아 덮었다.

    뒤이어 금빛과 은빛이 한 번 번쩍했을 뿐인데 요붕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 이 둔술이군.”

    심협은 시선을 위로 홱 들어 올려 서공의 남은 파동을 따라 찾아보았지만, 요붕의 흔적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손오공의 두 눈에 금빛이 반짝이더니, 그도 금고봉을 챙기고는 몸을 날려 하늘의 어느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수정벽의 화면도 그를 따라 빠르게 움직여 별안간 백 리를 지나갔다.

    손오공이 아래로 내려오자 요붕이 이미 산꼭대기에 올라선 것이 보였다. 그의 두 팔에 빛나던 금빛과 은빛은 차츰 사그라드는 중이었고, 그 위로 금빛과 은빛 깃털 문양이 드러났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심협의 귓가에도 문득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기가 있는 절벽에 바람이 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수정벽에서 들려왔다. 그저 화면이었을 뿐이었던 수정벽에서 이제는 놀랍게도 생생하고 역동적인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형님의 진시천리(振翅千里)는 정말이지 이 노손(老孫: 손오공의 자칭)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오. 훗날 강적의 심기를 건드려도 남에게 잡힐까 더는 두렵지 않을 테지. 이 법술을 쓰기만 하면 어떻게든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

    손오공이 자리를 잡고 내려선 뒤 비웃듯 말했다.

    “일곱째 아우님, 이 형이 숨기려고 진시천리를 안 가르쳐 주려는 게 아닐세. 사실 이 법술은 본명신통(*本命神通: 타고난 신통력)이라, 날 때부터 지닌 이 두 선천령우(先天翎羽)에 의지한 것이지. 자네가 이 법술을 터득하려면 나의 이 금빛과 은빛 깃털을 빼앗아 자네 팔뚝에 녹여 넣은 뒤, 나의 둔술 비결을 결합해야만 한다네.”

    요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노손이 어찌 남이 아끼는 것을 빼앗겠습니까?”

    손오공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곱째 아우님, 자네를 여기까지 유인한 것도 사실 자네에게 이 둔술을 전해줄 마음이 있어서라네. 훗날 나의 선천령우에 견줄 만한 보물을 자네가 찾아낸다면, 나처럼 될 수도 있겠지.”

    “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손오공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당연히 정말이지. 일곱째 아우 자네는 하늘에도 올라가고 바다에도 들어가지 않나. 동해용궁에 가든, 도솔궁에 가든, 언제나 우리 형제들을 잊은 적이 없고, 매번 보물이며 영약들을 가져다주었지. 이 형이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니, 이 둔술을 전수하여 약간의 성의표시를 하려는 걸세.”

    요붕이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손오공이 낭랑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하며 요붕을 향해 공수했다.

    “하하하!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다면 이 노손이 꾸물대고 거절하는 것이 도리어 결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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